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일러스트 = 야구공작소 최지호 >
야구장에서 음식을 사기 가장 좋은 때는 언제일까. 막상 따져보면 마땅한 때가 없다. 너무 일찍 사면 경기 시작 전에 다 먹게 되고, 경기 직전에는 매점에 긴 줄이 늘어선다.
응원하는 팀이 공격할 때는 자리를 뜨기 어렵다. 수비 때 매점으로 향해도 안심할 수 없다. 야구는 공 한 개로 흐름이 바뀐다. 투수의 실투 하나가 홈런이 되고, 줄이 조금만 길어져도 한 이닝이 통째로 사라질 수 있다.
팬이 망설이는 이유는 단순하다. 음식을 사는 순간, 경기를 놓칠 수 있기 때문이다. 핫도그는 먹고 싶지만 그사이 터지는 홈런까지 놓치고 싶지는 않다.
시애틀 매리너스는 이 망설임에서 출발했다. 경기 전에는 팬이 음식과 함께 오래 머물 수 있는 공간을 만들었다. 경기가 시작된 뒤에는 구매에 걸리는 시간을 줄였다. 이후에는 낮은 가격대의 선택지를 넓혔고, 그 안에 시애틀의 색깔도 담았다.
불펜 옆 새로운 식탁

< 2011년 세이프코 필드의 더 펜 >
2011년, 당시 시애틀 매리너스 홈구장의 이름은 세이프코 필드였다. 그해 외야 불펜 옆에 ‘더 펜(The ’Pen)’이 문을 열었다. 이곳은 단순한 매점이 아니라 음식점과 바, 좌석이 결합 개방형 식음 공간이었다. 시애틀 셰프들이 참여한 매장은 화덕 피자와 크레페, 햄버거, 멕시코식 토르타 등 기존 구장 매점과 다른 메뉴를 선보였다. 현지 매체는 이곳을 새로운 ‘푸드홀’이라고 소개했다.
더 펜의 핵심은 메뉴보다 공간에 있었다. 팬들은 음식을 사기 위해 경기장에서 완전히 벗어날 필요가 없었다. 외야 불펜 옆에 자리한 이 공간에서는 음식을 먹고 맥주를 마시면서도 그라운드와 불펜을 바라볼 수 있었다.

< 외야 불펜 옆 더 펜 >
구장 이름은 이후 T-Mobile Park로 바뀌었지만 더 펜의 역할은 이어졌다. 현재, 이 공간은 “The T-Mobile ’Pen”이라는 이름으로 운영된다. 매리너스 공식 페이지에 따르면 이곳은 첫 투구 두 시간 전부터 열리고 모든 홈경기에서 관중에게 선착순으로 개방된다. 팬들은 경기 시작 전부터 입장해 음식을 먹고 술을 마시며 구장 안에 머무를 수 있다.

< 시애틀 매리너스의 홈구장 세이프코 필드에 더 펜(The Pen) >
더 펜이 만든 변화는 경기 시작에 맞춰 구장에 오던 팬들에게 새로운 선택지를 준 데 있었다. 조금 일찍 입장해 음식을 먹고 맥주를 마시며 경기를 기다릴 수 있게 한 것이다.
팬에게 일찍 오라고 말한 것이 아니라 일찍 도착할 이유를 만든 것이다.
계산대가 사라진 매점
경기가 시작되면 팬이 원하는 것은 달라진다. 경기 전에는 음식과 함께 시간을 보내도 된다. 하지만 경기중에는 매점에서 보내는 시간만큼 경기를 보지 못한다. 이때는 메뉴의 다양성보다 음식을 고르고 결제하는 속도가 더 중요해진다.
2022년, 시애틀 매리너스는 T-모바일 파크에 ‘워크오프 마켓(Walk-Off Market)’을 도입했다. 팬은 입구에서 신용카드를 인식하거나, 결제 수단과 연결된 손바닥을 Amazon One 기기에 대고 들어간다. 원하는 상품을 집은 뒤 계산대에 서지 않고 매장을 나가면 시스템이 상품을 인식해 등록된 결제 수단으로 금액을 청구한다. Just Walk Out 기술과 Amazon One을 함께 적용한 MLB 구장 최초의 매장이었다.


