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일러스트 = 야구공작소 안희조 >
지난 8월 25일, 수원 KT위즈파크에서 양의지의 타구가 왼쪽 담장을 넘어갔다. 개인 통산 300번째 홈런이었다. KBO리그 역대 17번째이자, 포수로는 세 번째로 밟은 고지였다.
역사적인 공은 외야 관중석에 떨어졌다. 공을 잡은 두산 팬은 이를 구단에 건넸다. 두산은 감사의 뜻으로 양의지와 정수빈, 박준순의 사인볼을 준비했다. 그런데 양의지는 그것만으로 부족하다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자신의 배트와 배팅 장갑에도 직접 사인해 선물에 더했다. “선물을 더 드리고 싶다.”라는 게 그의 뜻이었다.
팬은 자신에게 날아온 특별한 공을 돌려줬고, 양의지는 자신의 특별한 물건으로 그 마음에 답했다. 따뜻한 장면이었다.
그런데 여기서 문득 ‘돌려줬다’라는 표현에 눈길이 갔다. ‘돌려주다’는 받은 것을 원래의 주인에게 다시 주는 것을 뜻한다. 그렇다면 우리가 기록구를 선수에게 ‘돌려줬다’고 말할 때는, 자연스럽게 그 공을 선수의 것으로 생각하고 있는 셈이다.
< 표준국어대사전 ‘돌려주다’ 의미 >
하지만 홈런공의 이야기는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홈런을 친 사람은 선수이고 기록도 선수의 이름에 남는다. 그러나 담장을 넘어 관중석에 떨어진 공을 실제로 손에 넣는 사람은 팬이다. 그리고 그 순간부터 하나의 공에는 서로 다른 의미가 생긴다.
선수에게는 자신의 커리어를 증명하는 기록이고, 팬에게는 수만 명 가운데 자신에게 찾아온 우연과 추억이다. 때로는 거기에 수천만 원, 수억 원의 시장가치까지 붙는다.
공의 주인이 누구인지보다 더 흥미로운 것은, 어쩌면 그 공을 누가 어떤 가치로 바라보느냐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묻게 된다. 기록은 선수의 것이라면, 그 기록이 담긴 공의 가치는 누구의 것일까.
< 300호 홈런공을 습득한 두산 팬과 양의지 >
야구공 하나에 1억 원이 붙었다
한국 야구에서 기록구의 경제적 가치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가 이승엽의 홈런공이다.
2003년 이승엽의 개인 통산 300호 홈런공은 팬의 손을 거쳐 한 기업인에게 1억2천만 원에 팔렸다. 기업인은 이후 이 공을 삼성 구단에 기증했다. 반면 2016년 이승엽의 한일 통산 600호 홈런공은 팬이 보관하다 6년 뒤 경매에서 1억5천만 원에 낙찰됐다.
< 세계 최연소 300호 홈런 볼 인증서 >
두 공의 차이는 공 자체가 아니라, 그 공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선택에 있었다. 기록은 두 공 모두를 세상에 하나뿐인 물건으로 만들었다. 하지만 누군가는 그것을 보존해야 할 역사로 보았고, 누군가는 거래할 수 있는 자산으로 보았다.
평범한 야구공이었다면 몇 만 원이면 살 수 있었을 물건이다. 그러나 기록이 새겨지는 순간 희소성이 생기고, 그 희소성에는 때로 억대의 가격이 붙는다. 기록구가 추억이나 기념품을 넘어 실제 경제적 가치를 가진 자산이 될 수 있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선수와 구단이 그 공을 원할 때는 어떨까. 팬의 손에 들어간 기록구의 가치를 이제는 구단 역시 외면하지 않는다.
기록구를 건넨 팬에게 무엇으로 답할 것인가
2024년 김도영이 KBO리그 최연소이자 최소 경기 30홈런-30도루를 달성했을 때도 홈런공은 관중석으로 향했다.
공을 잡은 KIA 팬은 구단에 공을 건네며 사인만 받아달라고 부탁했다. 하지만 KIA는 사인볼과 사인배트에 더해 원하는 홈경기를 볼 수 있는 스카이박스 좌석까지 준비했다.
