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구의 사회적 역할⑱ 야구장, 기억과 책임을 설계하다 下

< 일러스트 = 야구공작소 한태현 >

이전 시리즈에서는 사직 재건축과 북항 돔구장 구상을 중심으로, 야구장이 단순한 체육시설이 아니라 도시의 일상과 공동체를 담아내는 사회적 공간임을 살펴봤다.

이번 시리즈에서는 시선을 넓혀 미국과 일본의 사례를 짚고, 사직 재건축의 의미를 그 속에서 살펴보고자 한다.

 

도시를 움직이고 미래를 설계하는 미국의 구장들

< 낡은 창고 지대에서 도시재생의 상징으로 거듭난 펫코파크 >

샌디에이고의 펫코 파크는 도시재생의 교과서다. 낡은 창고 지대였던 이스트빌리지는 구장이 들어서며 주거와 상업지구로 바뀌었다. 개장 이후 1만 4천 세대의 주택이 새로 들어섰고, 인구는 1만 5천 명 늘었다. 외지 관람객이 남긴 소비만 연간 6천만 달러를 넘었다. 구장은 지역 경제의 원동력이 됐다.

샌프란시스코의 오라클 파크는 또 다른 길을 보여준다. 이 구장은 캘리포니아 최초로 GBAC STAR1와 그린 비즈니스 인증2을 받았다.

미국 프로 구장 중에서는 처음으로 LEED 플레티넘 등급3을 획득했다. LEED 플래티넘은 세계 모든 스포츠 시설을 통틀어 봐도 드문 최고 등급이다.

< 오라클 파크 ‘디스커버리 데이’, 야구장을 넘어 교육·문화의 장으로 >

2019년 UCSF4가 개최한 과학 축제 ‘디스커버리 데이’에는 수만 명이 모였다. 야구장이 교육과 문화의 장으로 확장될 수 있음을 보여준 사례였다. 인근 지역 미션 락(Mission Rock)5의 개발은 주거와 상업, 공원이 어우러진 복합 공간을 만들었다. 그 중심에는 구장이 있었다. 무인 매장과 AI 서비스, 얼굴 인식 시스템 같은 기술도 도입됐다. 오라클 파크는 과거의 기억을 안고 미래를 실험하는 장으로 거듭났다.

 

기억을 잇고 시민과 함께하는 일본의 구장들

< 100년 역사를 이어온 고시엔 구장, 세대를 잇는 일본 야구 기억의 무대 >

고시엔 구장은 ‘허물지 않고 고쳐 쓰는’ 방식을 택해온 대표적 구장이다. 1924년 개장 이후 한 번도 신축으로 대체하지 않았다. 대신 시대 변화에 맞춰 대규모 보수와 리노베이션을 거듭했다. 2007년부터 2010년까지는 대규모 개보수가 진행됐다.

외벽의 담쟁이덩굴과 아치 구조는 유지했고, 좌석은 더 넓고 편안하게 바꿨다. 좌석 수는 약 5만 3천 석에서 4만 7천 석 수준으로 줄었다. 이는 관람 환경을 개선하려는 조치였다. 조명과 전광판, 음향 시설도 개선돼 국제 대회 개최 요건을 충족하게 됐다.

고시엔은 여름 고교야구와 한신 타이거스의 홈구장으로 사용된다. 일본 고교야구 선수라면 누구나 이곳을 목표로 삼는다. 경기장에 들어선 순간을 인생의 특별한 경험으로 여긴다. 부모와 자녀가 같은 자리에 앉아 경기를 응원하는 전통도 이어지고 있다. 이런 점에서 고시엔은 단순한 스포츠 시설을 넘어 세대를 잇는 공간으로 자리 잡았다.

히로시마의 홈구장 마쓰다 줌줌 스타디움은 ‘참여’와 ‘도시 활력’을 동시에 보여준다. 2009년 옛 JR 화물 기지 터에 들어선 이 구장은 설계 단계부터 시민 의견을 반영했다. 개방형 구조와 산책로는 누구나 드나들 수 있게 했다. 콘코스(관중석 뒤편의 넓은 통로)와 가족석, 바비큐석, 파티데크는 팬의 일상과 구장을 이어주었다.

< 개방형 콘코스로 누구나 드나들 수 있는 마쓰다 줌줌 스타디움 >

관중 친화적 설계도 눈길을 끈다. 관중석의 경사도를 완만하게 해 시야를 확보했다. 동시에 오르내리기 안전하도록 만들었다. 장애인을 위한 엘리베이터와 휠체어 대여 서비스도 제공된다. 시민 누구나 편안하게 이용할 수 있는 ‘열린 구장’이다.

주변에는 코스트코와 스포츠클럽, 주거 단지가 들어섰다. 구단 브랜드와 연계한 다양한 서비스도 운영된다. 결혼식장에서는 카프와 협업한 상품이 등장했다. 상점들은 경기일을 ‘붉은 물결’의 축제 공간으로 바꿨다. 이런 참여형 설계와 상업 연계는 관중 증가와 경제 효과로 이어졌다. 개장 첫해 187만 명이던 관중은 2016년 237만 명으로 늘었다. 경제 효과는 340억 엔에 달했다.

마쓰다 스타디움은 시민과 구단, 상업시설이 함께 만든 ‘생활 속 구장’이다. 일본 야구가 보여주는 공공성의 새로운 모델로 자리 잡았다.

