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일러스트 = 야구공작소 홍기민 >
타자가 타석에 들어서자, 전광판이 바뀐다. 응원가가 흐르고 북소리와 수천 명의 목소리가 한꺼번에 커진다. 많은 팬은 바로 이 순간을 위해 야구장을 찾는다. 그러나 같은 순간 누군가는 귀를 막는다. 누군가는 자리에서 일어나 복도로 향하고, 누군가는 경기가 끝나기 전에 구장을 떠난다. 야구를 좋아하지 않아서가 아니다. 야구장을 채운 소리와 빛, 인파를 더는 견디기 어렵기 때문이다.
한국 프로야구의 응원 문화는 분명한 자산이다. 선수마다 다른 응원가와 치어리더, 관중이 함께 만드는 함성은 KBO리그를 다른 나라 야구와 구별한다. 응원단상에서 시작된 노래가 관중석 전체로 번지는 순간은 야구장에서만 느낄 수 있는 경험이다. 문제는 응원이 크다는 데 있지 않다. 그 소리를 잠시 피하고 싶은 팬에게 다른 선택지가 거의 없다는 점이다.
감각적인 자극에 민감한 사람은 소리와 빛, 냄새, 신체 접촉을 다른 사람보다 훨씬 강하게 느끼기도 한다. 갑작스러운 효과음과 번쩍이는 조명, 홈런 뒤 터지는 불꽃, 좁은 통로로 밀려드는 인파가 한꺼번에 겹치면 감각 과부하(Sensory Overload)가 생길 수 있다. 집중하거나 의사소통하기 어려워지고 결국 그 장소에서 급히 벗어나야 하는 상황도 생긴다. 누군가에게 북소리는 야구장에 왔다는 신호지만, 다른 누군가에게는 자리를 떠나야 한다는 신호가 될 수 있다.

< 응원단과 관중석이 함께 보이는 광주-기아 챔피언스필드 전경 >
응원을 줄이는 대신 선택지를 늘리다
미국은 한국처럼 응원단을 중심으로 경기 내내 함께 노래하고 응원하는 문화가 강하지 않다. 그럼에도 야구장의 소리와 빛이 일부 팬에게 부담이 될 수 있다는 점에 주목하고 있다.
실제로 2022년 애틀랜타 브레이브스의 홈구장 트루이스트 파크를 찾은 자폐 당사자이자 지역 커뮤니티 활동가 리스 블랭켄십(Reece Blankenship)은 3이닝 만에 경기장을 떠나야 했다. 많은 팬에게 야구장 분위기를 만드는 요소들이 그에게는 경기를 즐기기 어려운 자극이 됐다. 큰 음악과 번쩍이는 조명, 매점에서 나는 음식 냄새, 경기장의 열기가 그를 괴롭혔다.
미국 야구장은 이를 단순히 ‘조용히 해달라’는 요구가 아니라 서로 다른 관람 방식을 보장하는 문제로 다루기 시작했다. 시카고 컵스는 2024년 리글리 필드에 감각 안정실(Sensory Room)을 열었다. 부드러운 조명과 촉각 시설, 휴식용 좌석을 갖춘 이 공간은 소리와 빛으로 감각 과부하를 느낀 관람객이 잠시 안정을 되찾도록 돕는다. 팬서비스 부스에서는 소음 저감 헤드폰과 피젯 도구 등이 담긴 감각 가방도 무료로 빌려준다.

< 2024년 리글리 필드 감각 안정실 내부 >

< 감각 가방 및 구성 용품(헤드폰, 피젯도구 등) >
2026년, 리글리 필드는 메이저리그 구장 최초로 ‘Certified Autism Center’ 인증받았다. 관중을 직접 응대하는 직원의 80% 이상이 자폐와 감각 민감성에 관한 교육을 이수했다. 시설을 만드는 데서 그치지 않았다. 현장에서 관람객의 어려움을 이해하고 대응할 수 있도록 사람과 운영 방식까지 바꿨다.

< Certified Autism Center 인증 기사 >
여기서 중요한 것은 방 하나가 아니다. 감각 안정실이 있어도 관람객이 그 존재를 알지 못하거나 필요한 순간에 이용하지 못하면 제 역할을 하기 어렵다. 리글리 필드는 접근성 서비스 담당자를 두고 좌석과 주차, 구장 내 이동 등 관람객마다 다른 필요를 확인해 적절한 지원으로 연결해 왔다. 팬에게 야구장 환경에 적응하라고 요구하는 대신, 필요한 순간에 대응할 사람이 관람 과정 안에 있도록 한 것이다.

