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일러스트 = 야구공작소 최주아 >
지난 시리즈에서는 한국 야구의 저변확대를 다뤘다. 체험교실이 오랫동안 저변확대의 대표적인 방식이 된 이유를 살펴봤고, 앞으로는 교육과 문화, 진로, 지역사회 등 다양한 생활 공간에서 야구와 새로운 접점을 만들어야 한다는 점을 이야기했다.
한국 야구의 과제는 더 많은 사람을 야구의 사회적 역할에 참여시키는 것이다. 최근 스포츠에서 크라우드펀딩이 주목받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많은 사람은 크라우드펀딩을 단순히 자금을 모으는 방식으로 생각한다. 하지만 스포츠에서 크라우드펀딩은 조금 다른 의미를 갖기 시작했다. 부족한 예산을 채우는 것이 아니라, 팬과 지역사회가 하나의 프로젝트를 함께 만들도록 연결하는 방식이다. 이 관점에서 크라우드펀딩은 새로운 모금 방식이 아니라, 야구의 사회적 역할을 넓히는 새로운 참여 방식이라 볼 수 있다.
크라우드펀딩은 돈보다 참여를 모으는 방식이다
크라우드펀딩(Crowdfunding)은 많은 사람(Crowd)이 조금씩 자금을 모아(Funding) 하나의 프로젝트를 실현하는 방식이다. 기존의 기부와 가장 큰 차이는 참여 방식에 있다. 일반적인 기부는 도움이 필요한 대상에게 자금을 전달하는 데 목적이 있다. 반면 크라우드펀딩은 프로젝트의 목표와 과정, 결과를 공개하고 그 과정에 사람들이 직접 참여하도록 만든다.
이러한 구조는 프로젝트를 바라보는 방식도 바꾼다. 목표 금액을 달성하면 끝나는 것이 아니라 진행 과정과 결과가 계속 공유되고, 후원자는 자신이 만든 변화가 어떻게 이어지는지를 확인할 수 있다. 프로젝트에 대한 애착과 신뢰도 자연스럽게 커진다.

< 이정후가 참여한 네이버 해피빈 장애어린이 재활 치료비 모금 프로젝트 >
한국에서도 이러한 방식은 이미 낯선 개념이 아니다. 네이버의 해피빈은 ‘콩’이라는 사이버머니를 통해 누구나 쉽게 기부에 참여하는 문화를 만들었고, 이후 사회적 가치를 담은 크라우드펀딩으로 영역을 넓혔다. 와디즈 역시 제품을 판매하는 플랫폼이 아니라 창작자와 기업이 자신의 프로젝트를 제안하고, 공감한 사람들이 제작 과정에 함께 참여하는 플랫폼으로 성장했다.
분야는 다르지만 두 사례는 같은 특징을 보여준다. 사람들은 단순히 돈을 지불하기 위해 참여하는 것이 아니다. 자신이 공감한 프로젝트가 현실이 되는 과정에 참여하기 위해 기꺼이 지갑을 연다.
스포츠는 왜 크라우드펀딩과 잘 맞을까
그렇다면 왜 크라우드펀딩은 스포츠에서 특히 주목받고 있을까. 스포츠는 처음부터 사람들의 참여를 기반으로 성장한 산업이기 때문이다. 스포츠는 관람에서 끝나지 않는다. 팬은 경기장을 찾고, 유니폼을 입고, 응원가를 부르며 팀의 역사와 문화를 함께 만들어 간다. 승리의 순간을 함께 기뻐하고, 패배의 시간을 함께 견디는 과정에서 구단과 팬의 관계는 단순한 소비자와 기업의 관계를 넘어선다.

