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방의 피홈런으로 남은 사내

(일러스트=야구공작소 황규호)

[야구공작소 양정웅] 지난 8월 4일, 삼성 라이온즈와 롯데 자이언츠의 2연전이 열리던 사직 야구장에서 한 롯데 선수의 은퇴 소식이 전해졌다. 공교롭게도 삼성과의 맞대결을 통해 자신의 이름 석 자를 알린 선수였다. 이날 사직구장 전력분석원석에 앉아 롯데의 승리를 지켜본 그의 이름은 바로 이정민이었다.

야구 팬들이 선수를 기억하는 방식은 다양하다. 역사에 길이 남을 커리어를 기록한 선수나 한 시즌을 화려하게 불사른 ‘원 히트 원더’들은 쉽게 잊히지 않는다. 반대로 극심한 부진으로 팬들의 기억에 남는 선수도 있다. 그런데 팬들이 이정민을 기억하는 이유는 참 특이하다. ‘홈런 허용 투수.’ 그것도 보통 홈런이 아니라 10년이 지나서야 깨진 ‘이승엽의 아시아 신기록 홈런’을 허용한 투수다.

 

현역 은퇴를 선언한 직후 전력분석원으로 변신한 이정민. (사진=롯데 자이언츠 제공)

 

사실 통산 성적에 비하면 이정민의 인지도는 놀라울 만큼 높은 편이다. 국보급 투수 선동열과 동일하게 통산 367경기에 등판했지만, 선동열이 146승 40패 132세이브로 KBO 리그 역사에 길이 남을 활약을 펼치는 동안 이정민은 22승 23패 11세이브 42홀드를 기록하는 데 그쳤다. 홀드를 집계한 시기에 활약해 홀드에서 앞설 뿐, 어느 하나도 내세울 정도는 아닌 성적이었다.

롯데 팬들은 2005년의 활약이나 2012년 감동의 선발승, 2014년부터 2016년까지 롯데 불펜을 책임진 노익장으로 그를 기억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타 팀 팬들에게는 ‘허용 투수’로만 기억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어쩌다 그는 ‘허용의 아이콘’이 됐을까?

 

‘그날’의 홈런

당시 아시아 프로야구 신기록이었던 시즌 56호 홈런을 치고 들어오는 이승엽. (사진=삼성 라이온즈 제공)

 

KBO 리그의 2003년은 오로지 이승엽이라는 이름으로 도배된 시즌이었다. 전해에도 심정수와 홈런왕 경쟁을 펼치며 3년 만에 40홈런 고지를 밟았던 이승엽은 2003년 들어 한층 물오른 홈런 페이스를 뽐냈다. 5월 15일 더블헤더 2경기에서 4홈런을 몰아치며 본격적으로 홈런왕 경쟁에 뛰어들었고, 이어 6월 22일에는 SK전 최연소 300홈런을, 7월 26일에는 SK전 최소경기 40홈런을 각각 달성했다. 경쟁자 심정수가 발치까지 쫓아왔지만 9월 6일 현대전에서 최소경기 50홈런을 기록하면서 다시 한 번 격차를 벌렸다.

이승엽의 목표는 홈런왕이 아닌 아시아 홈런 신기록이었다. 그러나 그의 홈런 페이스는 9월 들어 급격하게 가라앉아버렸다. 9월 10일 53호를 기록한 이승엽은 9경기 만인 21일 54호를, 또 4경기 만인 25일 55호 타이 기록을 달성했다. 14일간 단 2홈런을 때려내는 데 그친 셈이다. 그리고 또 5경기 동안 침묵이 이어졌다. 9월 27일 사직구장에서는 롯데가 이승엽을 고의4구로 내보내면서 분노한 팬들의 오물 투척으로 경기가 1시간 동안 중단되는 사태도 일어났다.

