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구의 사회적 역할⑯ 안전 없는 사회공헌은 없다 下

< 일러스트 = 야구공작소 김범수 >

이전 시리즈에서는 창원 NC파크 추락물 사고와 故 임수혁의 사례를 통해 야구장에서 안전이라는 책임이 어떻게 우선순위에서 밀려나 있었는지를 살펴봤다. 생명을 지키지 못하는 사회공헌은 결국 공허할 수밖에 없다. 안전의 공백은 반복되는 사고로 이어질 수 있다.

이번 시리즈는 그 연장선에서 구조적인 대안이 가능한지를 묻는다. 일본의 지정 관리자 제도와 재난 대응 매뉴얼, 안전 취약자 보호 체계 같은 일본프로야구(이하 NPB)의 사례를 통해 운영 책임과 권한이 실제로 어떻게 연결되는지를 살펴본다. 사회공헌이 진정한 의미를 가지려면 보여주기에 불과한 활동이 아니라 책임을 질 수 있는 시스템의 구축이 출발점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최근 발생한 창원 NC파크의 구조물 낙하 사고에서는 사고 자체만큼이나 미흡한 대응이 더 큰 논란을 낳았다. 경기 중 낙하물이 관중석으로 떨어졌지만 현장에서는 별다른 안내나 조치 없이 경기가 계속됐다. 팬들은 집에 돌아가서야 사고 사실을 알게 됐다.

NC 다이노스는 시설 소유와 관리 권한이 없다고 밝혔고, 창원시는 공공시설이라 직접 책임지기 어렵다는 입장을 내놨다. 결국 ‘야구장에서 사고가 났는데 누구도 책임지지 않는다’는 팬들의 냉소만 남았다. 이 사건은 책임지는 구조 없이 운영되는 한국 야구장의 현실을 드러냈다. 왜 이런 구조적 무책임이 반복되는 것일까.

 

소유, 운영, 사용이 나뉜 구조의 허점

현재 대부분의 프로야구장은 지자체가 소유하고 시설관리공단이 운영을 맡는다. 구단은 경기와 관람 환경만을 위탁받는 형태로 참여한다. 겉보기에는 역할이 나뉘어 있어 합리적으로 보이지만 실제로는 책임과 권한이 분산된 형태다. 사고가 발생해도 누구도 명확하게 책임지기 어려운 구조다.

팬과 가장 가까운 곳에 있는 구단은 실질적인 시설 운영 권한이 없다. 안전관리 예산과 결정권은 시설관리공단에 있지만 스포츠 현장에 대한 이해나 판단의 유연성은 부족하다.

이 구조에는 4가지 한계가 있다. 먼저 의사결정이 행정 보고 중심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에 긴급 상황에서 신속하게 대응하기 어렵다. 또한 스포츠나 공연 현장 경험이 부족해 위험 관리가 미흡하다. 이는 사고나 재난 상황 발생 때 미흡한 상황 대처를 야기한다. 예산 집행이나 설비 개선에 필요한 권한이 분산돼 있어 실제 조치까지 시간이 걸리는 점도 문제다. 그리고 공공조직 특성상 관리자의 책임이 형식에 그치는 경우가 많다.

결국 구단은 팬을 직접 상대하면서도 시설 개선이나 안전 대응에는 손을 쓰기 어렵다. 팬은 책임의 주체가 불분명한 공간에서 경기를 관람하게 된다. 구단은 사과하지만 권한은 없다. 행정은 소유하고 있지만 행동은 유보된다. 팬들 앞에 남는 것은 권한 없는 사과뿐이다.

 

구단이 책임지는 일본 구장 운영 방식

일본은 공공시설 운영의 책임 공백 문제를 줄이기 위해 2003년부터 지정 관리자 제도를 도입했다. 지자체가 민간이나 구단에 운영을 맡겨 법적 책임과 자율적 권한을 함께 부여하는 구조다. 운영 주체가 명확해지면서 사고 발생 시 책임 소재도 분명해진다.

모든 NPB 구장이 이 제도를 적용하는 것은 아니지만 대표 사례들은 운영 책임과 안전 관리가 실제로 연결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히로시마 도요 카프는 홈구장을 직접 운영하며 방재 메뉴얼과 설비 개선, 대피 시스템까지 자체적으로 관리하고 있다. 메이지 진구 구장도 민간 컨소시엄이 운영을 맡아 안전 메뉴얼을 포함한 시설 전반을 책임지고 있다.

이러한 구조는 안전 대응과 시설 개선을 보다 빠르고 효율적으로 이뤄낼 수 있게 만든다. ‘운영자가 책임도 진다’는 원칙이 실제 시스템으로 작동하는 사례다.

