팬그래프 시즌 예상: 내셔널리그 중부지구 1위(96.2승 65.8패)
시즌 최종 성적: 내셔널리그 중부지구 1위(103승 58패), 월드시리즈 우승
프롤로그
[야구공작소 박기태] 마침내. 108년 만의 우승과 함께 71년 전 탄생한 염소의 저주가 막을 내렸다. 시카고 컵스는 “최고의 팀이 오히려 우승하기 어렵다.”는 미신을 극복하고 가장 완벽한 한 해를 보냈다. 스토브리그 영입에서부터 시즌 운영까지, 어느 한 구석 물 샐 틈을 찾아볼 수 없었던 완성도 높은 시즌이었다. 7월 중 마무리 아롤디스 채프먼의 영입을 위해 다소간의 유망주들을 지출하면서 미세하게 잡음이 발생하는 것도 같았지만, 우승이라는 결과로 그 조금의 비판마저 잠재워버리고 말았다.
옥의 티가 없지는 않았다. 물론 그 ‘티’는 시즌 내내 예상 밖의 타격 부진에 시달렸던 우익수 제이슨 헤이워드였다. 그렇지만 이마저도 일종의 ‘한 수 봐주기’처럼 느껴졌을 정도로 컵스의 전력은 완벽에 가까웠다. 2016 시즌의 컵스는 타격, 투구, 수비 전부에서 압도적인 내셔널리그 최고의 팀이었다. 포스트시즌 들어 조 매든 감독의 쫓기는 듯한 투수 교체로 몇 차례 대업을 그르칠 뻔하기도 했지만, 그때마다 선수들이 돌아가며 나서서 팀을 위기에서 구해냈다.
그렇게 이뤄낸 108년 만의 우승은 전미에서 화제가 되었다. 우승 기념 상품들은 역대 최고의 페이스로 날개 돋친 듯 팔려 나갔고, 우승 퍼레이드에는 500만여 명의 시민들이 몰려들었다. 퍼레이드가 열렸던 지난 11월 4일(미국 시각), 시카고의 도심을 가로지르는 시카고 강은 컵스의 상징인 커비 블루(Cubbie Blue)의 색깔로 파랗게 물들었다. 팀의 정신적 지주 역할을 했던 무명의 노장 포수 데이빗 로스는 유명 쇼 프로그램에 게스트로 출연하는 등, 과거라면 상상도 할 수 없었을 스포트라이트를 만끽하는 중이다. 시카고는 108년 만에 따뜻한 겨울을 보내고 있다.
최고의 선수 – 크리스 브라이언트
0.292/0.385/0.554 39홈런 102타점 fWAR 8.4
이번 시즌 컵스에서는 여러 선수가 커리어 하이 시즌을, 혹은 커리어 하이에 근접한 시즌을 보냈다. 그중에서도 군계일학은 단연 내셔널리그 MVP를 수상한 크리스 브라이언트였다. 브라이언트는 첫해에 신인왕, 2년차에는 MVP에 월드시리즈 우승이라는 소설 같은 일대기를 써 내려가고 있다.
첫 시즌부터 막중한 기대에 부응하며 내셔널리그 신인상을 수상했던 브라이언트지만, 당시의 그는 약점이 상당히 뚜렷한 선수였다. 지나치게 많은 삼진이 그것이었다. 30%를 넘어섰던 데뷔 시즌의 삼진 비율은 브라이언트가 장차 정확도가 떨어지는 ‘공갈포’로 전락할 수 있다는 우려를 남겼다. 이에, 브라이언트와 컵스는 지난 겨울 동안 스윙 교정에 몰두했다. 공을 높이 퍼 올리는 데 주력했던 스윙 궤적을 살짝 낮춤으로써 발사 각도가 25~30도에 가까운 라인드라이브 타구를 보다 많이 양산하는 것이 교정의 목적이었다. 브라이언트는 어릴 적부터 자신의 타격을 지도해온 마이너리그 선수 출신의 아버지와 구단의 타격 코치, 그리고 스윙 속도와 각도를 분석하는 Zepp이라는 업체의 도움을 받아 겨울 내내 스윙 교정에 힘썼다. 실험의 결과는 성공적이었다. 브라이언트는 삼진 비율을 낮추면서 홈런 숫자를 늘리는 ‘두 마리 토끼’를 잡아내는 데 성공했다.