< 워크오프 마켓 출입구 및 내부 >
구단이 내세운 목적은 분명했다. 계산하는 줄을 줄이고 팬이 더 빨리 좌석으로 돌아가게 하는 것이었다. 더 펜이 팬을 경기 전부터 구장에 머물게 한 공간이었다면, 워크오프 마켓은 경기 중 팬을 빨리 좌석으로 돌려보내는 장치였다.
두 사례는 같은 문제를 서로 다른 시간대에서 풀었다. 경기 전의 체류시간은 관람 경험이 될 수 있다. 반면 경기 중 계산대에서 보내는 시간은 팬이 줄이고 싶은 기다림이다. 시애틀은 팬이 머물고 싶은 시간과 빼앗기고 싶지 않은 시간을 구분했다.
효과는 운영 측면에서도 나타났다. 매리너스 팬 경험 담당 부사장 맬컴 로겔은 아마존 공식 블로그 인터뷰에서 Just Walk Out 적용 매장이 비적용 매장보다 3∼4배 많은 거래를 처리했다고 밝혔다.
워크오프 마켓의 의미는 단순한 무인 매장 도입에 있지 않다. 계산대에서 막히던 시간을 줄여 팬의 대기시간을 낮추고, 같은 시간 안에 더 많은 구매를 처리할 수 있게 한 데 있다. 팬에게는 경기를 덜 놓치는 선택지가 생겼다. 구단은 매장 운영 효율을 높일 수 있다. 팬의 편의와 구단의 효율을 동시에 달성한 것이다.
3달러로 줄인 부담
빠르게 살 수 있어도 가격이 부담스러우면 팬은 지갑을 열기 어렵다. 매리너스는 2022년 구매 속도뿐 아니라 가격 장벽도 함께 손봤다. 구단은 이를 ‘Fan Friendly and Value Options’라는 이름 아래 묶었다.
2022년 Value Menu에는 핫도그, 팝콘, 나초, 땅콩, 생수, 무료 리필이 가능한 코카콜라 음료 등이 포함됐다. 가격은 모두 3달러였다.
가격 부담을 낮추는 전략은 음식에만 그치지 않았다. 수제 맥주와 하드셀처 등 음료 13종을 5∼6달러에 판매했다. 또한 시즌 중 28경기를 ‘Value Games’로 지정해 일부 좌석을 정상가보다 약 40% 할인된 10∼30달러에 제공했다.

< 2022년 Value Menu 예시 >
워크오프 마켓이 계산대에서 보내는 시간을 줄였다면 Value Menu는 구매를 망설이게 하는 가격 부담을 낮췄다.
Value Menu는 모든 음식을 싸게 만들겠다는 정책이 아니다. 비싼 메뉴는 그대로 두되, 팬이 낮은 가격에 고를 수 있는 기본 메뉴를 남겨둔 것이다. 가족 단위 관중이나 자주 경기장을 찾는 팬에게 음식값은 적지 않은 부담이다. 결국 구장 음식의 가격은 매점 매출 규모로 끝나는 것이 아니다. 팬이 경기장을 다시 찾는 데 드는 부담과도 연결된다.

