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일러스트 = 야구공작소 이찬희 >
이야기의 마무리는 언제나 가장 어렵다. 시작은 기대와 설렘이 이끌지만 끝맺음은 책임과 무게가 따른다. 이야기를 이루는 모든 장면과 감정, 갈등은 결국 하나의 결말로 향한다. 그 마지막 순간이 서사의 운명을 결정짓는다.
중간이 아무리 화려해도 끝이 어설프면 모든 것이 무너진다. 반대로 평범한 이야기라도 마지막이 빛나면 전혀 다른 평가를 받는다. 서사에서 마무리는 단순한 종결이 아닌 전체 의미를 판가름하는 심판대다.
그러한 ‘마무리’라는 단어의 무게를 누구보다 깊이 증명해 온 투수가 있었다. 위기 앞에서 표정 하나 변치 않고 돌직구로 수많은 경기를 마무리 지었다. 상대 타자들에게는 공포의 대상이었고, 팬들에게는 승리의 상징이었다. 그래서 그는 ‘끝판왕’이라 불렸다.
2025년 8월 6일, 그 ‘끝판왕’ 오승환은 올 시즌을 끝으로 마운드를 떠나겠다고 선언했다.
나를 오승환이라 부르라
‘오승환’이라는 이름에서 우리는 무엇을 떠올릴까. KBO리그 통산 737경기에 등판해 803.1이닝 44승 33패 19홀드 427세이브 ERA 2.32를 기록했다. 한미일 통산 1,096경기에서 549세이브(KBO 427, NPB 80, MLB 42)를 쌓았다. 아시아 통산 최다 세이브, 단일 리그 최다 세이브, 단일 시즌 최다 세이브 등 마무리 투수에게 있어 ‘최초’와 ‘최고’라는 타이틀은 대부분 그의 몫이었다.
국가대표 오승환도 빛났다. 2006 WBC에서 처음 태극마크를 달고 세계를 놀라게 하며 대회를 빛낸 스타로 선정되었다. 2008 베이징 올림픽에서는 금메달을 따냈다. 이후의 아시안 게임, WBC, 올림픽에서도 마운드를 책임졌다. 특히 2017 WBC에서는 압도적인 실력을 보여주며 대한민국 야구 국가대표팀의 자존심을 지켰다.
숫자로 남은 기록만큼이나, 그는 상징으로 기억된다. 위기에도 눈빛과 표정이 변하지 않는 돌부처. 상대를 현혹하는 이중 키킹. 9회를 삭제하는 돌직구. 관중석에서 터져 나오는 ‘끝판대장’이라는 외침. 이 모든 것은 하루아침에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어린 시절의 늦은 출발, 잦은 부상, 그리고 끝이 보이지 않던 재활 과정이 그 표정의 담담함을 만들었다. 다리를 들어 올리는 동작에는 절박함과 힘이 담겼다. 강철 같은 이미지와 정신력은 그렇게 다져졌다.
마무리로 가는 길
1982년 7월 15일. 프로야구가 막 첫걸음을 뗀 해, 서울종합운동장 야구장이 문을 연 날, 오승환은 태어났다.
야구와의 인연은 조금 늦게 찾아왔다. 초등학교 5학년 시절, 우연히 체력장에서 공을 가장 멀리 던진 것이 계기였다. 늦은 시작은 정석적인 투구폼을 만들 시간을 허락하지 않았다. 그는 자신이 가장 편안하게 힘을 실을 방법을 선택했다. 다리를 내려 동작을 멈춘 뒤 발을 끌듯 옮기고 상체 힘을 이용해 던지기 시작했다. 그렇게 ‘이중 키킹’이 탄생했다.
중학교 시절, 그는 사이드암에서 오버핸드로 투구폼을 바꾸고 구속을 끌어올리며 두각을 나타냈다. 경기장에서 표정은 늘 무표정이었다. 이유는 단순했다. 아버지가 경기 후 “잘하건 못하건 실실 웃는 건 꼴 보기 싫다”라며 타일렀다. 원래 말수가 적고 감정을 절제하는 집안 분위기가 그 표정을 굳혀버렸다. 훗날 ‘돌부처’라 불린 표정은 그때부터 이미 완성되고 있었다.

