야구의 사회적 역할⑳ 다양성이 만든 야구, 세상을 바꾸다 上

< 일러스트 = 야구공작소 한태현 >

지난 시리즈에서는 ‘야구 ODA’를 통해 한국 야구가 세계와 연결되는 새로운 가능성을 살펴봤다. 야구가 단순한 스포츠를 넘어 문화와 교육, 국제 협력의 수단으로 확장될 수 있음을 보여준 사례였다.

이번 시리즈에서는 한국 야구 내부의 변화를 다룬다. 외교적 확장에 이어, 리그와 조직 문화 속에서 ‘다양성’이 어떤 방식으로 자리 잡아가고 있는지를 살펴본다.

 

KBO, 다양성을 실험하다

지난 9월 20일부터 22일까지 KBO는 ‘2025 아마추어 베이스볼 위크’를 개최했다. 리틀야구, 여자야구, 대학야구가 한 무대에 올라 ‘야구의 미래와 다양성’을 주제로 함께했다. 프로 중심으로 운영돼 온 KBO가 아마추어 야구 전반을 조명한 것은 이례적이었다.

20일에는 리틀·초등야구와 여자야구 올스타전이 열렸으며, 장종훈·차우찬·채종국·최기문 등 KBO 레전드들이 참여한 야구 클리닉도 진행됐다. 참가자들은 프로 수준의 훈련과 코칭을 직접 경험했다.

21~22일에는 지역별 대학 선수 22명이 4개 팀으로 나뉘어 토너먼트를 치렀다. 시합은 SPOTV와 KBO 유튜브를 통해 중계됐으며, 연세대 김동주와 경희대 박효재가 활약한 B팀이 우승을 차지했다.

구단 스카우트들도 현장을 찾아 유망주를 관찰하며 ‘현장형 육성 플랫폼’의 가능성을 확인했다. 이번 행사는 유소년·여성·대학 야구를 아우른 KBO의 다양성 실험으로 평가된다. 다만 이런 시도가 일회성으로 끝난다면 의미는 크지 않다. 다양성은 행사를 넘어 리그 운영과 제도 속에 지속적으로 스며들 때 진정한 힘을 발휘한다.

< 2025 아마추어 베이스볼 위크 리틀야구 경기에서 어린 선수들이 플레이를 펼치고 있다. >

 

왜 한국 야구에 다양성이 필요한가

스포츠에서 다양성은 단순히 참여 인구를 늘리는 문제가 아니다. 리그가 새로운 시각과 전략을 받아들일 수 있는 구조를 만드는 일이다. 글로벌 스포츠 산업은 이미 다양성을 경쟁력의 언어로 삼고 있다. 대표적인 예가 나이키다. 

나이키는 인종과 성별, 문화를 넘어선 캠페인을 통해 스포츠를 ‘함께 하는 경험’으로 확장했다. 대표적으로 전 세계 다양한 배경의 선수들을 한 화면에 담은 〈You Can’t Stop Us〉 캠페인은 “스포츠는 우리를 멈출 수 없다”는 메시지로 큰 반향을 일으켰다. 또 〈Be True Summit〉과 같은 LGBTQ+ 커뮤니티 행사에서는 ‘누구나 선수다’라는 브랜드 철학을 실제 경험으로 확장하며 포용의 의미를 실천했다.

 

한국 야구도 마찬가지다. 기술이나 전력 강화만큼 서로 다른 시각과 가치가 공존할 수 있는 환경이 필요하다. KBO리그는 지난 40년간 안정적으로 성장했지만, 지도자와 코치, 행정 인력 대부분이 비슷한 교육과 시스템을 거쳐 왔다. 이 구조에서는 외부의 변화를 흡수하기 어렵다.

200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한국 야구는 젊은 인재들의 성장과 미국·일본 야구 기술의 흡수, 강한 군집적 훈련 문화로 국제무대에서 성과를 냈다. 그러나 지금은 리그가 성숙하고 기술이 평준화되면서 과거의 방식만으로는 새로운 경쟁력을 만들기 어렵다.

