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포가 된 다이아몬드
< 일러스트 = 야구공작소 이동헌 >
야구는 오늘날 쿠바를 대표하는 스포츠다. 쿠바 야구는 카스트로 집권 이후 올림픽 등 국제무대에서 좋은 성과를 거두며 사회주의 체제 정당성을 보여주는 상징으로 활용됐다.
하지만 쿠바 야구는 이미 카스트로 집권 이전부터 100년 가까운 역사가 있었다. 1860년대 미국에서 건너온 야구는 계급과 인종을 가리지 않는 스포츠였기 때문에, 그 결과 쿠바인들을 금세 사로잡았다.
더불어 미국에서와 달리 쿠바에서 야구는 단순한 오락에 그치지 않았다. 야구는 쿠바인들의 독립 의지와 정체성을 드러내는 수단이었기 때문이다.
이 글에서는 야구가 19세기 쿠바에 상륙한 뒤, 어떻게 쿠바인들의 정체성과 결합해 뿌리내렸는지 살펴보려 한다.
쿠바섬에 상륙한 미국의 스포츠
쿠바 야구 시작은 1864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미국에서 유학하던 네메시오 기요(Nemesio Guilló)가 야구 장비를 들고 아바나1로 돌아왔다. 그는 함께 유학한 친구, 그리고 형제와 같이 쿠바에 처음으로 야구를 소개했다.
이후 미국 유학 경험이 있던 크리오요2 청년들을 중심으로 야구는 점차 확산됐다. 1872년 아바나 베이스볼 클럽이 창단됐고 이듬해에는 마탄사스 베이스볼 클럽이 창단됐다. 두 팀은 1874년 팔마르 데 훈코 구장에서 쿠바 야구 역사상 첫 공식 경기를 치렀다.
1878년에는 알멘다레스 베이스볼 클럽이 창단됐고, 같은 해 주요 구단들이 리그 출범에 합의했다. 이는 훗날 쿠바 프로야구의 출발점이 됐다.

< 아바나 클럽과 마탄사스 클럽 시합이 열렸던 팔마르 데 훈코(Palamar de Junco)3 >
야구 열기는 프로리그를 넘어 쿠바 사회 전반으로 퍼지고 있었다. 1878년 산혼 협정(Pact of Zanjón)4 체결 후 미국으로 망명했던 쿠바인들이 고국으로 돌아왔다. 이들은 미국에서 접한 야구를 전파하며 인기를 확산시키는 역할을 했다.
이후 야구는 아바나를 넘어 섬 전역으로 빠르게 퍼져나갔다. 1870년대 후반부터 1890년대 초반 사이에는 200개가 넘는 ‘여름 클럽(clubes de verano)’5이 생겨났다.
그렇게 미국에서 건너온 야구는 귀환 이주민들의 확산 노력과 대중적 인기가 맞물리며 쿠바 사회에 뿌리를 내리기 시작했다.
야구를 확산시킨 설탕과 철도
야구가 전국적인 스포츠로 성장한 배경에는 설탕과 철도가 있었다.
19세기 쿠바는 세계적인 설탕 생산지였다. 특히 미국은 쿠바 설탕의 주요 수출 시장이었고 양국은 설탕 덕분에 긴밀한 경제 관계를 형성하고 있었다.
미국은 설탕을 운반하기 위해 철도 등 인프라를 쿠바에 지원했고 덕분에 쿠바 도시들은 점차 하나의 네트워크로 연결됐다. 철도는 처음에는 경제적 목적을 위해 만들어졌지만 이후 야구 확산에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
철도가 깔리자 야구팀들은 다른 도시로 원정 경기를 떠날 수 있었다. 관중들도 기차를 타고 경기를 보러 이동했다. 야구는 철길을 따라 섬 전역으로 퍼져나갔다.
대표적인 사례가 1888년 챔피언십 시리즈다. 당시 약 4,000명의 관중을 수송하기 위해 특별 열차 4대가 편성됐다. 이는 당시 야구 열기가 얼마나 뜨거웠는지 보여준다.
야구는 그렇게 설탕 산업이 만든 철길을 따라 쿠바 전역으로 퍼져나갔다.