< 경기고 에이스였던 이동현과 한서고에서 전학 온 오승환 >
고등학교에 진학하자 메이저리그 팀들의 테스트 제안까지 받을 만큼 특급 유망주로 성장했다. 그러나 부상들이 겹치며 시련이 찾아왔다. 특히 척추 분리증 진단은 투수 인생의 치명타였다. 등판을 할 수 없어 타자로 나섰지만, 평생 홈런은 단 한 개에 발 빠른 것 외의 장점이 없는 외야수에게 프로팀은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메이저리그를 꿈꾸던 유망주는 단 2년 만에 KBO 신인 드래프트 미지명자가 됐다.
그를 눈여겨본 강문길 감독의 권유로 단국대학교에 진학했지만, 첫해에 팔꿈치 인대 수술까지 받았다. 이후 끝이 보이지 않는 재활뿐이었다. 낮에는 웨이트트레이닝, 밤에는 튜빙으로 손목과 팔꿈치 힘을 키우는 날들이 반복됐다.
“승환이에게는 팔꿈치 주변 근육을 보강하는 운동만 죽어라고 시켰다. 보통 선수면 야구를 그만뒀을 텐데 승환이는 묵묵히 몸을 만들었다.”
– 2016년 강문길 전 단국대 감독이 오승환의 대학 시절을 회상하며
그 긴 터널을 빠져나온 이후, 마침내 봄이 찾아왔다. 복귀한 오승환은 대학야구 춘·추계리그에서 혼자 6승을 거두며 단국대의 양대 리그 석권을 이끌었다. 춘계리그 우수투수상과 추계리그 최우수선수상은 부활을 알리는 징표였다. 훗날 9회를 지배하던 ‘끝판왕’의 강철 같은 정신력은 이러한 역경 속에서 다져진 것이다.
마침내 프로의 문턱을 넘은 해는 2005년이었다. KBO 신인 드래프트에서 2차 1라운드 전체 5순위로 삼성 라이온즈에 입단했다. 당시 평가에는 불안 요소도 있었다. 부상 전력이 많고 특이한 투구폼의 그가 프로 무대에서 제 기량을 발휘할 수 있을지에 대한 의문이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려는 오래가지 않았다. 그는 이미 마운드를 지배하는 법을 알고 있었다.
오승환의 시대
데뷔 첫해부터 오승환은 삼성 마운드에 자리 잡았다. 그러나 처음부터 마무리를 맡은 건 아니었다. 당시 오승환의 위치는 언제든 필요할 때 불려 나오는 ‘애니콜’에 가까웠다. 하지만 팀은 곧 그의 자리를 9회로 정했다. 그 순간을 알린 건 한 통의 전화였다.
오라 야구장(제주종합경기장 야구장)에서 현대 유니콘스와의 전반기 마지막 3연전을 앞두고, 양일환 투수코치에게서 전화가 걸려 왔다.
“오늘부터 맨 뒤에 대기해라. 임시가 아니라 정식 마무리야. 잘해봐라.”
그 한마디와 함께 오승환의 ‘9회 말 인생’이 시작되었다.

< 오승환과 한국시리즈는 떼려야 뗄 수 없다 >
2005년 오승환은 61경기에 나와 99이닝을 던졌다. 10승 11홀드 16세이브 ERA 1.18을 기록했다. 승률 0.909로 승률왕도 차지했다. KBO에서 10승–10홀드-10세이브를 단일 시즌에 달성한 선수는 지금까지도 그때의 오승환이 유일하다. 한국시리즈에서도 1승 2세이브를 기록하며 그는 신인상과 한국시리즈 MVP를 동시에 거머쥔 KBO 역사상 보기 드문 선수가 됐다. 이후 오승환은 단순한 마무리를 넘어 리그의 상징이 됐다.
2006년, 시즌 63경기에서 47세이브를 기록하며 임창용의 KBO 단일 시즌 최다 세이브(44세이브)와 이와세 히토키의 아시아 단일 시즌 최다 세이브(46세이브)를 갈아치웠다. 한국시리즈에서도 뒷문을 단단히 걸어 잠그며 삼성의 통합 2연패를 완성했다. 2007년과 2008년에도 40세이브, 39세이브를 기록하며 세 시즌 연속 구원왕에 올랐다. 리그의 뒷문을 지배한 오승환은 ‘끝판대장’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그러나 영광만 이어진 것은 아니었다. 2009년 우측 어깨 부상으로 고전했고, 2010년에는 허벅지와 팔꿈치 부상까지 겹치며 정상적인 시즌을 보내지 못했다. 입단 전에도 부상으로 골머리를 앓았기에 전성기가 꺾일 수 있다는 우려가 따라다녔다. 하지만 오승환은 돌아올 때마다 더 강해졌다. 부상과 재활은 그에게 시련이 아니라 마지막 순간을 위한 힘을 벼려내는 시간이었다.
