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마다의 방식으로 (사진=Flickr Keith Allison, CC BY SA 2.0)
[야구공작소 김준업] “엊그제 말야, 선수 위에 팀이 존재한다는 말을 들었어. 어떻게 생각해?”
김 부장이 던진 화두는 한 시간째 식을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박 과장이 “네, 유명한 말이죠. 맞는 말이고요.”라며 고개를 끄덕이지만 않았다면, 구 팀장이 “선수가 없으면 팀도 없는데요?”라고 반박만 안 했더라면 지금쯤 직원들은 길 건너 유명한 고깃집에서 젓가락을 들고 있었을 텐데. 이 대리는 잠시 회의실을 빠져나와 전화를 걸었다. 어렵게 잡은 예약을 미루면서 연신 죄송하다며 사과했다. 부끄럽고 미안한 일은 늘 막내 몫이다.
이곳 직원들은 모두 야구팬이다. 입사 후 처음 참석한 회의에서 이 대리는 야구 이야기가 나오자마자 괜히 신나서 응원팀을 밝혔다. 권 과장은 흥미롭다는 표정으로 “금지약물을 복용한 선수를 응원하는 것은 비난받을 일일까?”라고 물었다. 이 대리는 소신껏 대답했다. 권 과장은 빙그레 웃었고 그날 오후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한 잔 사다 줬다. 답변이 마음에 들었나 보다. 입사 1년 만에 막내를 탈출하게 된 김 대리는 ‘할 말 안 할 말 구분 못 하는 애가 왔네. ’라며 미간을 찌푸리며 중얼거렸다.
그들은 회의 시간을 야구 이야기로 낭비하는 법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대개 타협점을 찾기 힘든 피곤한 소모전이 이어졌다. 그래도 간혹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주제로 논쟁이 썩 괜찮게 그려질 때가 있긴 했다. 그럴 때 이 대리는 집중 안 하고 낙서하는 척하며 몰래 메모를 했다.
오늘도 바로 그런 날이었다. 자리로 돌아와 조금 더 대화를 지켜보던 이 대리는 다시 회의실을 나서 한 번 더 전화를 걸었다. 예약은 취소됐다.
구 팀장은 어떤가요?
“팀이 선수보다 우선인가?”
오늘의 회의 주제는 구 팀장을 자극하기에 충분했다. 참아온 울분을 모조리 끄집어내어 그동안 자신을 놀렸던 동료들에게 퍼붓고 있었다.
수년 전, 오랜 기간 응원한 선수 A가 메이저리그의 K 구단에 입단한다는 소식을 들은 구 팀장은 크게 낙담했다. 다시는 A를 한국에서 볼 수 없다는 것이 슬펐다. 그를 잡지 않은 응원팀이 원망스러웠다. TV에서는 A가 기자들 앞에서 당차게 포부를 밝히고 있었다. 구 팀장은 나직이 읊조렸다.
“하, 남의 속도 모르고.”
그래도 A의 자신 있는 인터뷰를 보니 야구 선수라면 누구나 뛰길 원한다는 꿈의 무대에서 어디까지 해낼 수 있을지 궁금했다. 구 팀장의 실망은 어느새 A가 미국에서도 사랑받는 선수가 되었으면 하는 기대로 바뀌었다. 3월 초가 되었고 스포츠 채널에서는 메이저리그 스프링 트레이닝을 중계했다. 지구 반대편에서 입고 있는 유니폼은 낯설었다. 좀처럼 안타를 만들어내지 못하는 A의 모습을 보니 더 낯설었다. 구 팀장이 알던 A는 거기 없었다.
본 실력이 있는 선수니 시즌에 돌입하면 잘할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현지 소식을 전하는 기사는 구 팀장이 예상하지 못했던 내용을 담고 있었다. 참을성 없는 단장이 A를 마이너리그에 보내려고 추진 중이라고 했다. 한술 더 떠서 아예 상호 협의로 계약을 해지해 한국에 돌려보낼 수도 있다는 기사도 나왔다. 화가 났다. 겨우 저런 대접을 받을 선수가 아닌데.