최근 KBO리그는 라이트 팬의 유입으로 관중층이 다양해지고 있다. 경기를 문화로 즐기는 팬이 늘면서 야구는 대중성을 회복하고 있다. 하지만 커뮤니티 안에서도 여전히 ‘누가 야구를 더 잘 아는가’를 둘러싼 시선 차이가 존재한다. 이런 분위기는 새로운 팬의 참여를 어렵게 만든다. 세대와 경험의 차이를 인정하고 서로의 응원 문화를 존중할 때, 한국 야구는 더 건강하게 성장할 수 있다.

리그의 다양성은 팬의 다양성과 맞닿아 있다. 야구를 잘 아는 사람만의 언어가 아니라 서로 다른 시각이 공존할 때 한국 야구는 다음 단계로 나아갈 수 있다.

< 인종, 젠더, 장애, 문화의 차이를 넘어선 스포츠 >

 

다양성이 만들어내는 변화

야구의 발전은 기술만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서로 다른 배경을 가진 사람들이 문제를 다른 방식으로 보고, 그 차이가 새로운 해법을 만드는 데 기여한다. 

최근 국제 대회에서 한국 야구의 부진 역시 이와 무관하지 않다. 전략, 선수 발굴, 팀 운영 철학이 유사한 구조 안에 머물면 새로운 환경에 대응하는 능력이 떨어질 수 있다. 대표팀의 성적 부진은 단순한 경기력의 문제가 아니라, 리그가 다양한 시각을 흡수하지 못한 결과로도 해석할 수 있다. 

전 MLB 선수이자 마이애미 말린스 구단주 데릭 지터는 “야구는 변화가 필요한 산업이다. 더 다양한 배경의 사람들이 결정권을 가져야 한다”고 말했다. 이는 단순히 인종 문제를 넘어, 리그가 새로운 관점을 받아들이는 구조로 변해야 한다는 뜻이다.

이런 변화의 상징적인 사례가 바로 MLB 최초의 여성 단장, 킴 응이다. 그는 “이건 나보다 앞서 길을 닦은 여성들, 그리고 앞으로 그 길을 걸을 여성들에 관한 이야기다”라고 말했다. 지속 가능한 다양성은 일회성 사례가 아니라, 누군가의 새로운 시도가 다음 사람의 기회로 이어지는 구조에서 시작된다.


< MLB는 여성 리더십을 포함한 다양성 확대를 추진하고 있다. >

 

다양성은 이미 한국 야구 안에 있었다

한국 야구의 다양성은 새로운 개념이 아니다. 리그 초창기부터 재일교포 지도자와 선수들이 다른 문화와 시각을 한국 야구에 가져왔다. 그들은 단순히 국적이 다른 인물이 아니라, 야구를 대하는 태도와 철학을 바꾼 세대였다.

가장 먼저 장훈이 있었다. 일본 프로야구에서 통산 3,085안타를 기록한 그는 전설적인 재일교포 타자이자, KBO 출범 당시 총재 특별보좌관으로 참여해 리그의 기틀을 세운 선구자였다.

일본의 훈련 시스템과 구단 운영 방식을 조언했고, 나가시마 시게오와 미즈하라 시게루 등 일본의 명감독을 초청해 한일 교류의 초석을 놓았다. 또 일본에서 차별받던 재일교포 선수들이 한국 무대에서 뛸 수 있도록 가교 역할을 했다.

< 한국 야구 발전과 한일 교류에 기여한 장훈은 한국 정부로부터 체육훈장 맹호장(1980년), 국민훈장 무궁화장(2007년) 등 2개의 훈장을 받았다. >

김성근 감독과 최일언 코치는 일본의 세밀한 코칭 철학을 한국 야구에 체계적으로 이식했다. 그들은 감에 의존하던 훈련 문화를 벗어나 과정을 중시하는 체계적 훈련법을 정착시켰다. 김 감독은 ‘계획된 야구’를 통해 한국적 투지에 일본식 세밀함을 더했고, 최 코치는 반복과 피드백 중심의 코칭으로 선수 성장의 방식을 바꿨다.