2011년, 돌아온 오승환은 리그를 완전히 지배했다. 시즌 54경기에 등판해 47세이브를 쌓아 올리며 스스로 세웠던 단일 시즌 최다 세이브 타이를 기록했다. ERA는 0.63. 57이닝을 던지면서 단 4점만을 허용했다. 9회는 곧 경기의 끝을 의미했고, 타자들은 마운드에 선 그의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 패배를 직감했다.
2011년 오승환이 등판한 경기 중 팀이 패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는 KBO 최초의 무패 구원왕이 되었다. 삼성의 통합 우승을 이끌었고, 정규시즌과 한국시리즈 MVP 투표에서도 이름을 올렸다. 2011년은 그가 스스로 그리는 이상적인 마무리 투수의 모습에 가장 근접한 한 해였다.

< 삼성 라이온즈 1기 오승환의 상위 시즌 성적 >
“너무 잘해주고 있다. 우리 팀 선수라 자랑스럽다. 오승환 덕분에 우리 팀은 8회까지만 야구하면 된다.”
– 2012년 삼성 류중일 감독이 최다 통산 세이브 기록 경신을 축하하며
2012년, 오승환의 지배는 이어졌다. 37세이브를 기록하며 팀의 통합 2연패를 뒷받침했다. 시즌이 끝난 뒤 그는 해외 진출을 타진했지만, 구단은 “통합 3연패의 대업을 이루자”라며 발걸음을 멈추게 했다. 오승환은 구단의 제안을 받아들이며 한 시즌 더 삼성 유니폼을 입었다. 그리고 2013년 정규시즌에서 28세이브를 기록했고, 극적인 역전으로 완성된 한국시리즈에서도 마지막 아웃카운트를 책임지며 팀의 통합 3연패를 완성했다.

< 삼성 왕조의 상징인 오승환과 진갑용 배터리의 손가위 세리머니 >
그 순간은 단지 한 해의 결말이 아니라 오승환이 걸어온 모든 가을의 풍경을 압축한 장면이었다. 오승환은 포스트시즌 29경기에 등판해 2승 13세이브 ERA 1.71, 탈삼진 49개를 기록했다. 그가 있는 동안 삼성 라이온즈가 차지한 다섯 번의 한국시리즈 우승에서 모두 마지막 아웃카운트를 책임졌다.
그리고 약속대로, 그는 새로운 무대로 향했다. 다음 장은 일본, 한신 타이거스였다.
도톤보리의 이시가미사마
2014년, 오승환은 일본 무대에 입성했다. 한신 타이거스가 제시한 계약은 2년 총액 9억 엔. 한국인 선수로서는 파격적인 대우였다. 한신은 그를 팀의 새로운 수호신으로 맞이했다. 하지만 처음부터 기대와 환영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일본 특유의 ‘현미경 야구’ 앞에서 그의 돌직구가 통하지 않을 것이라는 전망이 쏟아졌다. 라이벌 요미우리 자이언츠는 “오승환을 알몸으로 만들겠다”라며 철저히 분석해 무너뜨리겠다고 호언했다. 한신의 최고 마무리였던 후지카와 규지의 등번호 22번을 이어받는 것도 탐탁지 않게 여겼다.
그러나 일본 팬들은 곧 오승환의 돌직구와 무표정에 매료되었다. 첫해부터 그는 한신의 뒷문을 굳게 걸어 잠갔다. 정규시즌에서 39세이브 ERA 1.76을 기록하며 최다 세이브 투수가 되었다. 센트럴리그 최고 마무리 중 한 명으로 자리매김했다. 연투와 멀티 이닝도 마다하지 않은 오승환의 활약은 특히 뒷문 사정이 불안했던 한신에서 더욱 두드러졌다.