마이너리그 강등 거부권을 행사하고 메이저리그에 남은 A는 개막전에서 홈 관중들에게 야유를 받고 있었다. 구 팀장이 기대한 장면은 그곳에 없었다. 속상했다. 선수 본인은 오죽할까. 감독은 인터뷰를 통해 A를 믿는다고 했지만 실제로 경기에 꾸준히 출전하는 건 그리 대단해 보이지도 않았던 선수 B였다.
A를 응원하는 방법은 몇 달 전과 달라졌다. 아침에 일어나면 라인업부터 확인했다. A가 없으면 대신 출전한 경쟁 선수의 이름을 확인했다. 경기가 끝나면 A의 경쟁 선수들의 기사가 앞다투어 올라왔다. 경쟁 선수들이 잘하면 속상했다. 못하면 괜히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그렇다고 A가 선발 출장을 해도 야구를 즐겁게 볼 수 있는 건 아니었다. 새벽 경기를 챙겨보려니 그날 일정에 차질이 있었고, 오전 경기는 업무 시간과 겹쳐 볼 수가 없었다. 출근하자마자 스마트폰으로 문자 중계를 켜놓은 채 A의 타석이 돌아오기만을 기다렸다. 그러나 출루 소식이 들려도 기쁘기보다 눈으로 직접 볼 수 없으니 답답했고, 아웃이 된 후면 공수교대 때 교체될지 몰라 노심초사했다. 한국의 A를 응원하는 것과 미국의 A를 응원하는 건 다른 차원의 일이었다.
그래도 이런 고행이 허사는 아니었는지 A는 짧지 않은 진통 끝에 결국 미국 야구에 적응하고 성적으로 자신의 가치를 증명했다. 해낼 줄 알았다. 시즌 막판에는 소속팀의 가을야구 진출에도 일조했다. 개막전에 터진 홈 관중들의 야유는 반년 만에 환호성으로 바뀌어 있었다. 구 팀장은 괜히 우쭐해졌다. 이게 바로 A란 말이다.
그러나 다음 시즌이 되자마자 A는 경기에서 지워졌다. 구단에서 새로 키우는 신인에게 자리를 내줬다. A에 대한 애정은 식지 않았지만 들려오는 소식은 점점 줄어들고 있었다. 그 해는 A로 야구에 입문한 구 팀장에게 가장 힘든 시즌이 되었다.
구 팀장은 어느덧 한국 야구에 집중하고 있는 자신이 미웠다. 그 누구도 대신할 수 없을 것 같았던 A의 빈자리였지만 혜성같이 등장한 신인 L의 활약으로 그 자리는 채워지고 있었다. L의 플레이에 빠져드는 자신을 볼 때마다 구 팀장은 A를 배신하고 있다는 죄책감에 사로잡혔다.
회사에서는 은연중에 A에 대한 비아냥이 여기저기서 나왔다. 아무리 농담이라지만 기분이 좋을 리 없었다. 동료들은 A를 비하하는 별명을 일부러 소리 내 부르며 팬심을 건드렸다. 예민하게 유난 떨지 말란 소리가 듣기 싫어 내색하지 않았지만 속은 타들어 갔다.
동료들을 향해 그동안 쌓인 서운함을 표현하던 구 팀장의 눈에 문득 두 사람이 들어왔다. 한창 A를 놀리는 분위기가 회사에 퍼져있을 때 동참하지 않았던 동료, 한 대리와 이 대리였다.
한 대리는 이렇던데
한 대리는 구 팀장과 같은 KBO 리그 팀을 응원했지만 둘은 좀 달랐다. A가 결장한 다음 날 회의 주제는 뻔했다. 구 팀장은 프랜차이즈 스타 A의 기분을 염려했지만 한 대리는 구단의 플랜을 이해하고 시즌을 길게 보려고 했다. 야구를 보는 관점은 서로 달랐고, 구 팀장은 구단 편을 드는 한 대리가 괜히 미웠다.
한 대리는 20여 년 전, 당시 신인왕을 수상한 R의 9회말 역전 만루홈런을 본 후로 야구에 빠졌다. R의 선수 경력과 한 대리의 응원 구력은 오랜 기간 함께였다.