타석에서 완전체로 진화한 브라이언트는 수비수로서도 높은 점수를 받았다. 지난 시즌에는 대부분의 경기를 3루수로만 나섰지만, 올해는 거기에 좌익수와 우익수, 1루수를 오갔으며, 심지어는 1이닝 동안이지만 유격수와 중견수로 활약하기도 했다. 그리고 우익수를 제외한 모든 자리에서 0 이상의 UZR과 DRS를 기록하며 수치상으로도 좋은 모습을 보였다.
브라이언트는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의 버스터 포지처럼 등장과 동시에 최고의 자리에 올랐다. 지나치게 빠른 성취가 동반하는 허무함을 걱정할 법도 하지만, 이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를 찾아보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어린 시절부터 근면함으로 이름이 높았던 브라이언트가 그 주인공이기 때문이다. 외모마저 수려한 이 젊은 슈퍼스타의 미래가 어디까지 뻗어 나갈지, 그 귀추가 주목된다.
# 함께 언급될 만한 선수: 앤서니 리조, 존 레스터
가장 발전한 선수 – 카일 헨드릭스, 덱스터 파울러, 애디슨 러셀
카일 헨드릭스: 16승 8패 190이닝 ERA 2.13 44볼넷 170삼진 fWAR 4.5
덱스터 파울러: 0.276/0.393/0.447 13홈런 84득점 13도루 fWAR 4.7
애디슨 러셀: 0.238/0.321/0.417 21홈런 DRS 19 UZR 15.4 fWAR 3.9
2011년 신인 드래프트 8라운드에서 텍사스 레인저스의 지명을 받았던 대졸 우완투수 카일 헨드릭스는 이듬해 트레이드를 통해 컵스로 둥지를 옮겼다. 그 무렵, 패스트볼의 평균 구속이 시속 90마일에도 미치지 못했던 이 투수의 기대치는 기껏해야 5선발 정도가 고작이었다. 그러던 그가 올 시즌, 메이저리그에서 규정이닝을 소화한 투수들 가운데 가장 낮은 평균자책점을 기록하면서 컵스의 가장 놀라운 발견으로 떠올랐다. 비결은 비슷한 움직임으로 상대를 기만하는 싱커와 체인지업의 조합, 그리고 완벽한 제구력으로 철저하게 낮은 지점을 공략하는 투구 전략이었다. 이러한 투구 방식상의 유사성 덕분에 헨드릭스에게는 ’마스터’ 그렉 매덕스를 연상시킨다는 호평이 따라다닌다. 팬들 사이에서의 별명도 매덕스를 따라 ‘교수님’으로 정착되고 있다.
덱스터 파울러는 하마터면 올해 컵스의 일원이 아니었을 수도 있었다. FA 신분을 얻어 시장으로 나섰던 지난 오프시즌, 파울러는 컵스가 아닌 볼티모어와 계약 직전 단계까지 합의를 이루어 냈다. 그러나 갑작스럽게 그의 메디컬 테스트에서 이상이 발견됐다는 정보가 새어 나왔고(파울러의 에이전트는 이것이 몸값을 깎으려는 볼티모어의 언론 플레이라고 주장했다), 결국 다른 구단들과의 계약은 요원한 일이 되고 말았다. 파울러는 울며 겨자 먹기로 원 소속팀 컵스와 단년 계약을 맺고 ‘FA 재수’에 도전하는 길을 선택했다. 그리고 이는 컵스와 파울러 모두에게 전화위복의 결정으로 돌아왔다. 파울러는 데뷔 이래 가장 높은 4.7의 fWAR을 기록하며 화려한 백조로 탈바꿈했고, 컵스는 파울러의 활약에 힘입어 108년간의 숙원을 풀어냈다. 파울러가 앞으로도 올해만큼 빼어난 타격생산력을 보여줄 수 있을지는 미지수지만, 미아였던 자신을 거두어 간 컵스에게 그 곱절로 보답해주었다는 사실만큼은 분명하다.
2014년 7월, 오클랜드의 최고 유망주였던 애디슨 러셀은 제프 사마자의 트레이드 대가에 포함되어 컵스의 유니폼을 입었다. 이제 러셀은 그 무렵 오클랜드의 다른 영입 대상이었던 좌완 에이스 존 레스터의 뒤를 지키는, ‘컵스의’ 든든한 주전 유격수로 자리매김했다. 타격으로만 보면 러셀은 21개라는 준수한 홈런 개수 외에는 별다른 두각을 드러내지 못하고 있다. 그의 진정한 가치는 유격수의 기본이자 핵심인 수비에서 드러난다. 러셀은 이번 시즌, 최신식의 수비 지표인 DRS와 UZR 모두에서 내셔널리그 2위를 차지했다. 그러면서도 내셔널리그 1위를 차지한 브랜든 크로포드와 비교하면 7년 하고도 2일이나 어린, 1994년생의 선수이다. 그렇게 러셀은 빅리그 데뷔 2년 만에 크리스 브라이언트에 버금가는 컵스의 보물로 자리 잡았다.
