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일러스트 = 야구공작소 한태현 >
지난 시리즈에서 우리는 한국 야구가 다양한 지도자와 선수들을 통해 새로운 문화를 받아들이며 변화해 온 과정을 살펴봤다. 재일교포 지도자의 세밀한 코칭, 외국인 감독들의 자율·데이터 중심 운영 등 한국 야구는 오래전부터 시대의 변화를 흡수해 왔다.
하지만 이런 변화가 현장을 넘어 제도나 시스템으로 이어지지는 못했다. 영향력 있는 인물이 만들어낸 철학과 방식도 그들이 떠나는 순간 함께 사라졌다. 결국 한국 야구의 다양성은 개인의 노력이라는 차원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이제 필요한 것은 경험을 리그가 어떻게 구조화하고 축적하느냐에 대한 답이다.
MLB와 NPB는 이 질문에 각자의 방식으로 해답을 쌓아왔다. 서로 다른 길을 걸었지만 공통점이 하나 있다. 사람은 떠나도 변화가 남는 구조가 리그를 지속 가능하게 만든다는 점이다.
MLB: 다양성을 제도로 쌓아 올린 리그
MLB의 다양성 전략은 오랫동안 개인의 의지보다 리그가 설계한 제도를 중심으로 움직여 왔다. 대표적인 것이 코치·스카우트·프런트 인력을 위한 파이프라인 프로그램이다. 다양한 배경의 인재가 자연스럽게 리그 안으로 들어올 수 있도록 마련한 통로로, MLB가 꾸준히 유지해 온 핵심 시스템이다. 저소득·다문화 지역 청소년을 대상으로 한 RBI 프로그램1도 선수 기반을 넓히는 역할을 하며 같은 맥락에서 작동한다.
MLB의 다양한 상징적 행사들도 제도의 일부다. 모든 선수와 코치가 42번을 달고 나서는 재키 로빈슨 데이, 그리고 성소수자 커뮤니티를 환영하는 프라이드 나이트는 단순한 이벤트가 아니라 ‘MLB는 열린 리그’라는 메시지를 문화로 만드는 장치다. 일부 구단은 지역 단체와 함께 교육이나 기부 프로그램을 운영하며 의미를 더 넓힌다.

< 모든 선수가 42번을 달고 나서는 재키 로빈슨 데이 >
2025년에는 연방 정부의 DEI 정책2 논란 속에서 MLB가 공식 채용 페이지에서 ‘diversity’라는 표현을 조정하기도 했다. 하지만 표현이 줄었을 뿐 제도가 쌓아 올린 기반은 그대로 이어졌다. 그해 Opening Day 로스터의 40.8%가 다양한 배경의 선수였고, 흑인 선수 비율도 6.2%로 오히려 상승했다. 2024년 드래프트 1라운드에서는 흑인 선수 비율이 30%에 달했고, 유망주 순위에서도 흑인 선수들의 비중이 꾸준히 높게 나타났다.
결국 다양성은 단순한 가치 선언을 넘어, 리그의 인적 저변을 확장하고 미래 성장 기반을 다지는 핵심 자산으로 작동하고 있다.
NPB: 관계와 경험을 천천히 쌓아 올린 리그
NPB는 MLB처럼 DEI라는 용어를 적극적으로 사용하지는 않는다. 대신 관계와 현지화, 그리고 경험을 저장하는 플랫폼을 중심으로 자신들만의 방식으로 다양성을 축적해 왔다.
그 흐름의 중심에는 2018년 출범한 JRFPA(일본프로야구 외국인OB선수회)가 있다. 일본에서 뛰었던 외국인 선수뿐 아니라 지도자, 통역, 트레이너 등 다양한 인력이 참여하는 네트워크로 은퇴 후 진로 지원부터 코칭 연계, 유소년 야구 교실, 국제 교류 프로그램까지 폭넓은 활동을 함께 운영한다. 개인의 경험이 개인에게 머물지 않고 리그의 자산으로 남도록 돕는 장치다.

< MLB STEM 리그에서 진행된 JRFPA의 미국–일본 교류 활동 >
해외 팬덤 확장은 단발적 이벤트가 아니라 장기적인 관계 구축의 결과다. 2009년 타이완 중계권 계약을 시작으로 일본 테마 데이(2017), 푸방 가디언스와의 파트너십(2023), ‘와쿠와쿠 일본 축제’(2024) 등 교류가 지속적으로 이어졌다. 그리고 이러한 축적 끝에 2025년 타이베이 대규모 행사로 결실을 보았다. 하나의 이벤트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현지 문화를 접목해 팬덤을 천천히 넓혀가는 흐름이다.
NPB의 방식은 제도를 앞세우기보다 관계와 경험 그리고 지식을 차곡차곡 쌓아가는 접근이다. 다양한 배경의 사람과 노하우는 이런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리그 안에 스며든다. 그 토대는 시간이 흐를수록 더욱 단단해진다.
유소년·고교 야구 교실과 팬 미팅 등을 아우른 이번 대규모 행사는 바로 이러한 장기적 노력의 산물이었다. 사람과 경험의 축적이 결국 리그의 외연을 넓히고 구조를 깊게 만든 것이다.
결국 MLB가 제도로, NPB가 관계로 쌓아 올린 다양성은 같은 사실을 보여준다. 변화는 개인의 흔적에서 만들어지지 않는다. 리그가 꾸준히 축적해 온 구조 속에서 비로소 힘을 갖는다.
한국 야구가 지금 다양성을 구조화해야 하는 또 다른 이유
한국 야구는 그동안 실력 있는 외국인 선수의 영입이나 특정 지도자의 혁신에 기대어 일정한 성과를 만들어왔다. 하지만 최근 글로벌 야구 시장은 빠르게 변하고 있다. 일본, 대만, 중남미 리그는 이미 활발한 인재 이동과 지식 교류를 기반으로 경쟁력을 높이고 있고 서로의 문화와 기술을 흡수하는 속도 역시 빠르다. 반면 한국 야구는 여전히 제한된 인재 풀 안에서 순환하며 새로운 관점이나 기술의 유입이 이들 리그보다 더딘 편이다.