< 야구 유튜버 ‘야신야덕’이 진행한 청소년 야구선수 지원 크라우드펀딩 프로젝트(2019) >
최근 스포츠 경영 연구에서도 이러한 특징에 주목하고 있다. 팬을 소비자가 아닌 구단과 함께 가치를 만들어 가는 공동 참여자로 바라보는 연구가 꾸준히 늘고 있다. 경기 관람뿐 아니라 지역사회 활동과 사회공헌, 디지털 콘텐츠 제작 등 다양한 영역에서 팬이 참여할수록 구단에 대한 애착과 신뢰, 장기적인 관계가 강화된다는 것이다.
크라우드펀딩은 이러한 참여를 구체적인 프로젝트로 연결하는 방식이다. 팬은 후원금을 내는 데 그치지 않고, 팀이 추구하는 가치와 사회적 역할을 함께 실현하는 경험을 하게 된다. 그래서 해외 스포츠에서는 크라우드펀딩을 자금 조달 수단을 넘어 팬과 구단이 같은 목표를 공유하고 함께 실천하는 참여 플랫폼으로 활용하는 사례가 늘고 있다.
사람들은 프로젝트보다 이야기에 참여한다
크라우드펀딩에서 사람들을 움직이는 것은 프로젝트의 규모가 아니다. 그 프로젝트가 어떤 가치를 만들고, 어떤 미래를 향해 나아가는지에 대한 이야기다. 최근 일본의 와세다대학교 야구부의 미국 원정 크라우드펀딩은 이를 잘 보여준다. 겉으로 보면 학생 선수들의 원정 비용 부담을 줄이기 위한 프로젝트다. 실제로 와세다는 미국 원정에 필요한 비용과 학생 개인이 부담해야 하는 현실을 구체적으로 공개하며 후원을 요청했다.
하지만 프로젝트가 가장 먼저 설명한 것은 비용이 아니었다. 와세다는 일본 야구팀 최초로 미국 원정을 떠났던 1905년의 역사를 소개하며, 120여 년 전 선배들이 시작했던 국제 교류를 오늘의 학생들이 이어간다는 점을 강조했다. 미국 대학과의 경기와 교류를 통해 얻은 경험을 다시 와세다 야구부와 일본 학생야구에 환원하고, 앞으로의 야구계를 이끌 인재로 성장하겠다는 목표도 함께 제시했다.

< 와세다 대학 야구부는 후원자를 위해 야구부 역사 해설과 아베 이소오 기념 야구장 견학 프로그램을 리워드로 마련했다. >
리워드 역시 기념품에 머물지 않았다. 와세다 대학은 연습장 견학과 선수 교류, 한정 굿즈 등 후원자가 원정 과정을 함께 경험할 수 있는 프로그램을 마련했다. 결국 원정은 학생들의 경비를 마련하는 사업을 넘어 일본 야구의 역사를 이어가는 프로젝트가 됐고, 후원자는 그 역사와 미래에 함께 참여하는 사람이 됐다.
세계 신체장애인 야구 일본대회의 크라우드펀딩도 같은 맥락이다. 프로젝트가 가장 먼저 이야기하는 것은 대회 운영비가 아니다. 장애인 야구를 더 많은 사람에게 알리고, 국제 대회를 지속하며, 선수들이 세계 무대에서 계속 도전할 수 있는 환경을 함께 만들자는 제안이다.
흥미로운 점은 참여 대상을 장애인 야구 관계자에 한정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프로젝트에는 은퇴 프로야구 선수들이 앰배서더로 참여해 대회의 의미를 알렸고, 일반 야구팬도 함께 응원하고 참여할 수 있는 구조를 만들었다. 리워드 역시 한정 굿즈뿐 아니라 선수들과의 교류, 대회 관람 등 종목을 직접 경험할 수 있는 프로그램으로 구성했다.
결국 이 프로젝트는 장애인 야구를 지원하는 모금이 아니라 야구 공동체 전체가 하나의 종목을 함께 성장시키는 프로젝트가 됐다. 후원자는 대회를 개최하는 비용을 부담하는 사람이 아니라 장애인 야구의 미래와 국제 교류를 함께 만들어 가는 참여자가 된다.

< 제6회 세계 신체장애인 야구 일본대회는 국제 대회 개최와 종목 인지도 확대를 위해 크라우드펀딩을 진행했다. >
왜 한국 야구에서는 크라우드펀딩이 많지 않을까
한국 프로야구는 오랜 기간 모기업과 스폰서 중심의 운영 구조 속에서 성장해 왔다. 새로운 사업 역시 자체 예산이나 기업 후원을 기반으로 추진하는 방식이 일반적이었다. 사회공헌 또한 구단이 프로그램을 기획하고 팬이 참여하는 구조로 자리 잡아 왔다. 이러한 구조에서는 팬을 프로젝트의 공동 참여자로 설계할 필요가 크지 않았다. 구단은 완성된 프로그램을 제공하고, 팬은 이를 이용하거나 응원하는 역할에 머무르는 관계가 자연스럽게 형성됐다.
하지만 스포츠를 둘러싼 환경은 변화하고 있다. 팬들은 더 이상 경기를 보는 데 그치지 않는다. 자신이 응원하는 팀이 어떤 가치를 추구하는지 이해하려 하고, 그 과정에 참여하기를 원한다. 굿즈를 구매하는 수준을 넘어 팀의 역사와 지역사회, 미래를 함께 만들어 가는 경험을 기대하는 팬도 늘고 있다.
이제 한국 야구도 크라우드펀딩을 자금 조달 방식으로만 봐서는 안 된다. 팬 참여를 확장하고 사회공헌을 새로운 방식으로 연결하는 플랫폼으로 활용할 수 있다. 중요한 것은 ‘얼마나 많은 돈을 모으는가’가 아니다. ‘팬과 무엇을 함께 만들 것인가’를 설정하는 일이다.