5년쯤 전이었을까. 프랜차이즈 스타 R의 은퇴를 종용하는 구단과 은퇴를 거부하는 R의 싸움은 야구계의 큰 쟁점이 되었다. 야구에 입문한 지 얼마 되지 않은 팬들에게 R은 재능있는 신인 선수들의 앞길을 막는 애물단지였다. 심지어 한 대리와 비슷한 연배의 팬들도 R을 ‘고인 물’ 취급하며 비난하기 바빴다.
한 번도 온라인 커뮤니티에서 누군가와 싸운 적이 없었다. 그 시기를 제외하고는. R을 위해 분노하고 욕하며 논쟁에 참여했다. 외로운 싸움 끝에 남은 것은 구단이 예의상 만들어준 초라한 은퇴식뿐이었다. 오랫동안 수시로 찾았던 야구장이었지만, 살면서 처음으로 그렇게 서럽게 우는 장소가 될 줄은 몰랐다. 그날 이후 한 대리는 선수에 대한 감정을 놓았다.
한 대리는 프런트와 감독의 의견과 선택에 다시는 의문을 품지 않았다. 부당해 보이는 구단의 선수 처우에 대해서도 화내지 않고 이해하려고 했다. 라인업을 확인한 한 대리는 어제 3안타를 친 A가 오늘 빠지는 이유가 딱히 궁금하지 않았다. 이유가 있겠지.
15년을 응원한 선수를 떠나보내면서 느낀 것이 있었다. 그 시절 내가 응원했던 선수들은 이제 없다. 앞으로도 수많은 선수가 야구장에, 팬의 마음에 날아들었다가 여러 가지 이유로 떠날 것이다. 결국 남는 것은 선수가 아니라 구단이다.
한 대리가 구 팀장에게 넌지시 말했다.
“야구를 팀 단위로 보는 게 어때요?”
“왜 감독 편을 들고 그래? 경기는 선수가 하는 거야. 선수를 소모품으로 생각하는 구단을 어떻게 이해해?”
한 대리는 이런 대화가 그리 피곤하지 않았다. 구 팀장의 그런 팬심과 에너지가 부러웠다. 구 팀장이 내뿜는 열정에 저도 모르게 ‘나도 해봐서 압니다.’라고 말할 뻔했다. 과거의 추억은 쉽게 꺼낼 수 없게 마음속 깊은 곳에 숨겨두었지만 완전히 지운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구 팀장에게 저 말을 내뱉는 순간 그 시절의 열정의 기억이 사라질 것만 같았다. 언젠가 구 팀장이 물었다.
“한 대리도 메이저리그 보지? A 좋아했으면서 왜 A 이야기는 안해?”
“흠, 잘하겠죠 뭐.”
한 대리는 시큰둥하게 마음에 없는 말을 했다. A가 좋은 선수라는 건 오래 봐와서 알았지만 메이저리그에서 통할 거라는 생각은 딱히 들지 않았다. 선수에게 감정 이입을 못 하는 이유도 있었지만, 사실 A에 관심을 두지 않은 건 한 대리의 메이저리그 응원팀이 A가 진출한 K팀의 지구 라이벌이라는 점이 더 컸다. A가 잘하는 것이 내 응원팀에게는 결코 도움이 되는 일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국민적인 인기를 얻고 있는 선발 투수 P가 종종 한 대리의 응원팀과 붙는 경우가 있었다. 팬 카페에는 ‘P가 승패 없이 퀄리티 스타트를 기록하고, 최종 승리는 우리 팀이 거뒀으면 좋겠네요.’라는 이야기가 올라오곤 했다. 한 대리는 그 의견에 동의할 수 없었다. 우리 타자들이 좋은 성적을 기록해야지 상대 선발 투수의 성적을 왜 걱정해야 하는가.
A의 미국 진출 후 구 팀장이 스트레스를 많이 받은 건 알지만, 엄연히 따지면 그에게 공감하는 이들이 회사에 이미 많았다. 농담조로 A를 비하하던 동료들의 마음 한구석에는, 한국인을 무시하는 구단 K에 대한 분노가 이미 깊게 뿌리박혀 있었다. 각종 커뮤니티 게시판과 포털 기사 댓글만 보더라도 구 팀장이 겪고 있는 증상은 한국 야구팬들 사이에 널리 퍼진 일종의 집단 스트레스였다. 한 대리는 지금 울먹이며 감정을 조절하지 못하는 구 팀장보다는 오늘도 조용히 메모만 하는 이 대리 쪽이 더 신경이 쓰였다.