 

세계 구장들로 살펴본 사직 재건축의 의미

세계 구장들은 서로 다른 길을 걸었지만, 공통적으로 경제·공공성·기억·참여라는 네 가지 메시지를 던진다. 사직 재건축은 한국 야구가 이 조건들과 어떻게 호흡할지를 보여줄 시험대다. 단순한 시설 교체가 아니라 부산 도심의 활력을 불러내야 한다. 시민 누구나 드나들 수 있는 ‘우리 동네의 큰 마당’으로 진화해야 한다. 40년간 부산 시민과 함께 쌓아온 기억도 이어가야 한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입지 조건이다. 오라클 파크 역시 항만 창고 지대 위에 세워졌지만, 이미 도심과 연결된 생활권의 중심에 자리했다. 금융 지구와 맞닿아 있었고 교통망도 촘촘했다. 이러한 조건 덕분에 구장은 자연스럽게 시민의 일상에 흡수될 수 있었다.

< 오라클 파크 전경, 부산 북항신구장 논의와 자주 비교되는 항만 재생 사례 >

부산 북항은 항만 창고 지대라는 점에서 오라클 파크와 비슷해 보인다. 그러나 생활권의 중심과는 거리가 있고, 대중교통 접근성도 낮다. 문화·상업 기반 역시 충분히 갖춰지지 않았다. 이런 조건에서 돔구장 하나만 세운다고 해서 오라클 파크의 성공을 재현하기는 어렵다. 입지와 맥락이 다르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좋은 사례이니 무조건 따라 하면 된다”는 생각은 예기치 못한 역효과를 가져올 수 있다.

 

시민과 함께 책임지는 구장의 조건

사직 재건축의 주체는 부산시다. 그러나 행정만으로는 공공성을 담보할 수 없다. 구단과 기업, 시민이 함께 책임을 나누어야 한다. 오늘날 야구장은 바로 이 책임 공동체를 시험하는 무대다. 도시는 안전과 지속가능성을 보장해야 한다. 구단은 팬 문화와 기억을 이어가야 한다. 기업은 친환경 건축과 투명한 운영으로 사회적 책임을 분담해야 한다. 시민은 단순한 이용자가 아니라 공간의 주인으로 참여해야 한다.

그러나 현실은 이상과 거리가 있다. 시민은 스스로의 역할을 충분히 인식하지 못했고, 미디어 역시 북항 신구장의 화려한 청사진을 강조하는 데 치우쳤다. 조건과 맥락의 차이를 짚는 균형 잡힌 설명은 부족했다. 이로 인해 여론은 북항이 ‘더 낫다’는 단순한 방향으로 쏠렸다.

시민이 주체로서 성찰하지 못한 점, 사실을 정확히 전달하지 못한 미디어의 한계가 함께 드러난 것이다. 구장을 어떤 공간으로 만들지는 결국 시민의 선택과 참여에 달려 있다. 책임을 나누지 않고 미디어의 단편적 프레임에 기대어 결정한다면 공공성은 쉽게 훼손된다.

사직의 재건축은 부산만의 문제가 아니다. 한국 야구의 위상과 해외의 평가까지 이어진다. 해외는 경기력이나 흥행만 보지 않는다. 구장과 도시, 시민과 기업이 맺는 관계도 중요한 기준이다. 세계의 구장들은 저마다의 방식으로 도시와 야구가 공존할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야구장은 단순한 건물이 아니다. 사람과 기억, 공동체, 책임이 만나는 사회적 공간이다. 부산 시민에게는 도시 정체성과 자부심을 드러나는 특별한 공간이 될 것이다. 그리고 해외에는 한국 야구의 가치를 전하는 무대가 될 것이다.

 

참고 =  U.S. Green Building Council, Inc., NBC news, ABC news, MLB.com, Bay Area Science Festival, 미쓰이물산, 한신고시엔구장, 환경디자인연구소, NPB, 공익재단법인닛폰닷컴,ISO26000(국제표준화기구 사회적책임 표준), etc.

야구공작소 천태인 칼럼니스트
에디터 = 야구공작소 강상민, 장호재
일러스트 = 야구공작소 한태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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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GBAC STAR 인증: 국제 바이오 위생 자문위원회(Global Biorisk Advisory Council)가 부여하는 것. 시설이 청소·위생·감염병 예방 관리에 관한 국제 표준을 충족했음을 의미함.
  2. 그린 비즈니스 인정: 환경 보호와 지속 가능한 경영을 실천하는 사업장임을 공식적으로 인정하는 제도.
  3. LEED 플레티넘 등급: 미국 그린빌딩위원회(U.S. Green Building Council)가 수여하는 친환경 건축물 인증의 최고 등급. 에너지 효율성과 환경 성과가 국제적으로 검증되었음을 의미함.
  4. UCSF(University of California, San Francisco): 캘리포니아대학교 샌프란시스코 캠퍼스. 의학·생명과학 연구와 교육을 전문으로 하는 세계적 연구 중심 대학.
  5. 미션 락(Mission Rock): 샌프란시스코 오라클 파크 인근에 조성된 복합 개발 지구. 주거·상업·공원 시설이 어우러진 지속가능한 도시 공간을 지향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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