< 선수협과 구단 중심의 유소년 야구클리닉, 여기에 팬과 지역사회가 함께 참여하는 라우드펀딩으로 확장된다면 어떨까. >
팬과 함께 만들 수 있는 야구를 목표로 한다면
한국 야구가 크라우드펀딩을 활용할 수 있는 분야는 생각보다 다양하다. 중요한 것은 새로운 프로젝트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이미 야구가 갖고 있는 가치를 팬과 함께 완성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독립야구는 해외 교류나 해외 리그 연수 프로젝트를 팬과 함께 추진할 수 있다. 단순히 원정 비용을 지원받는 데 그치지 않고, 선수들이 현지에서 얻은 경험을 한국 야구에 환원하는 과정을 하나의 프로젝트로 설계할 수 있다.
여자 야구와 장애인 야구 역시 국제 대회와 국제 교류를 함께 만들어 갈 수 있다. 후원자는 경기 출전을 지원하는 사람이 아니라 종목의 성장과 저변확대 과정에 참여하는 사람이 된다.

< 경기도 독립 야구의 크라우드펀딩은 응원을 관람에서 참여로 바꾸는 시도다. >
지역과 연결하는 방식도 가능하다. 사라져 가는 지역 야구장의 기록을 남기거나, 원로 선수와 지도자의 구술을 아카이브로 제작하고, 고교야구 100년의 자료를 디지털로 보존하는 프로젝트도 팬과 함께 추진할 수 있다. 이는 기록 사업을 넘어 한국 야구의 역사를 다음 세대에 전달하는 사회공헌으로 이어질 수 있다.
프로구단 역시 마찬가지다. 어린이 야구교실이나 지역 교육 프로그램을 운영하는 데 그치지 않고, 팬이 프로그램 기획 단계에 참여하는 구조를 만들 수 있다. 지역 기업과 함께 교육 키트를 제작하거나, 야구를 활용한 수업 자료를 개발·보급하는 방식도 가능하다. 굿즈 역시 상품 판매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프로젝트의 의미를 담아 팬과 함께 제작하는 방식으로 확장될 수 있다. 이처럼 크라우드펀딩은 새로운 사회공헌을 만드는 방식이라기보다, 흩어져 있는 야구의 사회공헌을 하나의 흐름으로 연결하는 방식에 가깝다.
마지막으로 짚어볼 지점이 있다. 한국 야구의 사회공헌은 오랫동안 ‘도와달라’는 방식에 익숙했다. 그러나 지원을 요청하는 것만으로는 사업이 끝난 뒤 남는 것이 많지 않다. 앞으로는 자금을 모으는 과정부터 팬이 함께 참여하고, 결과를 함께 공유하는 방식으로 바뀔 필요가 있다. 크라우드펀딩의 의미는 돈을 모으는 데 있지 않다. 한국 야구의 사회공헌을 팬과 함께 만들어 가는 출발점이 될 수 있다는 점에 있다.
결국 중요한 것은 프로젝트의 규모가 아니다. 한국 야구가 어떤 가치를 남기고 싶은지, 그리고 그 가치에 누구를 참여시킬 것인지를 먼저 정해야 한다. 그 기준이 분명할 때 각각의 프로젝트는 단발적 행사로 흩어지지 않고 한 방향을 향해 이어진다. 그리고 그 축적은 한국 야구만이 만들어낼 수 있는 사회공헌의 역사와 신뢰로 남게 될 것이다.
참고 = 해피빈, 와디즈, 와세다대학, 세계 신체장애인 야구대회, 한국프로야구선수협회, 연천 미라클 etc.
야구공작소 천태인 칼럼니스트
에디터 = 야구공작소 강상민, 야구공작소 박인이
일러스트 = 야구공작소 최주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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