최악의 선수 – 제이슨 헤이워드
완벽한 그들에게 부족했던 단 한 가지. 통산 0.761의 OPS는 0.631로 곤두박질쳤고, 지난 4시즌 동안 평균 5 이상을 기록했던 fWAR은 1.6까지 추락했다. 이렇게까지 못 칠 수가 있나 싶은 팬들의 원성에 스스로도 자괴감이 들었을 법한 한 해였다. 올 시즌, 컵스의 타선에서 헤이워드가 맡았던 역할은 그저 포수 못지않은 또 하나의 ‘구멍’ 타순이었다.
헤이워드의 부진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예상하지 못한 것이었다는 점에서 더욱 충격적이었다. 이번 시즌 전까지의 헤이워드는 컵스의 홈구장인 리글리 필드에서도 준수한 성적을 기록했던, 그리고 3년 연속으로 0.340 이상의 출루율을 기록하고 있던 나쁘지 않은 타격의 소유자였다. 게다가 올 시즌 역시, 기존 시즌들에 비했을 때 특기할 만한 차이라고는 손목에 입었던 한 차례의 부상뿐이었다. 그렇게 염소의 저주를 혼자서 짊어지기라도 한 것처럼 의문의 부진을 이어간 헤이워드는, 결국 데뷔 이래 처음으로 0.700 아래의 OPS를 기록하면서 시즌을 마치고 말았다.
그나마 위안이 되었던 것은 수비력만큼은 녹슬지 않았다는 사실이었다. 마이너리그 유망주 시절부터 이름 높았던 괴물 같은 운동신경은 여전히 살아있었던 것이다. 팀에 보탬보다는 짐이 되었던 타격 성적에도 불구하고, 헤이워드는 이 수비력을 앞세워 포스트시즌 선발 라인업에서도 자신의 자리를 지켜낼 수 있었다. 손목 부상을 제외하면 이렇다 할 이상 징후가 보이지 않는다는 점 역시 어느 정도 긍정적으로 받아들여볼 여지가 있다. 이번 시즌이 바닥을 친 것이라고 가정한다면, 앞으로는 반등할 일만 남은 셈이다. 일단 헤이워드는 아직 만 27세에 불과한 젊은 선수다.
키포인트 – 장대한 계획의 완벽한 마침표
현대 야구에는 너무나도 많은 변수가 존재한다. 실책과 같은 경기 내적인 변수들 외에도 부상을 필두로 한 영입 실패, 유망주 육성 실패 등의 경기 외적인 변수가 수없이 발생한다는 것이 현대 야구의 특징이다. 때문에 수뇌부가 짜 놓은 청사진대로 구단이 성장하는 경우는 그리 흔하지 않다. 하지만 컵스의 이번 우승은 근래 드물었던, 구단의 장기적인 구상이 거의 완벽한 형태로 구현된 성격의 결과물이었다.
테오 엡스타인 사장이 처음 부임한 5년 전부터 컵스의 초점은 2016년에 맞춰져 있었다. 유망주들이 기대 이상의 폭발적인 성장세를 보인 덕에 1년 앞선 2015년부터 예정보다 이른 우승 트로피를 들어올리는 것이 아닌가 싶었지만, 결국 포스트시즌에서 메츠의 강속구 투수진을 상대로 무기력한 패배를 경험하고 말았다. 마지막 남은 2%를 메꾸기 위해 컵스의 프론트 오피스가 내놓은 카드는, 바로 대대적인 투자를 통한 FA 선수들의 영입이었다.
그리고 우리는 이 카드의 성패를 잘 알고 있다. 완벽한 성공이었다. 슈퍼 유틸리티 벤 조브리스트는 좌익수와 우익수 그리고 2루수로, FA 재수를 택한 덱스터 파울러는 A급 리드오프이자 중견수로, 37세의 노장 존 래키는 로테이션의 중간을 받쳐주는 베테랑 선발투수로 각각 기대 받았던 역할을 충실히 수행해주었다. 대형 계약의 2년차를 맞이한 에이스 존 레스터도 작년보다 나은 시즌을 보냈고, 제이슨 헤이워드는 기대 이하의 타격에도 여전한 수비력으로 최소한의 이름값을 해냈다.