이들의 철학은 ‘다르게 준비하고 다르게 생각하는 방법’을 제시하며 한국 야구의 사고방식을 한 단계 확장시켰다. 재일교포 세대가 남긴 다양성의 유산은 낯선 변화가 아니라 한국 야구가 스스로 진화할 수 있음을 보여준 역사였다.

 

외국인 선수와 지도자가 보여준 새로운 리더십

2000년대 이후에는 외국인 지도자들이 이 흐름을 이어받았다. 제리 로이스터 전 롯데 감독은 “No Fear”을 외치며 감독 중심의 문화를 흔들었다. 그는 선수들에게 실패를 두려워하지 말고 주도적으로 플레이하라고 했다. 이는 단순한 전술 변화가 아니라, 한국 야구의 위계적 리더십을 흔든 첫 실험이었다.

트레이 힐만 감독은 메이저리그의 데이터 문화를 KBO에 정착시킨 인물이다. 발사각, 수비 시프트, 타구 속도 등 MLB 식 지표를 도입해 선수 보호와 전략 판단에 활용했다. 그는 “기록은 선수를 평가하기 위한 도구가 아니라, 더 나은 팀을 만드는 언어”라고 말하곤 했다.

라이언 사도스키는 롯데 자이언츠에서 활약하며 ‘잠시 머무는 외국인 선수’라는 인식을 바꿨다. 그는 팀 문화에 스며들었고, 은퇴 뒤에도 코치·스카우트·에이전시 대표로 한국 야구와 인연을 이어가고 있다. 외국인 선수의 일시적 역할을 넘어, 한국 야구의 내부 구성원으로 자리 잡은 사례다.

더스틴 니퍼트는 실력과 행동으로 다양성의 가치를 증명했다. KBO 통산 102승, 외국인 최초 100승 투수이자 서울시복지상 최우수상(2016)을 받은 첫 외국인 선수다. 현역 시절에는 매달 아동을 초청하는 ‘사랑의 좌석’ 행사를 열며, 야구가 경기장을 넘어 사회와 연결될 수 있음을 보여줬다. 현재도 ‘불꽃야구’와 MLB KOREA 등에서 활동하며 한국 팬들과 꾸준히 소통하고 KBO 무대에서 쌓은 경험을 다음 세대와 나누고 있다.

< 김병현, 니퍼트가 패널로 참여하는 MLB 인기 콘텐츠 ‘메리톡’ >

이들의 공통점은 전술, 훈련, 데이터, 문화, 사회공헌 등 다양한 영역에서 기존 한국 야구에 새로운 변화를 이끌어냈다는 점이다. 각자의 방식으로 리그의 가능성을 확장한 그들의 발자취는 다양성이 낯선 가치가 아니라 이미 한국 야구의 역사 속에서 검증된 성장의 방식임을 보여준다.

이처럼 한국 야구는 시대마다 다른 배경과 관점을 지닌 인물들을 통해 성장해 왔다. 새로운 훈련법과 지도 철학, 운영 방식은 모두 다양성이 만들어낸 결과였다. 하지만 그 변화의 상당 부분은 개인의 헌신과 시도에 머물렀다. 혁신적인 접근이 잠시 변화를 일으켰지만 제도와 정책으로 이어지지 못했다.

다양성은 개인의 참여만으로는 유지될 수 없다. 리그의 운영, 지도자 양성, 인재 발굴의 전 과정 속에 다른 시각과 배경이 체계적으로 스며드는 구조가 필요하다. 이는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한국 야구가 다음 세대의 경쟁력을 확보하기 위해 반드시 해결해야 할 과제다.

 

참고 = KBO, WBSC ,재일본대한민국민단,MLB.com,MLB KOREA,  나이키,ISO26000(국제표준화기구 사회적책임 표준), etc.

야구공작소 천태인 칼럼니스트

에디터 = 야구공작소 강상민, 장호재

일러스트 = 야구공작소 한태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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