이 대리는 이렇더라
이 대리는 구 팀장의 이런 모습을 처음 봤지만 묘한 기시감이 들었다. 온라인에서 많이 봤던 풍경이었기 때문이었을까. 이 대리가 이곳에 입사했을 때 K는 이미 국민적인 혐오를 받는 매국 구단이었다. 이 대리는 자연스레 한국 프로야구 응원팀만 밝혔다. 회사에서 이 대리는 메이저리그에는 별로 관심이 없는 친구였다.
얼마 전이었다. 이 대리에게 검토를 맡겨 놓은 보고서가 떠오른 한 대리는 진행 상황을 확인하러 자리를 찾아갔다. 이 대리는 자리에 없었다. 조용히 자기 자리로 돌아오려던 한 대리의 눈에 모니터 화면이 들어왔다. 유명 메이저리그 커뮤니티에 글을 작성하던 중 자리를 잠시 비운 것 같았다.
작성자의 닉네임을 확인한 한 대리는 적잖이 놀랐다. 커뮤니티에서 활동하는 팬이라면 모를 수가 없는, 2년간 사라졌다가 복귀한 지 얼마 안 된 유명한 K의 팬이었다. 메이저리그를 안 본다고 한 이유가 이거였구나. 한 대리는 서둘러 자리를 떴고 그 후로도 일부러 모른 척했다.
10년쯤 전이었을까. 우연히 스포츠 뉴스에서 엄청난 수비를 하는 2루수를 본 이 대리는 ‘메이저리그는 굉장한 곳이구나.’하며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본격적으로 응원팀을 정하고 시즌을 지켜보고 싶었다. 그러나 막상 입문하려니 정보가 너무 부족했고 주변에 메이저리그를 보는 이도 없었다. 그는 메이저리그 커뮤니티와 팬 카페에서 맨땅에 헤딩하며 정보를 모았다. 포털 사이트에 연재됐던 유명 메이저리그 웹툰 몇 년치를 차근차근 정독하며 머리에 새겼다.
처음 본 순간 뇌리에 꽂힌 그 2루수가 K 소속 선수라는 걸 알게 된 건 메이저리그를 보고 반년쯤 지난 후였다. 당시 K는 약팀이었다. 그 2루수도 곧 은퇴한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이 대리는 메이저리그에 관심을 가지게 해 준 그 선수에게 고마웠고, 장고 끝에 K팀을 응원하기로 했다. 그 후로 이 대리는 짧지 않은 시간 동안 커뮤니티에서 활동했다.
K가 A를 관찰하기 위해 한국에 스카우트를 파견했다는 이야기를 들을 때만 해도 ‘에이 설마’ 싶었지만 기대감은 커졌다. 우타자로 도배된 라인업을 생각하면 좌타자 A는 이상적인 선수였다. 입단 공식 보도가 나오자마자 이 대리는 너무 기뻐 커뮤니티에 접속했다. A가 진출하는 K가 어떤 팀인지 알리고 싶어 수시로 게시글을 올렸다. 비인기 팀을 아는 사람이 늘어난다는 것 자체가 너무 좋았다. 개막하면 K 소속 선수들 이야기와 명장이라 불리는 감독의 용병술이 입에 오르내리겠지. 상상만 해도 신이 났다.
그러나 이 대리의 기대는 보기 좋게 빗나갔다.
오랜 기간 동안 이 대리는 메이저리그 구단들이 선수에게 부당한 대우를 하는 것을 목격했다. K는 굳이 따지자면 다른 구단에 비해 그 정도가 심한 편이었다. A에게 마이너리그 강등을 권할 당시를 다시 떠올려보면 기존에 이 팀을 응원해온 팬들에게는 더 심각한 일이 벌어진 상태였다.