 

당시 언론에서는 이승엽에게 고의4구를 주는 것을 ‘부끄러운’ 것으로 여겼다. (사진=뉴스 화면 캡처)

 

이날의 난동을 롯데 덕아웃에 있던 이정민도 지켜봤을 것이다. 그리고 며칠 뒤, 본인에게도 기회 아닌 기회가 찾아왔다. 2003년 10월 2일 삼성의 페넌트레이스 마지막 경기. 대졸 2년차 이정민은 통산 10번째 등판, 그리고 2번째 선발 등판을 중압감 속에서 치러야 했다. 이날 경기 전까지 38승 91패 3무, 7위와 17경기 차로 벌어진 압도적 꼴찌였던 롯데의 선발투수가 경기 내용에 부담을 가질 이유는 단 하나, 이승엽의 56호 홈런이었다.

팔꿈치 부상 후 얻은 첫 선발 등판 기회, 이정민은 당시 역대 팀 홈런 신기록(213홈런, 이후 2017년 SK가 경신)을 세운 삼성의 강타선을 상대로 1회 땅볼-몸에 맞는 공-병살타를 이끌어냈다. 2회말 2대0의 리드를 얻은 이정민이 상대하게 된 선두타자는 4번타자 이승엽. 초구는 시속 140km의 속구. 볼이었다. 2구째는 속도를 약간 줄인 138km의 속구. 스트라이크를 잡은 이정민은 피해갈 생각이 없어 보였다.

그리고 3구째. 바깥쪽을 요구한 포수 최기문의 미트보다 더 안쪽으로 들어온 공은 이승엽의 배트에 정확하게 맞았다. 좌중간으로 쭉쭉 뻗은 타구는 그대로 대구 시민운동장의 펜스를 넘어갔다. 이승엽의 시즌 56호 홈런. 아시아 신기록이었다. 홈런을 허용한 이정민은 믿을 수 없다는 듯 한동안 마운드에 멍하니 서 있었다.

그날의 승리투수는 5이닝 5피안타 3실점을 기록한 이정민. 하지만 그날 이정민의 승리에 대해 주목한 사람은 없다시피 했다.

 

영웅을 만들어줘야 했던 이정민

경기가 끝난 후 이승엽에게 홈런을 허용한 소감을 말하는 이정민. (사진=뉴스 화면 캡처)

 

이승엽과 상대하기 전까지 야구 팬들과 언론에게 이정민은 ‘레이더 바깥’의 선수였다. 그저 꼴찌 팀 롯데에서 연좌제처럼 줄줄이 난타당하는 ‘투수3’에 지나지 않았다. 심지어 부상으로 그 기회마저 많지 않았다.

사람들이 이정민을 주목한 것은 바로 2003년 10월 1일, ‘이승엽 56호 홈런 신기록’이 걸린 마지막 경기의 상대 선발투수로 예고된 순간부터였다. ‘2002년 롯데 1차지명 투수’에서 ‘이승엽의 상대 투수’로 변신한 이정민은 순식간에 언론의 인터뷰 대상으로 떠올랐다. 물론 “난 홈런을 맞아줄 생각이 없다. 어렵게 승부하겠다.”따위의 말은 할 수 없었다. 얼마 전 사직의 기억이 아직도 사람들의 머릿속에 선명했던 탓이었다. “피할 이유도 없고 정면승부하겠다. 오늘 경기에서 내 진면목을 보여주겠다.”는 말로 이정민은 자신의 각오를 밝혔다.

사람들은 이정민의 정면승부를 기대했다. 언론도 이를 부추겼다. “신예 이정민, ‘국민타자’와 정면승부”, “지기 싫어하는 오기가 대단”과 같은 문구를 앞세워 이정민이 한 방 맞아주길 바라는 마음을 은연중에 내비쳤다. 이정민의 편은 없는 듯했다.

결국 소원대로(?) 홈런을 맞은 이후에도 이정민은 전혀 배려를 받지 못했다. 이승엽의 홈런 직후 경기는 잠시 중단됐다. 축하를 위한 중단이야 대의를 위해 납득할 수 있었지만, 경기 도중 즉석 인터뷰까지 진행하는 것은 제 아무리 “오기가 대단”한 투수라 해도 쉽게 받아들이기 어려웠을 것이다. 모든 장치들이 기다렸다는 듯 무대 위로 올라오는 상황. 이정민은 사실상 선발투수로 예고된 그 순간부터 영웅을 ‘만들어야 할’ 운명을 짊어지고 만 셈이었다.