< 2024년 서울 고척스카이돔, 5회초 김도영의 30호 홈런 >
최정의 500홈런을 앞둔 SSG는 한 단계 더 나아갔다. 기록구가 나오기도 전에 홈런공을 기증하는 팬에게 제공할 답례를 미리 발표했다.
과거에는 기록구가 나온 뒤 선수와 구단, 팬이 어떻게 할지를 고민했다면 이제는 구단이 먼저 팬의 선택에 대한 답을 준비한다.
< 2025년, SSG 최정의 개인 통산 500호 홈런볼 >
두 사례에서 눈에 띄는 것은 구단이 기록구를 건네는 일을 더 이상 당연한 ‘반환’으로만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팬이 내놓는 것은 평범한 야구공 하나가 아니다. 기록이 더해진 순간 경제적 가치가 생기고, 그 공을 잡은 팬에게는 다시 얻기 어려운 추억도 함께 남는다.
그래서 기록구에 대한 답례를 단순히 ‘얼마짜리인가’의 문제로만 볼 수는 없다. 경매 가격이나 과거 거래 사례는 경제적 가치를 가늠하는 하나의 기준이 될 수 있다. 하지만 팬이 그 공에 부여하는 의미까지 금액으로 정해둘 수는 없다.
그렇다면 구단이 해야 할 일은 기록구의 ‘정가’를 정하는 것이 아니라, 팬이 가진 가치와 선택을 인정하고 그에 맞는 방식으로 감사를 표현하는 것에 가까울 것이다. 최정의 사례처럼 답례를 미리 공개하는 방식도 그런 의미에서는 하나의 방법이 될 수 있다.
공이 재산이 되는 순간
기록구의 가치를 가격으로만 설명할 수는 없다. 그렇다고 그 공에 붙은 경제적 가치를 외면할 수도 없다. 때로는 그 가치가 너무 커져, 기록구가 추억이나 기념품을 넘어 실제 재산이 되기도 한다.
2024년 오타니 쇼헤이는 메이저리그 최초로 한 시즌 50홈런-50도루를 달성했다. 역사적인 50번째 홈런공은 이후 경매에서 439만 2천 달러에 낙찰됐다. 스포츠 경기에서 사용된 공 가운데 역대 최고가였다.
< 2024년, 오타니의 50호 홈런공 낙찰가 >
수십억 원의 가격이 붙으면서 이 공을 누가 먼저 차지했는지를 둘러싼 소송까지 벌어졌다.
< 오타니 홈런공 소유권 소송 기사 >
비슷한 다툼은 2001년 배리 본즈의 시즌 73호 홈런공에서도 벌어졌다. 한 팬의 글러브에 들어갔던 공이 관중들의 충돌 속에서 빠져나왔고, 다른 팬이 바닥에 떨어진 공을 확보하면서 두 사람은 법정에서 소유권을 다퉜다. 법원은 결국 어느 한쪽의 단독 소유를 인정하지 않고 공을 매각해 수익을 나누도록 했다.
< 배리 본즈의 시즌 73호 홈런공 소유권을 두고 벌어진 ‘Popov v. Hayashi’ 사건 >
타자가 친 공 하나를 두고 ‘잡았다’는 것이 무엇인지, 어느 순간부터 ‘가졌다’고 할 수 있는지까지 법원이 판단해야 했다.
평범한 야구공이었다면 벌어지지 않았을 일이다. 기록이 공을 특별하게 만들었고, 그 특별함에 거대한 가격이 붙자 홈런공은 실제 재산권의 대상이 됐다.
이런 사례들은 기록구를 원하는 선수와 구단이 그 공의 경제적 가치를 가볍게 볼 수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팬에게 공을 건네달라고 하는 것이 때로는 상당한 가치를 지닌 자산을 포기해달라고 요청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법원이 정할 수 있는 것은 누가 그 공에 대한 권리를 갖느냐까지다. 그 공이 선수에게 얼마나 소중한지, 팬에게 어떤 기억으로 남는지까지 가격이나 판결이 정해줄 수는 없다.