< 일본과 한국의 야구장 운영 구조 비교 >

다만 지정 관리자 제도가 완벽한 해법은 아니다. 수익 중심 운영으로 공공성이 약화될 수 있고 안전보다 효율이 우선될 우려도 있다. 이 제도가 제대로 작동하려면 책임과 자율성을 감시할 제도적 장치가 함께 설계돼야 한다.

삿포로 돔과 니혼햄의 사례는 이를 잘 보여준다. 삿포로시는 고액 임대료와 불리한 수익 구조를 고수했고 안전 개선 요구에도 소극적으로 대응했다. 결국 니혼햄은 기타히로시마로 연고지를 옮기고 새 구장을 자체 건설해 2023년부터 직접 운영에 나섰다. 수익과 환경, 안전을 모두 통제할 수 있는 구조를 선택한 것이다. 반면 삿포로 돔은 연고 구단을 잃고 운영의 불확실성에 직면했다.

< 혼햄 파이터스는 2023년 에스콘 필드로 이전하며 기후 대응과 안전성을 강화했다. >

결국 안전은 ‘누가 책임지는가’라는 질문에서 출발해야 한다. 지정 관리자 제도는 그에 대한 하나의 대안이 될 수 있다. 하지만 제도만으로는 부족하다. 공공성과 감시 체계, 그리고 안전을 최우선에 두는 운영 철학이 함께 필요하다.

 

폭염도 재난이다, 야구장은 더 이상 안전하지 않다

2024년 일본에서는 기록적인 폭염 속에서 경기 중 실신하거나 교체되는 사례가 잇따랐다. 과거와 달라진 기후 조건이 선수 건강에 직접적인 위협으로 다가오자 NPB는 제도적 대응에 나섰다. NPB는 2025년부터 7월과 8월 모든 야외 구장에서의 낮 경기 실시를 전면 중단하기로 결정했다. 이는 경기 일정과 운영 방식을 구조적으로 바꾸는 조치였다.

선수협의회 회장인 아이다 와타루는 “이제는 기후가 예전과 완전히 다르다”며 폭염 대응의 필요성을 공개적으로 강조했다. 실제로 여름철 더위는 단순한 컨디션 문제를 넘어 시즌 성적에도 영향을 줬다. 야외 구장을 홈구장으로 쓰는 히로시마는 지난해 9월 초까지 리그 선두였지만, 선수단의 체력 저하로 급격히 추락하며 포스트시즌 진출에 실패했다. 한 구단 관계자는 “여름 내내 누적된 피로가 시즌 후반 체력 저하로 이어졌다”고 말했다.

일본의 야구장은 이제 더위를 감각이 아니라 수치로 판단한다. WBGT(Wet Bulb Globe Temperature, 습구흑구온도지수)를 기준으로 위험 단계를 나누고 일정 수치를 넘기면 경기를 중단하거나 연기한다. 쿨링타임 운영, 냉각 장비 배치, 그늘막 설치 등도 의무적으로 이뤄진다. 정량화한 위험을 기준으로 시스템이 작동하는 구조다.

< 일본 환경성 WBGT 한국어자료 >

KBO 리그도 변화의 흐름에 일부 대응하고 있다. 2025년부터는 7~8월 일요일과 공휴일 경기 시작 시간을 기존 오후 5시에서 6시로 1시간 늦추기로 했다. 혹서기 인조 잔디 구장의 경기 편성을 배제하고 더블헤더 편성 제한 기간을 확대하는 등 여름철 기상 리스크에 대한 조치도 점차 도입되고 있다.

그러나 여전히 대응은 제한적이다. 근본적인 문제는 리그 차원의 정량적 기준 부재다. 일본처럼 WBGT 등 수치화된 위험 기준을 기반으로 경기 진행 여부를 판단하거나 쿨링타임 및 냉각 장비 운용을 의무화하는 시스템은 아직 마련되지 않았다. 각 구단이 개별적으로 대응을 하고 있다.

선수 보호 및 관중 안전 역시 현장 경험에 의존하는 경우가 많다. 특히 고척스카이돔을 제외한 전 구단이 실외 구장을 사용하는 KBO 리그의 특성을 고려하면 보다 선제적이고 체계적인 대비가 시급하다. 기후 위기의 시대, 야구장은 더 이상 안전을 ‘가정할 수 있는’ 공간이 아니다. 이제는 감각이 아니라 수치와 기준에 기반한 안전 시스템이 필요한 시점이다.