K에는 몇 년 동안 4선발 정도의 자리에서 제 몫을 해준 투수 M이 있었다. 서비스 타임이 점점 차면서 M의 연봉이 5백만 달러를 넘어가자, 구단은 스프링 트레이닝에서 무실점 투구를 펼친 M을 바로 다음 날 웨이버 공시한 후 마이너리그 계약을 유도했다. 사흘 이내 다른 팀에서 M을 데려가지 않으면 현재 연봉의 5분의 1 수준으로 깎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규정상 문제는 없지만 실제로 이렇게 하는 팀은 드물었다. K는 이를 실행하는 몇 안 되는 팀 중 하나였다.
M은 다른 구단과 사흘 만에 마이너리그 계약을 맺고 이적하게 됐다. K는 처음 의도대로 선수 연봉을 5분의 1로 줄였지만 정작 해당 선수는 다른 팀으로 가버리면서 계획이 틀어졌다. K는 연봉은 깎았지만 K의 팬들은 아끼던 선수가 다른 팀으로 이적하자마자 커리어 하이를 기록하는 것을 허무하게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A의 마이너리그 강등에 대한 기사가 터진 것은 이 즈음이었다.
이 대리는 K를 응원한 이래 최악의 개막전을 맞이했다.
속상한 기분이 풀릴 틈도 없이 이 대리는 한국 야구팬들이 응원팀을 비난하는 걸 지켜보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상도덕이 없는 구단’이라는 표현은 애교에 불과했다. 한국의 야구팬들은 구단을 욕하고 감독을 비난했으며 A의 경쟁 선수를 저주하고 팀의 패배를 바랐다. A가 한국으로 돌아온 이후로도 비난은 식지 않았다.
A가 잘하면 ‘이런 선수를 박대한 팀’으로 욕을 먹었다. A가 못하면 ‘기회를 주지 않아 선수를 망쳐놓은 구단’이라는 비난을 받았다. A가 다른 팀으로 이적했을 때는 ‘실컷 푸대접하더니 결국 헌신짝처럼 내다 버린 악덕 구단’이 되었다. A가 이적팀에서 못한 이유는 ‘선수 기를 다 죽여놓은 구단’ 탓이었다. A가 한국으로 돌아와 맹활약하고 있는 순간에도 K는 여전히 저주받아 없어져야 마땅한 구단으로 남아있다.
이 대리는 스스로 K팀 팬이라고 밝히는 것을 그만두었다. 응원팀에 대한 비난이 수시로 쏟아지던 정든 커뮤니티는 끝내 탈퇴했다. 그들을 원망하지 않았다. 할 이유도 없었고. 그저, 좋아하는 팀이 국민적으로 욕을 먹는 게 너무 힘들고 아팠다. 이 대리는 다시는 팬심을 드러내지 않았다. K에 다가갈 수 있는 창구를 굳게 걸어 잠갔다.
이 대리도 안다. 잘못한 건 구단뿐이다. K의 소속 선수가 된 이상 A도 이 대리의 응원 대상이다. A가 잘못한 게 무엇이 있겠는가. A를 응원한 팬들의 분노도 당연하다. 돌이켜보면 그저 운이 정말 나빴다는 생각뿐이다.
늘 하던 대로거나 조금은 달라지거나
모든 걸 토해낸 구 팀장은 홀가분하다. 선수를 응원하는 다양한 방법을 알게 되었다. 한국으로 복귀한 A는 다른 팀으로 갔고, 구 팀장은 응원할 새 선수를 찾았다. 선수가 영원히 팀에 머물지 않는다는 것을 배웠고 한 대리의 말이 이제 귀에 조금씩 들리기 시작했다. 그래도 고작 그런 걸로 새로 애정을 쏟는 선수에 대한 팬심이 옅어지지는 않을 것이라 굳게 다짐해본다.
한 대리는 늘 그랬듯 선수에게 섣불리 감정이입을 하지 않을 것이다. 긴 시즌을 스트레스 없이 보내는 지금의 방법을 고수하겠지. 구 팀장이 화를 낼 때마다 받아주고 타이를 것이고. 그러나 한 대리는 그 과정이 싫진 않다. 구 팀장의 에너지는 분명 자극이 된다. 잊고 있었던 그 시절의 야구장 내음이 와서 얼굴에 닿는다. 모든 선수가 다 좋을 수는 없다. 구 팀장이 새로 응원하는 선수에게서 한 대리는 어느새 R을 떠올리고 있다. 사실 둘의 생각은 크게 다르지 않은 것일까.
