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일러스트 = 야구공작소 김범수 >
이전 시리즈에서는 창원 NC파크 사고를 통해 한국 야구장의 구조적 무책임과 안전 대응 부재 문제를 짚었다. 일본의 지정 관리자 제도와 정량화된 재난 대응 시스템은 책임과 권한이 실질적으로 연결된 운영 구조의 가능성을 보여줬다. 보여주기식 사과보다 형식에 그치지 않고 실질적인 변화를 만드는 것이 필요하다.
이번 시리즈에서는 부산 사직 야구장 재건축과 북항 돔구장 구상 사례를 중심으로, 야구장이 단순한 스포츠 시설을 넘어 공동체 인프라로 어떻게 기능할 수 있는지를 살펴본다. 도시계획과 사회적 책임의 관점에서 야구장이 사회적 장소로 진화하는데 필요한 조건을 묻는다.
40년 역사, 사직 야구장 재건축 본격화
지난 7월 3일, 사직 야구장 재건축 사업이 행정안전부 중앙투자심사를 조건부로 통과했다. 정부가 사직 야구장 재건축의 타당성과 필요성을 공식적으로 인정한 셈이다. 행정안전부는 민간 자본 유치, 자체 재원 조달 방안 마련, 대체 구장의 안정적 운영 등을 조건으로 제시했다.
1985년에 개장한 사직 야구장은 올해로 40년째를 맞은 롯데 자이언츠의 홈구장이다. 낡은 시설과 안전 문제로 재건축 필요성은 오래전부터 제기돼 왔다. 이 야구장은 부산 동래구 사직동 종합운동장 내에 위치하며, 원래는 1986년 서울 아시안게임 지방 예선전을 대비해 건설됐다.
롯데 자이언츠는 개장 초기 구덕 야구장을 사용하다가 1987년부터 사직을 홈구장으로 활용해 왔다. 현재 사직 야구장은 서울종합운동장 야구장(1982년 개장)에 이어 대한민국에서 두 번째로 오래된 프로야구 경기장이다.

< 부산 야구의 중심, 사직야구장 >
공공성과 현실성이 결여된 북항 야구장 구상론
사직 재건축과 함께 꾸준히 제기돼 온 또 하나의 목소리가 있다. 바로 북항에 새 야구장을 짓자는 구상이다. ‘세계적 복합 돔구장’, ‘해안 조망 명소’, ‘부산의 새로운 랜드마크’ 같은 수식어로 관심을 끌었지만, 실제로는 실현 가능성보다 상상에 가까운 이야기다.
아직 신구장은 부지조차 확정되지 않았으며 관련 예산안과 중앙정부의 허가도 나오지 않았다. 반복적으로 거론되는 돔구장 건설 가능성 역시 구체적 기술 검토나 재정 계획 없이 공약과 여론 속을 떠돌고 있다.
현실적인 조건도 무시할 수 없다. 북항은 해안에 인접해 있지만 도심과 떨어져 있고 지하철 등 대중교통망이 제한적이다. 관람객 대부분이 차량에 의존해 교통 혼잡과 주차 문제가 불가피하다. 더구나 바닷바람과 염분, 잦은 태풍과 해무, 높은 습도는 돔구장이라 해도 시설 유지와 운영 안정성에 큰 부담으로 작용한다.
북항 야구장 구상론의 가장 큰 문제는 공공성이 간과됐다는 점이다. 야구장은 단순한 체육시설이 아니라 지역 공동체의 중요한 자산으로, 공공성과 사회적 책임이 충분히 반영되어야 한다. 무엇보다 북항에는 아직 ‘야구의 시간’이 존재하지 않는다. 팬도, 문화도, 기억도 없는 공간에 구장을 세운다고 해서 공동체와 정체성이 곧바로 생겨나는 것은 아니다.

< 사직 야구장, 1990년대 팬과 함께한 기억의 공간 >
현재 북항 야구장 구상은 구체적인 실행 계획이나 준비 없이 인터넷에 돌아다니는 팬들이 만든 조감도 이미지에만 의존하고 있어 실현 가능성이 매우 낮다. 야구장은 단순한 건물이 아니다. 한 도시의 일상과 정체성, 그리고 관계를 품는 공공의 장소다. 북항 구상은 이 본질에서 벗어나 있다. 화려함보다 중요한 것은 그 공간 안에 어떤 시간이 흐르고 있느냐는 점이다.