더욱 빛난 순간은 가을이었다. 클라이맥스 시리즈에서 6경기에 나와 4세이브를 올리며 시리즈 MVP를 차지했다. 일본시리즈까지 포함해 9경기에서 1홀드 4세이브. 그야말로 한신의 가을을 홀로 지탱한 투수였다.
비교적 약체로 평가받던 한신이 1승을 먼저 가져간 라이벌 요미우리를 역스윕하며 9년 만에 일본시리즈 무대에 오르자, 팬들은 도톤보리강으로 뛰어드는 세리머니를 펼쳤다. 팬들은 그를 ‘이시가미사마(石神樣, 돌신님)’라 부르며 열광했다.
마운드 위 어떤 상황에서도 무덤덤한 오승환의 표정은 한신 팬들에게 절대적인 믿음을 주었다. 한국에서 “돌부처”라 불리던 투수는 일본에서 새로운 별명을 얻었다. 돌처럼 단단하고 신처럼 흔들리지 않는 존재라는 의미였다.

< 오승환은 한신의 수호신으로 활약하며 팀을 일본시리즈로 이끌었다 >
“오승환의 돌직구가 가을에는 영혼을 품어 강철직구로 변한다. 등번호 22번이 팀을 미답의 땅에 도달하게 했다.”
– 마이니치 신문, 한신 타이거스 9년만의 일본시리즈 진출 소식을 전하며
2015년, 오승환의 직구는 여전했다. 69경기에 나와 2승 41세이브 ERA 2.73을 기록하며 2년 연속 센트럴리그 최다 세이브 투수에 올랐다. 일본 무대에서 두 시즌 동안 합작한 80세이브는 확실히 그가 최정상급 마무리임을 입증했다. 하지만 2014년에 비해 안정감이 다소 흔들렸다는 평도 뒤따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신 불펜의 절대적인 기둥이었음은 변함이 없었다.
“오승환은 2014년 한신에 입단한 가운데 절대적인 수호신이 되었다. 후지카와 규지의 후임이라는 역할을 맡았고, 2년 연속 최다 세이브로 멋지게 보답했다. 오승환, 도리스, 피어스 존슨 등 우수한 구원투수들이 2010년대에 도드라졌다.”
– full-count, 한신 타이거스의 2010년대를 빛낸 외국인 선수 中
시즌이 끝난 뒤, 오승환은 마침내 오랫동안 품어온 꿈을 향해 나아갔다. 일본 진출 당시 “2년 뒤에는 메이저리그에 도전하겠다”라던 그 말을 지키기 위해 미국 무대를 택했다. 그렇게 한신과의 계약을 마무리한 그는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와 계약하며 메이저리그 도전에 나섰다.
The Final Boss
“몇 년 전에 언급했듯이 우리는 아시아 시장, 특히 한국과 일본에서 일어나는 일을 더 잘 이해하기 위해 약간의 에너지와 자원을 소비할 예정이었습니다. 그리고 아이러니하게도 우리는 실제로 한국인이지만 일본에서 뛰는 선수와 계약할 수 있었습니다.”
– 2016년 존 모젤리악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 단장의 오승환 영입 기자회견 中
2016년, 오승환은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 유니폼을 입고 빅리그 무대에 서게 됐다. 연차에 엄격한 메이저리그지만 동갑내기이자 팀의 리더인 야디에르 몰리나가 “그는 내 친구다”라고 못 박으며 애매한 신참 대접을 끝냈다. 그 한마디로 서열 정리가 끝났고, 오승환은 오로지 투구에만 집중했다.
시즌 초반 오승환은 셋업맨으로 시작했다. 트레버 로젠탈이 9회를 책임지고, 그는 케빈 시그리스트, 조나단 브록스턴과 함께 7, 8회를 맡을 것으로 예상됐다. 그러나 시즌이 흐르면서 상황은 달라졌다. 로젠탈이 난조를 보이자, 마이크 매시니 감독은 오승환을 마무리로 기용했다.
7월 3일 밀워키 브루어스전에서 첫 세이브를 올리며 ‘The Final Boss’가 마지막을 책임지기 시작했다. 특히 7월 20일 샌디에이고 파드리스와의 더블헤더를 모두 마무리하며 2004년 제이슨 이스링하우젠 이후 처음으로 하루 두 경기 세이브를 기록한 카디널스 투수가 된 것은 시즌의 백미였다.