 

‘허용 투수’가 아닌 그냥 ‘이정민’

요란스러웠던 56호 홈런과 함께 2003년은 막을 내렸다. 이후 이정민은 본격적으로 롯데 마운드의 한 축을 짊어지기 시작했다. 2004년부터 2년 동안은 선발등판 한 번 없이 172.2이닝을 소화했고, 이 중 2005년에는 7세이브(10위)를 기록하면서 롯데가 ‘8888’의 굴레를 탈출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하지만 이런 활약은 대체로 롯데 팬들의 기억 속에만 남아 있을 뿐이다. 보통의 야구팬들에게 그는 결국 ‘허용 투수’였다. 2011년에는 최동원 영구결번 논란에 휘말리면서 경기 외적으로도 곤란한 일을 겪어야 했다.

하지만 이정민은 그냥 이정민일 뿐이었다. 잘하든 못하든 롯데 마운드를 지켰고, 주목받지 못해도 자신의 역할을 묵묵히 수행했다. 팔꿈치 수술에서 복귀한 2014년에는 후반기 롯데의 불펜 필승조 1순위로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만 37세였던 2016년에는 77이닝을 소화하며 5승 2패 2세이브 9홀드, 평균자책점 3.16을 기록해 FA 윤길현과 손승락의 부진을 훌륭하게 메꿨다.

 

2014년, 서건창에게 200안타를 허용할 위기에서 상대하는 이정민. (사진=중계 화면 캡처)

 

젊은 날의 트라우마를 자신의 손으로 털어버리기도 했다. 2014년 10월 15일, 이정민은 당시 KBO 리그 최초 200안타에 안타 하나만을 남겨놓고 있던 서건창을 상대했다. 중계진마저 “대결하지 않았으면 좋겠다”며 안타까움을 내비쳤지만, 이정민의 태도는 2003년의 그날과 똑같았다. 피하지 않고 정면승부를 펼쳤다. 그리고 결국 안타가 아닌 유격수 뜬공을 유도해냈다. 11년간 꼬리표처럼 달렸던 ‘허용 투수’라는 타이틀 옆에 ‘불허 투수’, ‘저지 투수’라는 별명도 붙었다.

시계를 다시 2003년 10월 2일로 돌려보자. 경기가 끝난 뒤 이정민은 자신의 선발승 소감 대신 이승엽에게 홈런을 맞은 소감을 얘기해야만 했다. 24세의 이정민은 “(이승엽과) 다음에 대결할 기회가 있다면 반드시 삼진을 잡겠다”는 각오를 밝혔다. 이승엽이 8년간의 일본 생활을 마치고 돌아온 2012년부터 2016년까지 이정민은 이승엽에게 9타수 4안타를 내줬다. 삼진은 한 개도 없었다.

 

현역 마지막 시즌인 2017년의 이정민. (사진=롯데 자이언츠 제공)

 

2017년 8월 12일 대구 삼성 라이온즈 파크, 5대6으로 뒤지던 5회말 등판한 이정민은 볼넷과 3안타를 연달아 허용하며 점수 차를 5점 차로 벌려 놓고 말았다. 힘겹게 이닝을 마무리한 이정민이 6회 선두타자로 맞이한 선수는 바로 이승엽. 볼카운트 2-2를 만든 이정민은 5구째 떨어지는 포크볼로 이승엽을 돌려세웠다. 24살의 이정민이 세운 각오를 14년이 지나 38살의 이정민이 지켜낸 것이다.

이는 이후 다시 1군에 올라오지 못한 이정민의 커리어 마지막 탈삼진이 되었다. 자신이 한 말은 지키고 나서야 물러난 선수, 이정민은 마지막까지 그냥 ‘이정민’이었다.

기록=스포츠투아이

에디터=야구공작소 이의재 / 일러스트=야구공작소 황규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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