 

모두를 위한 안전은 어떻게 가능한가

재난은 모두에게 평등하지 않다. 고령자, 장애인, 임산부, 어린이와 같은 안전 취약 계층은 위기 상황에서 구조 손길이 가장 절실한 존재다. 그럼에도 많은 시설은 이들을 충분히 고려하지 못한다. 스포츠 시설은 ‘들어오기 쉬운 곳’이면서도, ‘빠져나가기 쉬운 곳’이어야 한다.

요미우리 자이언츠의 홈구장인 도쿄 돔은 이 점에서 다른 기준을 보여준다. 단순히 휠체어석이나 유도 블록을 설치한 수준이 아니다. 고령자와 장애인을 위한 대피 시나리오를 갖추고 전 직원을 대상으로 유니버설 매너 교육을 실시한다.

2024년 3월에는 실제 관중 5,000명이 참여한 대규모 유관객 지진 대피 훈련을 시행했다. 경기 종료 직후 진행된 이 훈련은 지진과 화재, 부상자 발생을 가정해 소방청과 경찰 등 유관 기관이 함께 참여한 실전 시뮬레이션이었다. 단순한 메뉴얼이 아니라 재난 시 시설이 실제로 어떻게 작동할지를 검증한 것이다. 도쿄 돔은 위험을 일상에서 상상하고, 그 상상을 훈련으로 바꾼다.

< 2024년 요미우리와 지바 롯데의 경기에서 관객 참가형으로 이뤄진 재난 대응 훈련 >

관중 흐름과 혼잡 수준 관리도 시스템이 갖춰져 있다. ‘도쿄 돔 혼잡 상황 확인 시스템’을 통해 관객은 각 게이트와 화장실의 실시간 혼잡도를 모바일로 확인할 수 있다. 더 혼잡하지 않은 동선을 스스로 선택하고 이동을 분산시킬 수 있도록 설계된 이 시스템은 사고로 이어질 수 있는 사소한 불편을 사전에 방지한다.

< 도쿄 돔 혼잡 상황 확인 시스템 일부 >

이러한 준비는 특별한 서비스가 아니라 기본이 되어야 한다. 수만 명이 모이는 스포츠 경기장에서는 평소에 드러나지 않던 약점이 재난 시 명확하게 드러난다. 대피 방송이 들리지 않는 일, 좁은 통로에 휠체어가 갇히는 일, 현장 안내 인력이 상황을 제대로 설명하지 못하는 일. 모두 언제 일어날지 모를 일이다. 이런 작은 공백들은 위기 앞에서 치명적인 구멍이 된다.

한국의 야구장도 휠체어석 같은 기본적 접근성은 어느 정도 갖췄다. 하지만 위기 상황을 가정한 시나리오, 실제 훈련, 안전 취약자에 대한 대응 체계는 여전히 공백 상태다. 진정한 공공 체육시설이라면 가장 구조되기 어려운 사람을 기준으로 설계돼야 한다. 더 나은 안전은 좋은 시설이 아니라, 더 깊은 상상력과 태도에서 시작된다.

 

창원NC파크를 포함한 한국의 공공체육시설은 그동안 운영 책임과 권한을 분산해 왔다. 공공성이라는 핑계 아래 위탁운영은 제도화됐다. 그러나 정작 사고가 발생하면 누구도 실질적인 책임을 지지 않는 구조다. 반면 일본의 일부 구장들은 운영 권한과 법적 책임을 한 주체에 집중한다. 책임의 일원화가 실제로 제도로 작동하는 것이다.

열사병 대응도 마찬가지다. 정량적 기준과 구체적인 메뉴얼의 존재는 운영자와 팬 모두가 사전에 어떻게 대응할지 익혀두게 한다. 이런 시스템은 단순한 피해 감소로 끝나지 않는다. 책임 있는 예방과 실천의 계기로 바꿔낼 수 있는 기반이 된다.

지금 필요한 것은 사고 이후의 책임 공방이 아니다. 사고 이전의 구조를 점검하는 시선이다. 안전은 시설의 문제만으로 설명되지 않는다. 운영의 철학과 제도의 구조, 그리고 ‘누구를 중심에 둘 것인가’라는 질문에서 출발해야 한다. 더 보기 좋은 경기장을 짓는 것만이 중요한 시대는 지났다. 더 안전한 기준을 함께 만드는 일. 그것이 스포츠의 공공성을 증명하는 새로운 방식이 되어야 한다.

 

참고 = HKS, 연합뉴스, 일본 환경성, 요미우리 자이언츠, 도쿄돔 시티, 에스콘필드, THE OWNER, 착한 자본의 탄생(김경식 저), Gratton, Chris; Preuss, Holger (2008). ISO26000(국제표준화기구 사회적책임 표준), etc.

야구공작소 천태인 칼럼니스트

에디터 = 야구공작소 강상민, 장호재

일러스트 = 야구공작소 김범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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