< 리글리 필드 서비스 담당자 >
필요한 순간, 가장 가까운 곳에서
캔자스시티 로열스의 카우프만 스타디움은 휴식 공간을 더 잘게 나눴다. 1루와 3루 쪽에 감각 안정실을 하나씩 두고, 구장 곳곳에는 여덟 개의 조용한 공간(Quiet Zones)을 배치했다.
외야에 앉은 팬이 홈플레이트 뒤편의 방 하나를 찾아 혼잡한 통로를 건너지 않아도 되는 구조다. 팬에게 필요한 것은 구장 어딘가에 존재하는 시설이 아니라 지금 앉은 자리에서 쉽게 닿을 수 있는 선택지이기 때문이다. 감각 안정실 하나는 목적지가 되지만, 곳곳의 조용한 공간은 필요할 때 바로 이용할 수 있는 휴식처가 된다.

< 카우프만 스타디움 구장 지도 및 감각 안정실 내부 >
야구장이 팬에게 맞춘다
일부 구단은 경기 운영 자체를 바꿨다. 미국 마이너리그 아이오와 컵스는 감각 친화 경기에서 소리와 움직임 자극을 줄였다. 안내 표지와 훈련된 자원봉사자 및 휴식 공간도 제공했다. 다른 구단들도 장내 방송과 음악의 음량을 낮추고 갑작스러운 효과음과 번쩍이는 조명, 전광판의 빠른 화면 전환을 줄인다.
모든 관중에게 매 경기 조용히 관람하라는 뜻은 아니다. 시즌 중 일부 경기만이라도 야구장이 팬에게 맞춰지는 날을 만드는 것이다. 헤드폰은 팬이 야구장에 적응하는 도구라면 감각 친화 경기는 야구장이 팬에게 적응하는 방식이다.

< 감각 친화 경기 중 안정 공간으로 운영된 스위트룸에서 어린이가 경기장을 바라보는 모습 >
이를 ‘조용히 보고 싶은 팬’과 ‘열정적으로 응원하는 팬’의 갈등으로 이해하면 해답을 찾기 어렵다.
감각 지원은 응원석의 함성을 금지하자는 요구가 아니다. 응원은 유지하되 자극을 피할 경로와 쉴 공간 등 미리 준비할 정보를 제공하자는 제안이다. 특별한 날 한 번 초청하는 데서 끝나는 것도 아니다. 팬이 직접 표를 사고 야구장을 찾아 마지막 아웃카운트까지 머물 수 있게 하는 일이다.
입장할 수 있는 곳에서 머물 수 있는 곳으로
이러한 사례들은 야구장의 ‘접근성’을 어디까지 생각해야 하는지 묻는다. 배리어 프리(Barrier Free)는 흔히 계단과 턱 같은 물리적인 장벽을 없애는 것으로 이해된다. 하지만 야구장에서 팬을 가로막는 장벽은 이동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필요한 경기 정보를 얻기 어려운 것도, 지나치게 강한 소리와 빛 때문에 더 이상 자리에 머물 수 없는 것도 누군가에게는 야구장 이용을 가로막는 장벽이 될 수 있다.
그래서 야구장의 배리어 프리는 누구나 들어올 수 있게 만드는 데서 끝나서는 안 된다. 이미 들어온 팬이 각자의 방식으로 경기를 경험하고 마지막 순간까지 그 공간에 머물 수 있게 만드는 것까지 생각해야 한다.
여기에는 ‘다양성’의 문제도 있다. 야구장을 찾는 팬은 모두 같지 않다. 누군가는 응원가를 크게 따라 부르고, 누군가는 헤드폰을 쓰고 경기를 볼 수 있다. 어떤 팬은 현장의 소리만으로 충분하지만, 다른 팬은 경기 상황을 이해하기 위한 별도의 정보가 필요할 수도 있다. 서로 다른 팬에게 하나의 관람 방식만을 요구하지 않는 것도 다양성을 존중하는 방법이다.
관중이 늘고 팬층이 넓어질수록 ‘평균적인 관중’ 한 사람만을 상정한 운영은 한계를 드러낸다. 접근성은 일부 팬에게 추가로 제공하는 편의가 아니라 다양한 관람객을 야구장이 받아들이는 방법이 될 수 있다. 서로 다른 팬이 같은 공간에서 각자의 방식으로 경기를 즐길 수 있도록 선택지를 늘리는 것이다.