< 2026년 Value Menu 예시 >
이 정책은 일회성 이벤트로 끝나지 않았다. 2026년에도 매리너스는 3달러부터 시작하는 Value Menu를 운영했고 품목 수를 21종까지 넓혔다. 중요한 것은 단순히 값싼 음식을 따로 내놓은 것이 아니다. 팬이 부담 없이 고를 수 있는 가격대를 계속 유지했다는 점이다.
매리너스는 팬에게 음식을 더 빨리 사라고만 하지 않았다. 빠르게 살 수 있는 음식 가운데, 부담 없이 고를 수 있는 선택지도 함께 마련했다.
싸고 빠르기만 해서는 부족했다

< 지역 상징을 담은 구장 음식 >
싸고 빠르다는 것만으로는 어느 구장의 음식인지 기억하기 어렵다. 핫도그와 나초는 어느 야구장에나 있다. 매리너스가 구매 시간을 줄이고 가격 선택지를 넓힌 뒤에도 지역성을 놓지 않은 이유다.
T-모바일 파크는 구장 음식을 단순한 간식으로만 다루지 않았다. 매리너스 공식 페이지는 T-모바일 파크의 선택지를 “시애틀의 MOTO Pizza와 Ivar’s부터 핫도그와 땅콩 같은 전통 구장 음식까지”라고 소개한다. 지역 음식과 익숙한 구장 음식을 함께 배치한 것이다.

< 워싱턴주 페리 모양 음식 용기 >
2026년, 신메뉴에서도 이 방향은 이어졌다. 음식은 이제 먹고 끝나는 상품이 아니다. 사진으로 남고 이야기되는 콘텐츠에 가까워졌다.
결국 매리너스의 F&B 전략은 싸게, 빠르게, 많이 파는 데서 멈추지 않았다. 팬이 구장 안에서 무엇을 먹고, 무엇을 찍고, 무엇을 기억할지까지 설계했다.
한국은 이제 음식을 관람석으로 보낸다
매리너스가 바꾼 것은 음식 자체만이 아니었다. 팬이 언제, 어디서, 얼마나 기다리며, 어떤 기억과 함께 음식을 사는지를 다시 설계했다. 한국 야구장도 이제 공간과 주문, 판매 방식을 바꾸며 같은 질문에 답하기 시작했다.
2025년 문을 연 대전 한화생명 볼파크의 ‘1985 Innings’는 식사와 경기 관람을 한 공간에서 즐길 수 있다는 점에서 시애틀의 더 펜과 닮았다. 최근 지어진 구장들은 개방형 콘코스를 통해 팬이 이동하면서도 필드를 볼 수 있도록 설계하고 있다. 모바일 음식 주문과 좌석 배달 서비스도 일부 구장을 넘어 전 구장으로 확대되는 추세다.
2026년 7월에는 정부가 야구장 등 체육시설에서 핫도그 같은 조리식품을 이동 판매할 수 있도록 허용했다. 그동안 국내에서 맥주 이동판매는 가능했지만, 조리식품 이동판매는 쉽지 않았다. 식품의약품안전처와 규제합리화위원회는 법령 유권해석을 통해 길을 열었고, 위생·안전 가이드라인도 마련하겠다고 밝혔다.
매리너스가 팬을 매점에서 좌석으로 빨리 돌려보냈다면, 한국은 팬이 매점까지 가지 않아도 되는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다. 음식을 사기 위해 팬이 움직이는 대신, 음식이 팬에게 다가가기 시작한 것이다.
다만 음식이 관람석에 가까워질수록 운영은 더 정교해져야 한다. 판매원의 동선이 다른 관중의 시야를 가리지 않아야 하고, 주문과 결제는 빠르게 끝나야 한다. 여름철에는 음식 온도와 위생도 놓칠 수 없다.
결국 중요한 것은 이동판매를 허용했다는 사실이 아니다. 공간과 주문, 판매 방식이 모두 팬이 경기를 덜 놓치게 만드는 방향으로 맞물려야 한다. 핫도그를 좌석까지 보내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그 과정에서도 야구를 놓치지 않게 하는 일이다.
참조 = Gensler, MLB, mlblogssnaggingbaseballs, seattlemet, 정부정책조정실
야구공작소 박태신 칼럼니스트
에디터 = 야구공작소 조광은, 민경훈
일러스트 = 야구공작소 최지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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