화룡점정은 마무리 아롤디스 채프먼의 영입이었다. 엡스타인 사단은 공들여 키운 4명의 유망주를 내주면서, 어찌 보면 상당히 비싼 가격을 지불함으로써 양키스로부터 채프먼의 ‘반 년 임대’를 성사시켰다. 대업을 99% 가까이 진척시킨 상황에서 남은 1%의 변수를 소거하기 위해 선택한, 퍼즐의 값비싼 마지막 한 조각이었다. 이적 후 정규시즌에서 채프먼은 26.2이닝 동안 1.01의 평균자책점을 기록하며 특급 마무리에게 기대했던 그대로의 성적을 생산해냈고, 포스트시즌에서는 멀티 이닝마저 군말없이 소화하는 헌신적인 모습을 보여주었다. 누적된 피로 탓인지 가장 중요했던 월드시리즈 7차전에서 다소 흔들리는 모습을 노출했지만, 전체적으로는 컵스가 기대했던 역할에서 거의 부족함이 없었다.
물론 이 월드시리즈 우승 팀의 중추를 견실하게 지탱하고 있었던 것은 그동안 꾸준히 수집하고 육성해왔던 유망주들이었다. 어엿한 팀의 중심으로 올라선 앤서니 리조, 전국구 특급 스타로 자리 잡은 크리스 브라이언트, 화려하고 재기 넘치는 플레이로 이목을 끈 하비에르 바에즈, 물 샐 틈 없는 수비를 선보인 애디슨 러셀 같은 선수들이 모두 야수진을 이끈 자체생산 코어들이었다. 투수진에서도 카일 헨드릭스, 제이크 아리에타, 헥터 론돈, 칼 에드워즈 주니어 등의 5년간 모아온 재능들이 알맞은 타이밍에 제대로 터져주었다.
클럽하우스의 분위기를 확실하게 살려 놓은 조 매든 감독과, 정신적 지주로서 커리어의 마지막을 아름답게 장식한 백업 포수 데이빗 로스까지. 2016 시즌의 컵스는 21세기의 프로 스포츠에서 아주 드물게 마주칠 수 있는, 아름다운 교향곡과도 같았다.
마무리
기나긴 대서사시에도 이제 마침표가 찍혔다. 하지만 팀은 여전히 내년을 향한 준비로 분주하다. 우선은 이런저런 형태의 전력 손실들이 이어지고 있다. 먼저, 선발투수 제이슨 해멀이 퀄리파잉 오퍼 없이 FA 시장으로 나섰다. 비즈니스 면에서 보면 퀄리파잉 오퍼를 제시해서 이적 시의 드래프트 지명권을 확보하는 편이 합리적이었지만, 컵스는 그동안의 공적을 높이 사서 해멀의 다음 계약을 보다 수월하게 해주는 길을 선택했다. 역대 최초의 월드시리즈 7차전 리드오프 홈런을 때려낸 덱스터 파울러는 지구 라이벌인 세인트루이스의 일원이 되었다. 마무리 아롤디스 채프먼은 짧았던 반지 원정대 여정을 마치고 다시 뉴욕 양키스의 품에 안겼다.
공백이 발생한 선발과 마무리 자리에는 내부 자원을 활용하여 대안을 마련하는 중이다. 5선발 자리에는 중간계투로 수고해주었던 마이크 몽고메리가 테스트를 받을 예정이다. 차기 마무리로는 웨이드 데이비스가 활약해줄 것이다. 캔자스시티의 수호신이었던 데이비스는 이번 오프시즌, 두터운 외야 탓에 충분한 기회를 받지 못했던 유망주 호르헤 솔레어와 트레이드되어 컵스로 건너 왔다. 한편, 파울러가 빠져나간 중견수 쪽의 계획은 아직 확실하지 않다.
약간의 전력 이탈에도 불구하고, 컵스는 내년에도 막강한 전력으로 또 한 번의 우승에 도전한다. 젊은 나이의 우승 팀인 만큼 당연한 수순이다. 하지만 내년 시즌이 어떤 결과로 마무리되든, 올해만큼 뜻 깊은 해가 되기는 어려울 듯하다. 컵스의 팬들은 2016년에 이미 꿈꿔왔던 동화 속의 해피 엔딩을 맞이했기 때문이다.
마침내.
기록 출처: Baseball-Reference, Fangraphs
(일러스트 = 야구공작소 황규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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