< 야구장의 배리어 프리 >
한국에서도 다른 관람 방식을 인정하기 시작했다
이런 변화는 미국 야구장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형태는 다르지만, 한국에서도 모든 사람에게 하나의 관람 방식만을 요구하지 않으려는 시도가 조금씩 나타나고 있다.
국립극단은 ‘열린 객석’을 통해 공연 중 소리를 내거나 좌석에서 움직이는 행동에 대한 제지를 줄이고, 자유로운 중간 입·퇴장을 허용한다. 공연 전에 극장과 작품을 설명하는 자료를 제공하고 일부 공연에서는 객석을 지나치게 어둡게 하지 않는다. 관객에게 정해진 관람법을 따르라고 요구하는 대신 공연장이 서로 다른 관객을 받아들일 수 있도록 관람의 규칙을 바꾼 것이다.

< 국립극단 ‘열린 객석’ 공식 안내 >
KBO에서도 비슷한 방향의 변화를 찾을 수 있다. 2023년부터 잠실·사직·광주에서 운영하던 시각장애인 현장 관람객 대상 중계 음성 지원 서비스는 2026년 대전 한화생명 볼파크까지 확대됐다. 이용자는 소출력 FM 단말기와 이어폰으로 TV 중계 음성을 실시간 들을 수 있다. 네 구장의 정규시즌과 포스트시즌 경기에서 상시 운영되며 장비는 안내데스크에서 무료로 빌릴 수 있다.

< 시각장애인 중계 음성 지원 단말기를 이용하는 관람객 >
국립극단의 열린 객석과 KBO의 중계 음성 지원은 감각 친화 서비스와는 조금 다르다. 하지만 두 사례가 보여주는 방향은 닮았다. 모든 관람객이 똑같은 방식으로 공연과 경기를 즐길 필요는 없다고 본다는 점이다. 누군가는 자유롭게 움직이며 공연을 볼 수 있고, 누군가는 별도의 음성 안내를 들으며 야구를 볼 수 있다. 중요한 것은 서로 다른 관람객이 각자 편한 방식으로 같은 공간에 머물 수 있도록 선택지를 마련하는 것이다.
이러한 변화는 KBO 야구장에 남아 있는 감각의 장벽을 돌아보게 한다.
모두가 같은 방식으로 응원할 필요는 없다
KBO 구단이 모든 경기의 응원 음량을 낮출 필요는 없다. 대신 팬이 필요할 때 잠시 자극을 피할 수 있는 선택지를 늘릴 수 있다. 구장에서는 감각 가방을 빌려주고, 불꽃놀이나 강한 조명이 사용되는 시간을 예매 단계부터 미리 안내할 수 있다. 내야와 외야 곳곳에 잠시 쉴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하고, 팬서비스 직원이 감각 과부하 상황에 적절히 대응할 수 있도록 교육하는 방법도 있다.
시즌 중 일부 경기를 장내 음악과 효과음을 줄인 감각 친화 경기로 운영하는 방법도 생각해 볼 수 있다. 새로 짓거나 고치는 구장이라면 중계 화면을 보면서 쉴 수 있는 감각 안정실이나 관중석 가까이에 작은 휴식 공간을 마련할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팬을 경기에서 떼어놓는 공간을 만드는 것이 아니다. 잠시 쉬었다가 다시 자신의 자리로 돌아와 경기를 이어서 볼 수 있게 하는 것이다.
응원가와 함성은 그대로 남아 있어도 된다. 그 분위기를 좋아하는 팬은 마음껏 노래하고 응원하면 된다. 동시에 헤드폰을 쓰는 팬도, 잠시 자리를 벗어나는 팬도, 조용히 경기를 바라보는 팬도 있다. 이들 역시 같은 야구를 보러 온 팬이다.
야구장의 매력은 흔히 얼마나 뜨겁게 응원할 수 있는지로 이야기되어 왔다. 앞으로는 그 응원 속에서 얼마나 다양한 팬이 끝까지 함께할 수 있는지도 중요해질 것이다. 모두가 같은 방식으로 응원할 필요는 없다. 서로 다른 방식으로 야구를 좋아해도, 누구도 먼저 떠나지 않아도 되는 곳. 그런 야구장이 더 많은 팬을 품을 수 있다.
참조 = MLB, IBCCES, UW-Stout, 연합뉴스
야구공작소 박태신 칼럼니스트
에디터 = 야구공작소 박두산, 정세윤
일러스트 = 야구공작소 홍기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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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번째 야구장 사진은 잠실야구장이 아니라 광주-KIA 챔피언스 필드 아닌가요
지적 감사합니다. 수정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