얼마 전부터 이 대리는 커뮤니티에 재가입하고 글을 쓰기 시작했다. 속 쓰린 악플이 달리지만 반가운 이들의 응원 댓글도 보인다. 그리 길지 않은 시간 동안 커뮤니티를 떠난 팬들이 많은 것 같다. 오래전 메이저리그에 빠졌던 그 시절이 아니다. 한국의 업무 시간대에 경기하는 메이저리그를 굳이 나중에 따로 챙겨보기에는, 손쉽게 보고 즐길 콘텐츠가 너무나 많다. 닫혔던 이 대리의 창구는 열렸지만 대기 중인 손님은 없다. 오늘도 이 대리는 묵묵히 K팀의 정보를 찾아 얼마 남지 않은 소수의 팬들과 공유한다.
선뜻 동의할 수는 없지만
구 팀장은 한 대리의 말을 이해하기 시작했다. 그의 마음을 조금은 알 것도 같다. 가끔이지만 그런 응원 방식이 꽤 합리적으로 보일 때도 있다. 아직 동의할 정도로 마음이 동하진 않지만.
구 팀장이 걷는 길을 오래전 지나온 한 대리는 고민 끝에 그 길에서 빠져나왔다. 여전히 구 팀장의 방식은 옆에서 보기에 무척 힘들어 보인다. 그래서 동의하지 않지만, 그러나 그 열정을 응원한다.
한 대리는 이 대리가 처한 상황과 겪은 일들을 이해하고 그의 방식을 좋아한다. 이 마음을 먼저 표현하고 위로를 해야 하는지 한 대리는 오늘도 고민한다. 모니터 너머 다시 나타난 이 대리의 닉네임을 응시하면서.
이 대리는 한 대리의 응원 방식을 잘 안다. 본인도 K팀을 그렇게 대하고 있으니까. 그리고 그의 배려에 늘 감사하고 있다. 언젠가 응원팀을 밝히고 식사 대접이라도 해야지.
이 대리는 한 대리의 응원 방식을 잘 안다. 이 대리도 한 대리처럼 KBO 리그의 응원하는 팀과 K팀을 그렇게 대하고 있으니까.
이 대리는 구 팀장의 팬심을 이해한다. 한국 팬들은 메이저리그에 진출한 한국 출신 선수를 저런 관점으로 응원할 것이다. 그렇지만 이 대리에겐 다른 팀에 팔려간 M, 부당한 대우를 받은 A, 대신 자리를 차지한 B 모두 K의 선수였다. 팀 승리를 위해 모인 자원들이다. 선수마다 애정을 쏟는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특정 선수를 응원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 같다.
구 팀장은 K를 응원하는 걸 숨긴 이 대리의 사정을 모른다. 그의 사정을 알고 나면 어떻게 될지도 아무도 모른다. 다만 터놓고 대화를 나누다 보면 동의까진 못해도 이해는 하지 않을까 기대를 해본다. 팬심이 가리키는 곳은 서로 그다지 다르지 않으니까.
각자의 해답을 품고, 야구는 늘 우리네 삶에 닿아있다. 선뜻 동의할 수는 없지만 조금은 알 수 있는 서로의 해답은, 마음속 한편에 켜켜이 쌓여간다.
회의는 마무리되고 각자 회사를 나선다. 어느덧 많이 차가워진 바깥 공기에 헛기침이 나온다. 오늘처럼 야구가 없는 날 퇴근길은 심심하다. 내일 열릴 경기를 생각하면 그저 설레지만, 이제 곧 끝날 시즌에 매 경기가 소중하다. 야구장 조명이 꺼지면 오늘의 심심한 저녁이 한동안 이어진다. 회의는 당분간 제 기능을 하게 될 것이다. 각자의 팬심을 동면에 맡기고서.
에디터=야구공작소 오연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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