< 2016년 오승환은 메이저리그 최정상급 클로저로 활약했다 >
오승환은 2016년 76경기 79.2이닝 6승 19세이브 14홀드 ERA 1.92, 삼진은 103개를 뽑아냈다. 강력한 직구와 슬라이더를 주무기로, 상황에 따라 체인지업과 커브까지 뛰어난 제구력으로 구사했다. 평균보다 훨씬 높은 삼진율과 평균 이하의 볼넷 비율을 기록하며 타자들을 묶어냈다. 그보다 많은 이닝을 소화한 구원 투수는 6명뿐이었다. 꿈의 무대 메이저리그에서도 최정상급 활약을 선보였다. 시즌이 끝난 뒤 빌 드윗 주니어 구단주는 오승환의 2016년을 ‘위대한 한 시즌’으로 평가했다.

< 2016년 오승환의 성적 >
2.6의 단일 시즌 fWAR은 카디널스 불펜 역사상 1960년 린디 맥다니엘에 이어 2번째로 높은 수치였다. 메이저리그 전체 5위, 내셔널리그에서는 켄리 잰슨과 아롤디스 채프먼에 이은 3위였다.
갑작스레 변경된 마무리에 의구심이 많았지만, 마운드 위 존재감은 금세 팀 전체를 설득했다. 에이스 애덤 웨인라이트는 그의 공을 보고 한국말로 “쩔어!”를 외쳤고, 때로는 “아주 쩔어!”로 감탄했다. 매시니 감독은 손으로 ‘O’를 그려 그를 호출했고 경기 후 그가 내려오면 한국말로 “좋아!”라고 격려했다. 낯선 구단과 문화 속에서도 오승환의 9회는 금세 하나의 언어가 되었다.
2017년, 오승환은 여전히 마무리로 등판했지만 전년도만큼 눈에 띄는 성적을 기록하진 못했다. 이후 FA가 된 그는 새로운 도전을 위해 팀을 옮기기로 결심했다.
2018년, 오승환은 토론토 블루제이스 유니폼을 새롭게 입었다. 비교적 얇은 불펜 전력을 가진 블루제이스에서 그는 4승 2세이브 12홀드 ERA 2.68이라는 준수한 성적을 올리며 안정적인 활약을 이어갔다. 그러나 시즌 중반 팀이 부진하며 트레이드 시장에서 셀러로 전환되었고, 콜로라도 로키스로 트레이드되며 다시 한번 변화의 바람 앞에 섰다.
새로운 팀, 그것도 투수들에게 악명 높은 ‘투수의 무덤’ 쿠어스 필드로의 이적은 절대 쉽지 않은 도전이었다. 그러나 오승환은 흔들림 없이 자신의 역할을 해내며 팀의 포스트시즌 진출에 힘을 보탰다. 가을에는 와일드카드 결정전과 NLDS에 나섰고 두 경기에서 무실점 투구를 펼쳤다. 한미일의 가을을 모두 밟은 투수. 그 이름은 오승환이 유일하다.

< 로키스에서의 등판으로 최초의 한미일 가을야구 경험자가 된 오승환 >
2019년, 오승환은 더 이상 전성기의 모습은 아니었다. 로키스에서 시즌을 시작했지만 부상과 부진이 동시에 찾아왔다. 기록지는 낯선 숫자들로 채워졌다. 결국 7월 햄스트링 부상으로 시즌을 조기 마감했고 방출 통보를 받으며 메이저리그에서 마지막을 맞았다.
그러나 이야기는 그렇게 끝나지 않았다. 오승환은 “내 실력이 된다면, 삼성에서 마지막 공을 던지고 싶다.”라고 말해왔다. 그는 자신의 야구를 자신의 방식으로 마무리하기 위해 돌아왔다. 처음 9회를 지배했던 곳, 이야기가 시작된 곳, 삼성 라이온즈로.
끝판왕이 돌아왔다
2020년, 오승환은 출전 정지 징계와 재활 이후 마침내 삼성 라이온즈 마운드에 다시 섰다. 전반기의 부진으로 이미 쇠퇴했다는 평가도 있었지만, 이후 리그 정상급 퍼포먼스를 기록하며 오승환은 여전히 오승환임을 보여줬다.
