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인이냐 결과냐
< 일러스트 = 야구공작소 윤나영 >
야구는 흔히 숫자의 스포츠라고 불린다. 타 종목과 비교해봐도 방대한 데이터가 존재하며 이들을 입맛대로 주무를 수 있기 때문이다.
최근에 여러 데이터 사이트가 개방되며 접근성이 늘어났다. Stuff+처럼 머신 러닝으로 산출한 지표부터 Baseball Savant가 제공하는 배트 스피드 같은 세부 트래킹 데이터까지 종류도 다양하다.
이러한 정보의 바다 속에서 우리는 낚싯대를 마음껏 드리우며 각자의 호기심을 해소하고 성적 변동의 원인을 찾곤 한다. 그렇지만 여기서 반드시 유의해야 할 부분이 있다. 바로 ‘인과관계’다.
이미 일어난 결과를 보여주는 지표가 있는가 하면, 그 결과가 만들어진 원인을 추정하는 지표도 있다. 이 둘을 구분하지 않으면 결과를 능력으로, 상관관계를 인과관계로 오해하기 쉽다.
또한 야구는 그 특성상 하나의 국지적 변동에도 수많은 변인이 개입한다. 변수들은 직선적으로 움직이기도 하지만 때로는 비선형적인 결과를 만든다. 그렇기에 ‘A라서 B다’라고 간단히 단정하는건 위험하다.
이 글에서는 대표적인 사례인 구종 가치를 통해 결과와 능력을 구분하는 법을 살펴보고자 한다.
결과를 능력치로 읽는 오류
최근 인터넷에서 ‘A 선수의 B구종 가치가 높으니 B구종의 구위도 뛰어나다’라는 식의 글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하지만 구종 가치는 구종의 순수한 위력을 측정한 지표가 아니다.
< 구종 가치와 구종 위력을 헷갈리는 오류는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다 >
구종 가치의 원어는 Run Value다. 한국어로 직역하면 득점 가치다. 각 투구의 결과를 통해 득점 기대치에 얼마나 영향을 미쳤는지를 계산하고, 이를 구종 별로 합산한 결과 지표다. 타자에게는 특정 구종을 상대로 생산한 득점 가치를, 투수에게는 특정 구종으로 억제한 득점 가치를 보여준다. 따라서 투타 모두에게 적용되지만 타자에게는 생산력, 투수에게는 억제력을 뜻한다.
Run Value는 천천히 올려진 탑
< 2026 벤 라이스 득점 가치 >
2026년 벤 라이스는 포심을 474구 상대하며 19점의 Run Value를 쌓았다. 이는 8월 기준 메이저리그 1위에 해당하는 기록이다. 하지만 이를 곧바로 포심 대응 능력의 완전한 순위로 읽을 수는 없다.
< MLB 타자 득점 가치 리더보드 >
득점 가치는 WAR처럼 누적 지표이기에 구종을 상대한 횟수의 영향을 받는다. 따라서 총 Run Value를 구종 대응 능력 자체로 읽으려면 투구 수와 RV/100을 함께 확인해야 한다. 그래야 단순히 포심을 많이 상대해서 높은 점수를 받은건지, 투구당 성과도 뛰어났는지를 분리할 수 있다.
또한 높은 포심 Run Value가 낮은 헛스윙률이나 삼진율까지 보장하지는 않는다. Run Value는 세부 과정이 아니라 여러 타석에서 누적된 최종 결과를 보여주기 때문이다.
구종 가치를 만드는 요소
타자도 결과적인 ‘생산력’을 나타내는 지표로 기능하는게 득점 가치지만, 이러한 착각은 투수 쪽에서 더 많이 일어난다.
투수의 경우는 ‘높은 구종 가치 = 좋은 구위’라고 받아들이는 경우가 적지 않다. 하지만 구종 가치에 영향을 미치는 요소와 구위 자체를 살피는 지표는 구분해야 한다.
특히 구종 가치는 공의 물성만으로 결정되지 않는다. 그 구종을 어느 코스에 던졌는지, 어떤 볼카운트에 사용했는지, 앞뒤로 어떤 구종을 배치했는지, 타자의 약점에 맞게 활용했는지까지 결과에 함께 반영된다. 따라서 구종 가치는 구위 하나만으로 결정되지는 않는다.