사회적 책임과 지속 가능성, 사직 야구장이 답이다
사직 야구장 재건축은 사회적 책임과 지속 가능성을 고려하고 있다. 롯데 자이언츠가 800억 원 이상의 민간 자본을 부담하며, 부산시는 공공성, 안전, 경제적 지속 가능성을 면밀히 계획 중이다. 기존 시설을 리모델링하는 것은 신축보다 환경에 미치는 영향이 적고, 자원 소비와 탄소 배출을 줄이는 지속 가능한 선택이다.
현재 추진 중인 사업비는 약 3,260억 원이다. 반면 북항에 새 야구장을 짓는다면 부지 매입비만 6,000억 원에 달하고, 공사비는 5,000억에서 7,000억 원에 이를 것으로 예상되어 재정 부담이 훨씬 커진다.
사직 야구장 재건축과 아시아드 주경기장 리모델링 비용을 고할 때 북항 바다 야구장 건립이 합리적이라는 의견도 있다. 하지만 해양 환경에 따른 추가 비용은 무시할 수 없다.
먼저 불안정한 지반을 보강한 후 부식과 강풍에 견디는 구조로 건설해야 해 큰 비용이 든다. 또한 환경 영향 평가와 보전 조치, 유지보수와 운영 비용 등 장기적인 비용 부담도 신중히 검토해야 한다.
지속 가능성은 흔히 환경 보호나 사회적 약자 배려에 국한되기 쉽다. 하지만 지역 경제의 안정성과 성장 가능성 또한 필수적인 요소임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공공시설은 환경과 사회적 책임뿐 아니라 경제적 지속 가능성까지 갖춰야 장기적으로 유지되고 발전할 수 있기 때문이다.
최근 북항 재개발 1단지 내 바다 야구장 건립에 대해 부산 시민 약 90%가 찬성한다는 설문조사 결과가 나왔다. 이는 시민들의 높은 관심과 기대를 보여준다. 하지만 지방자치단체와 정책 결정자는 시민들의 희망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데 그쳐서는 안 된다. 지역 도시계획, 실행 가능성, 재정 부담, 환경 및 경제적 지속가능성 등 다양한 현실적 조건을 면밀히 검토하고 균형 있게 판단해야 한다. 단순한 인기나 이미지에 의존한 결정은 장기적으로 지역과 시민에게 부담이 될 수 있다.

< 북항 야구장 건립이 제안된 북항 연안 랜드마크 부지 >
야구장, 단순한 경기장을 넘어선 우리 모두의 공간
야구장은 단순히 경기하는 장소가 아니다. 지역 주민들이 모여 응원하고, 가족과 친구들이 함께 시간을 보내며 소중한 추억을 쌓는 ‘우리 동네의 큰 마당’ 역할을 한다.
미국 사회학자 그랜트 자비(Grant Jarvie)는 스포츠 시설이 지역 주민들의 정체성을 키우고, 서로를 연결하는 사회적 끈 역할을 한다고 설명한다. 즉, 단순한 경기장 그 이상으로 이웃과 소통하고 공동체의 일원이 되는 공간이다.
도시 계획 전문가 얀 게일(Jan Gehl)은 사람들이 쉽게 오가고 누구나 편안히 머무를 수 있는 일상 공간으로서 공공시설이 얼마나 중요한지 강조한다. 야구장은 이런 일상의 공간으로 자리 잡아야 하며, 한두 번 방문하는 곳이 아닌 일상에 자연스레 녹아들어야 한다.
부산 사직야구장은 바로 그런 공간이다. 부산 시민들이 함께 웃고 울며 쌓아온 기억은 도시의 역사이자 문화다. 그러나 오래된 경기장을 새로 짓는 것만으로 이런 기억과 공동체가 자동으로 이어지지는 않는다. 안전하고 편리하게 누구나 찾아올 수 있고, 또 돌아가고 싶어 하는 공간이어야 한다.

< 부산 시민의 응원 열기 가득한 사직 야구장 관중석 >
사직 재건축은 단순한 건물 신축이 아니라 부산 시민들이 함께 만들어온 이야기를 이어가는 작업이다. 모두가 ‘내 공간’이라고 느낄 수 있도록 만드는 일이다. 이것이 진정한 사회적 공간의 의미이며 야구장이 갖춰야 할 가장 큰 가치다.
야구장은 단순한 경기장이 아니다. 사람과 기억, 공동체가 만나는 사회적 공간이다. 부산 사직야구장은 오랜 시간 지역 주민들의 삶과 문화를 품어온 장소다. 단순히 건물을 새로 짓는 것을 넘어 그 속에 쌓인 기억과 이야기를 이어가는 작업이 필요하다.
안전하고 편리하며 누구나 ‘내 공간’이라 느낄 수 있는 진정한 공공의 장으로서, 야구장은 앞으로도 지역 사회의 중심이 되어야 한다.
야구장에 대한 재건과 신축 논의는 단순한 시설 확충을 넘어 사회적 책임과 지속 가능성을 바탕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공동체의 정체성과 일상을 존중하는 방향이어야 한다. 그래야 야구장이 기억과 책임을 설계하는 공간으로 자리매김할 수 있다.
참고 = 롯데자이언츠, 부산일보, 부산항만공사, 약진 50년의 자취(부산박물관, 2013), 부산역사문화대전, Buildings and Cities(2023), Physical Culture and Sport Studies and Research(June, 2011), Cities for People(2010), ISO26000(국제표준화기구 사회적책임 표준), etc.
야구공작소 천태인 칼럼니스트
에디터 = 야구공작소 강상민, 전언수
일러스트 = 야구공작소 김범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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