2021년은 오승환에게 다시 찾아온 전성기였다. 압도적인 실력으로 44세이브를 수확하며 개인 통산 여섯 번째 구원왕에 올랐다. KBO 통산 300세이브, 역대 최고령 40세이브라는 대기록까지 세우며 마흔의 나이에도 리그 최고의 마무리임을 증명했다.
2022년과 2023년에도 오승환의 마무리는 계속됐다. 나이가 들고 돌직구의 위력은 조금씩 줄었지만, 마운드 위 표정만큼은 한결같았다. 세월이 힘을 앗아가는 동안에도 손끝에는 여전히 특유의 냉정함이 남아 있었다. 그는 한미일 통산 500세이브와 KBO 통산 400세이브를 달성하며 누구도 따라올 수 없는 발자취를 남겼다.

< KBO 통산 400세이브, 전인미답의 경지에 오르다 >
그러나 2024년, 그에게도 쉽지 않은 시즌이 찾아왔다. 전반기에는 안정적이었지만, 후반기에는 상당히 부진했다. 평소와 달리 흔들리는 모습에 팬들은 걱정을 감추지 못했다.
그리고 2025년, ‘끝판왕’ 오승환은 은퇴를 선언했다. 그는 1세이브를 추가해 550세이브 달성을 이루고 싶다는 꿈을 조심스럽게 밝혔다. 이는 단순한 기록이 아닌 걸어온 길과 팬들에게 바치는 마지막 선물이자, 마운드 위에 남기는 최후의 흔적일 것이다.
그렇게 그의 위대한 야구 오페라는 마지막 악장에 들어갔다. 21년간 묵직한 돌직구와 돌부처 같은 표정으로 9회를 삭제시켰던 오승환. 명실상부 대한민국 최고의 마무리 투수였던 그의 이야기에도 마무리가 다가왔다.
“등번호 21번이고 21년의 선수생활을 했는데, 팬 분들께 받은 사랑으로만 보면 제 선수 시절 점수는 21점 만점에 21점입니다. 제 개인적으로 평가하기로는 21점에 20점. 나머지 1점은 남은 인생에서 찾겠습니다.”
– 오승환의 은퇴 기자회견 中
마무리
Stat rosa pristina nomine, nomina nuda tenemus.
예전의 장미는 그 이름일 뿐, 우리에겐 그 이름들만 남아있을 뿐.
– 움베르토 에코 『Il nome della rosa (장미의 이름)』 中
세월은 모든 것을 지운다. 9회를 지배하던 강속구도, 마운드 위의 흔들림 없는 표정도, 그 순간을 가득 채우던 숨 막히는 긴장감도. 시간이 흐르면, 그 모든 것은 사라지고 남는 것은 이름뿐이다.
그러나 ‘오승환’이라는 이름은 그 덧없음을 견뎌낸다. 비록 마운드 위 그의 모습은 더 이상 볼 수 없지만, 그 이름을 부르는 순간 우리는 다시 떠올린다. 마지막 타자를 무너뜨리던 ‘끝판왕’의 돌직구, 위기 속에서도 흔들림 없던 ‘돌부처’의 표정, 경기가 끝날 때 터져 나오는 함성. 그 모든 것이 이름과 함께 팬들의 기억 속에서 되살아난다.
경기 후반, 불펜 문이 열리고 21번 유니폼이 걸어 나온다. 관중석의 분위기가 바뀐다. 점수 차와 상황이 어떻든, ‘여기서 끝난다’라는 확신이 야구장을 지배한다.
소녀의 기도가 울려 퍼진다. 수업을 마치는 종소리처럼, ‘곧 경기가 끝난다. 집에 갈 준비를 해라’는 선율이 전해진다. 그 장엄함 속에서 오승환이 마운드에 오르면, 관중은 하나 되어 노래한다.
“오승환, 세이브 어스”
참조 = KBO, MLB, Fangraphs, STATIZ, 동아일보, 조선일보, 순간을 지배하라(오승환 저), 야구야 고맙다(추신수, 오승환, 이대호, 이영미 저)
야구공작소 김예찬 칼럼니스트
에디터 = 야구공작소 장호재
일러스트 = 야구공작소 이찬희
ⓒ야구공작소. 출처 표기 없는 무단 전재 및 재배포를 금합니다. 상업적 사용은 별도 문의 바랍니다.
댓글 남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