Stuff+ ≠ Run Value
구위는 투수의 성적에 영향을 끼치는 주요 요인이고, 빼어난 구위는 대체로 실점 억제에 유리하다. 하지만 뛰어난 재료를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는 투수가 있는가 하면, 비교적 위력이 떨어지는 공을 제구와 배합으로 보완하는 투수도 있다. 메릴 켈리는 후자의 사례 중 하나다.
< 메릴 켈리 시즌 별 구종 평균 구속 변화 >
켈리는 구속에서는 크게 경쟁력이 없었다. 패스트볼 계열(포심, 커터, 싱커)은 꾸준히 90마일 초반에서 형성됐지만 리그의 평균 구속이 빠른 속도로 상승했기 때문이다.
< 메릴 켈리 패스트볼 무브먼트 vs. 대조군 >
하지만 구속 외의 영역에서까지 경쟁력이 없던 것은 아니다. 실제 무브먼트 수치를 보면 켈리의 싱커와 커터는 동종 구종 평균보다 우수한 움직임을 보였다.
< 메릴 켈리 2020 ~ 2026 FanGraphs Stuff+ >
켈리의 Stuff+는 다음과 같다. 7년간 WAR 16을 쌓은 투수라고는 생각되지 않는 수치다. 커리어하이였던 2023시즌 역시 뚫고 나오는 모습은 없다.
가장 큰 이유는 앞서 언급한 느린 구속이다. 아무리 움직임이 좋다고 한들, 절대적인 속도이 느리다면 타자의 의사 결정 시간을 극적으로 흔들 수 없다. 대부분의 스터프 모델에서도 가장 높은 가중치를 가지는 요소는 구속이다.
< 메릴 켈리 2019 ~ 2026 Run Value Percentile Rankings >
켈리의 Run Value는 어땠을까? Stuff+와 완전히 정비례 했을까? 그렇지 않다.
전체 Run Value는 2021년과 2024년 평균 부근에 머물렀고, 2026년에는 크게 떨어졌다. 하지만 2022년과 2023년에는 100을 밑도는 Stuff+로 각각 93퍼센타일과 90퍼센타일의 Run Value를 기록했다. 구종 가치와 개별 구종의 위력이 동일한 개념이 아님을 보여주는 사례다.
이 간극은 구종 가치가 무엇을 말하고 무엇을 말하지 못하는지 드러낸다. 구종 가치가 ‘무능한 지표’라는 말은 아니다. 한 시즌 동안 그 공이 어떤 결과를 남겼는지 알고 싶다면 여전히 가장 직관적인 자료 중 하나다. 다만 그 결과가 어디에서 비롯됐는지를 혼자서 설명하지 못할 뿐이다.
원인과 결과를 구분하는 게 첫걸음
구종 가치를 제대로 읽으려면 먼저 원인과 결과를 분리해야 한다. Run Value는 한 구종이 실제로 어떤 결과를 남겼는지를 보여주지만, 그 결과가 왜 만들어졌는지까지 설명하지는 않는다.
높은 구종 가치는 그 공이 많은 득점을 억제했다는 근거다. 하지만 이를 곧바로 뛰어난 구위의 증거로 바꿔 읽어서는 안 된다. 공의 물리적 특성뿐 아니라 로케이션과 볼카운트, 구종 배합, 상대 타자의 약점이 결과에 함께 쌓이기 때문이다.
그 원인을 알고 싶다면 질문에 맞는 숫자를 뒤이어 살펴야 한다. Stuff+로 공의 재료를, 헛스윙률과 타구 지표로 타자의 반응을. 끝으로는 로케이션과 피칭 레퍼토리를 통해 그 간극을 좁혀갈 수 있다.
다른 지표를 볼 때도 마찬가지다. 어쩔 때는 원인이 보이지 않을 때도 있다. 몰아치던 타자에게 갑자기 찾아오는 슬럼프가 좋은 예시다. 혹은 급격히 떨어지는 구속도 있을 것이다.
결국 문제는 애시당초 지표가 답할 수 없는 엉뚱한 질문을 던졌기 때문에 발생한다. ‘이 공은 강한가’와 ‘이 공은 좋은 결과를 냈는가’는 비슷해 보이지만 서로 다른 질문이다. 원인과 결과를 구분할 때, 기록은 비로소 제 쓰임새를 찾게 된다.
참조 = Baseball Savant, Fangraphs, 네이버 스포츠 뉴스
야구공작소 서연우 칼럼니스트
에디터 = 야구공작소 도상현, 전언수
일러스트 = 야구공작소 윤나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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