간직해도 괜찮다는 선수
2022년 앨버트 푸홀스가 메이저리그 역사상 네 번째로 통산 700홈런을 달성했을 때, 그 공을 잡은 팬은 공을 가지고 경기장을 떠났다.
선수에게는 야구 인생에서 단 하나뿐인 700번째 홈런공이었다. 하지만 푸홀스는 “기념품은 팬들을 위한 것”이라며 팬이 공을 갖고 싶다면 문제가 없다고 했다. 공을 자신에게 건넨다면 고맙겠지만 팬이 간직하더라도 개의치 않는다는 뜻이었다.
< 2022년 다저스타디움, 4회초 푸홀스의 700호 홈런 >
푸홀스의 말은 앞선 사례들과는 조금 다른 방식으로 기록구의 가치를 바라보게 한다. 관중석으로 넘어간 공에는 선수의 기록뿐 아니라 그 공을 잡은 팬의 기억도 함께 쌓일 수 있다.
그래서 푸홀스는 그 공을 반드시 자신이 가져야 할 물건으로 보지 않았다. 선수에게는 기록이 남았고, 팬에게는 공이 남았다. 기록구를 선수에게 건네는 일이 아름다운 선택이라면, 팬이 간직하는 일 역시 존중받을 수 있다고 본 것이다.
가격은 공의 경제적 가치를 보여줄 수 있다. 하지만 그 공이 누구에게 어떤 의미인지까지 정해주지는 못한다. 수십억 원의 가격이 붙은 공도 누군가에게는 자산이고,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다시 돌아오지 않을 하루의 기억일 수 있다.
그래서 기록구를 어떻게 할 것인가는 결국 그 공을 손에 넣은 팬의 선택으로 남는다.
가격과 가치 사이
기록구에는 분명 가격이 있다. 과거의 거래와 경매는 그 공이 시장에서 어느 정도의 경제적 가치를 갖는지 보여준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기록구의 가치를 모두 설명할 수는 없다. 팬에게는 돈으로 바꿀 수 있는 자산이면서, 다시 얻기 어려운 하루의 기억이다.
그래서 선수와 구단이 그 공을 원한다면 ‘돌려달라’는 요구보다 하나의 제안을 건네는 것이 먼저라고 생각한다. 과거의 거래 가격은 답례를 고민하는 기준이 될 수 있고, 팬이 무엇을 원하는지도 또 하나의 기준이 될 수 있다. 중요한 것은 얼마가 정확한 값인지를 정하는 것보다 팬이 무엇을 내어주는지를 먼저 인정하는 일이다.
대기록을 앞두고 구단이 답례 방안을 미리 공개하는 것도 그런 의미에서는 좋은 방법이다. 다만 그것이 기록구의 정해진 가격표가 되어서는 안 된다. 팬이 공을 간직하기로 했다면 그 선택 역시 존중받아야 한다. 반대로 팬이 선수에게 공을 건넨다면 그 선택에는 의무가 아닌 마음이 남는다.
지난 8월 25일, 양의지의 300번째 홈런공을 잡은 팬은 그 공을 건넸다. 양의지는 팬에게 배트와 배팅장갑을 건넸다. 어느 쪽도 상대가 가진 물건의 시장가격을 계산해 맞바꾼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팬의 손을 떠난 공은 양의지가 지나온 시간을 품고, 양의지의 손을 떠난 배트와 장갑에는 팬이 오래 기억할 그날의 이야기가 담겼다.
어쩌면 기록구의 가치는 이런 순간에 가장 선명해지는지도 모른다.
홈런공에는 가격을 매길 수 있다. 하지만 그 공을 돌려준 마음까지 가격으로 매길 수는 없다.
참조 = OSEN, 어린이동아, 연합뉴스, 동아일보, KBS, 조선일보, MLB, AP News
야구공작소 박태신 칼럼니스트
에디터 = 야구공작소 조광은, 박인이
일러스트 = 야구공작소 안희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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