< 19세기 쿠바 설탕 산업의 모습을 표현한 그림 >
정체성을 형성한 야구
야구는 스페인의 사상에 반대하는 하나의 형태였다. 야구를 한다는 것은 크리오요가 되는 것이었고, 크리오요가 되는 것은 쿠바인이 되는 것.
– 힐베르트 디히고(Gilbert Dihigo)6
하지만 19세기 쿠바 야구를 이해하는 핵심은 정체성이다.
19세기 후반 쿠바는 여전히 스페인의 식민 지배 아래 있었다. 당시 쿠바 사회에서는 크리오요(Criollo)와 페닌술라르(Peninsular)7사이 갈등이 깊어지고 있었다. 식민 당국을 장악한 페닌술라르들은 정치와 경제 전반에서 특권을 누리며 쿠바인들을 억압하고 있었다.
당시 쿠바 경제는 미국과 교역이 늘면서 빠르게 성장했다. 생활 수준 역시 점차 높아졌다. 하지만 식민 당국은 무역과 행정을 통제하며 기득권을 유지하려 했다.
이 상황에서 크리오요들은 식민 당국에 불만을 가졌고, 쿠바를 스페인에서 독립하려는 움직임까지 이어졌다. 야구는 그 과정에서 쿠바인들의 정체성을 형성하는 문화가 됐다.
식민 당국은 투우를 장려하며 문화 영역까지 쿠바를 스페인 문화에 종속시키려 했다. 하지만 크리오요들은 투우 대신 야구를 선택했다. 크리오요들에게 투우는 구시대적인 스페인 문화였다. 반면 야구는 현대적이고 교양 있는 미국 문화로 인식됐다.
야구를 선택한 이유가 단순히 미국에서 왔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투우를 거부하고 야구를 즐긴다는 것은 스페인 문화와 거리를 두겠다는 의미였다. 즉 야구는 “우리는 스페인인이 아니다“라는 문화적 선언의 상징이 됐다.
쿠바인들이 야구를 즐길수록 식민 당국은 야구를 경계했다. 야구가 스페인 통치에 위협이 된다고 봤기 때문이다.
1868년 10년 전쟁이 발발하자 스페인 당국은 야구를 반에스파냐적 활동으로 간주하고 금지령을 내렸다. 금지령은 1874년에 해제됐지만 당국의 경계는 계속됐다. 대표적으로 1876년 창단된 야라 야구 클럽은 ‘야라의 함성’8을 연상시킨다는 이유로 활동을 금지했다.
야구는 이후 독립운동과도 연결됐다. 1895년 독립전쟁이 발발하자 에밀리오 사보우린과 에두아르도 마차도 등 야구인들이 전쟁에 참전했다.
이들에게 야구는 단순한 스포츠가 아니었다. 경기 수익은 독립운동 자금으로 쓰였고 야구장은 독립운동가들이 회의를 위해 모이는 장소였다.

< 에밀리오 사보우린 / 쿠바 독립운동에 참전한 선수들 >
이러한 역사적 배경 속에서 야구는 19세기 쿠바에서 단순한 스포츠 이상의 의미를 갖게 됐다. 야구는 쿠바인들의 정체성을 확인하고 스페인과 구별되는 ‘쿠바니다드(Cubanidad)‘를 표현하는 매개체였다.
마치며
스포츠는 때로 한 사회의 정체성과 가치관을 담아낸다. 19세기 쿠바 야구가 그랬다. 쿠바인들이 야구를 택한 것은 자신들만의 문화를 형성하려 했기 때문이었다.
당시 크리오요들에게 야구는 스페인 문화와 자신들을 구별하는 상징이었다. 야구는 쿠바인들이 정체성을 형성하고 독립에 대한 열망을 드러내는 수단이었다. 그러면서 쿠바가 독립을 위해 투쟁한 세 차례의 역사와 함께했다.
이 때문에 야구는 쿠바인들에게 단순한 스포츠를 넘어 ‘쿠바인다움’을 표현하는 문화가 됐다. 19세기 쿠바에서 야구가 깊게 뿌리내릴 수 있었던 이유도 여기에 있었다.
오늘날 쿠바 야구를 이야기할 때 국제 대회 성과만으로 설명할 수 없는 이유도 마찬가지다. 쿠바인들에게 야구는 오랫동안 쿠바니다드 역사와 정체성을 담아온 스포츠였기 때문이다.
참조 = Louis A. Peréz, Jr – Between Baseball and Bullfighting , Thomas F Carter –The Manifesto of a Baseball-playing Country , Milton H. Jamail – Full Count : Inside Cuban Baseball, Wikipedia – Palmar de junco, Alamy – Cuba sugar mills
야구공작소 김상우 칼럼니스트
에디터 = 야구공작소 도상현, 박인이
일러스트 = 야구공작소 이동헌
ⓒ야구공작소. 출처 표기 없는 무단 전재 및 재배포를 금합니다. 상업적 사용은 별도 문의 바랍니다.
- 쿠바의 수도(La Habana)
- 유럽 백인 혈통의 중남미 태생 백인
- 이 시합에서 아바나는 마탄사스를 상대로 51대 9의 스코어를 기록하며 대승을 거뒀다
- 쿠바 10년 전쟁(1868년 ~ 1878년)을 종식시키기 위한 스페인 제국과 쿠바 독립군 사이 맺은 평화협정
- 당시 여름은 설탕 수확이 끝난 이후였기에 실업이 발생하는 시기였다. 쿠바인들은 여름 야구를 통해 지역 여가 활동으로 발전시켰다.
- 쿠바인 최초로 MLB 명예의 전당에 헌액된 마르틴 디히고(Martin Dihigo)의 아들이자 스포츠기자
- 스페인 본토 출신 백인
- Grito de Yara: 1868년 스페인에 맞선 최초의 대규모 독립 봉기


오., 몰랐던 이야기 재밌게 잘 읽었습니다
글 잘 읽었습니다! 많은 분들이 함께 읽었으면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