< 국제무대가 보여주는 한국 야구의 현재. 구조적 변화가 필요하다. >
야구를 소비하는 방식 또한 달라지고 있다. 젊은 세대는 경기력뿐만 아니라 문화·브랜딩·국제적 감각을 중시한다. 다양성을 수용하지 못한 리그는 이러한 팬층의 관심을 안정적으로 유지하기 어렵다. 결국 다양성은 단순한 가치의 문제가 아니라, 경쟁력과 팬덤, 시장 변화에 대응하기 위한 실질적인 전략이 된다.
이런 흐름 속에서 한국 야구는 외부의 변화가 우연히 흘러 들어오기를 기다릴 수 없다. 세계 야구 생태계에서 뒤처지지 않기 위해서는 다양한 인력과 지식이 지속적으로 유입되고 축적될 수 있는 구조를 스스로 만들어야 한다. 그 출발점이 바로 아시아쿼터다.
한국야구, 아시아쿼터는 출발점일 뿐이다
2026년 시행될 아시아 쿼터는 전력 보강과 선수 수급 확대를 위해 출발했다. 그러나 이 제도는 한국 야구가 국적 다양성을 제도 차원에서 받아들인 첫 시도라고도 볼 수 있다. 다만 변화가 제도로만 완성되지는 않는다. 지금의 한국 야구에서는 외국인 선수와 코치가 남기는 관찰과 노하우가 체계적으로 저장되지 않아 인재가 바뀌면 경험도 함께 사라지는 일이 반복된다.

< 선수협과 KBO가 지난 11월 아시아쿼터 등을 공식적으로 논의했다. >
외부 인력이 코칭, 데이터, 운영, 해설 등 다양한 분야에 진입할 수 있는 통로 역시 충분히 열려 있지 않다. 이는 새로운 기술과 관점을 흡수하는 데 제약을 만들고 리그 전체의 혁신 속도를 늦춘다. 팬층 변화 또한 장기적으로 관리되지 못하고 있다. 특정 이벤트로 한때 관심을 끌 수는 있지만 지속되는 프로그램이 없으면 구조적인 팬덤 변화로 이어지기 어렵다.
이와 함께 외국인 인재의 기여, 국제 교류, 팬 구성 변화 등 리그가 장기적으로 축적해야 할 경험을 기록하는 시스템도 필요하다. 데이터를 기반으로 변화의 흐름을 확인할 수 있는 체계가 갖춰져야 제도의 효과를 정확히 평가하고 다음 단계를 설계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미 외국인 제도는 존재했지만, 운영은 단편적인 선수 영입에 머물러 왔다. 그 과정에서 쌓인 경험 역시 리그 차원의 자산으로 체계화되지 못했다. 아시아쿼터는 새로운 인재 유입을 넘어, 장기간 방치돼 온 외국인 활용 구조 자체를 다시 설계해 볼 수 있는 첫 계기이기도 하다.
따라서 아시아쿼터는 그 자체로 해결책이 아니라 해결책을 만들기 위한 조건을 마련하는 첫 단계다. 다양한 인재가 들어오고, 그들의 경험이 기록되며, 팬층이 구조적으로 확장될 때 비로소 제도는 의미를 갖는다.
한국 야구는 그동안 개인 지도자나 특정 외국인 인재의 영향으로 변화가 일어났지만 그 흐름이 리그 전체의 구조로 이어진 경우는 드물었다. 반면 MLB와 NPB는 각기 다른 방식으로 변화의 요소를 제도나 관계망 속에 편입하며 지속 가능한 구조를 만들어왔다.
한국 야구가 앞으로 안정적으로 다양성을 수용하려면 개인의 경험에 의존하는 방식을 벗어나, 변화의 요소를 리그 차원에서 축적하는 구조로 전환해야 한다. 아시아쿼터는 그 전환을 가능하게 하는 출발점이다.
참고 = The Jackie Robinson Museum: Home, MLB.com, JRFP, 퍼시픽리그, KBO etc.
야구공작소 천태인 칼럼니스트
에디터 = 야구공작소 강상민, 장호재
일러스트 = 야구공작소 한태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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