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경문과 김영덕, 2등의 서글픔

[야구공작소 양정웅]

“스포츠라는 게 항상 1등만 보이는데, 김경문 감독님 생각이 자꾸 나네요. 800승 감독님이신데…”

2016년 한국시리즈가 두산 베어스의 4승 무패 승리로 끝난 뒤, 승장 인터뷰를 가진 두산 김태형 감독은 인터뷰 도중 감정이 복받쳐 오른 듯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 통합우승을 하면서 가장 기뻤을 순간에 김태형 감독은 반대편 덕아웃에 앉아있던 사람을 떠올렸다.

2016년 한국시리즈에서 맞붙은 김경문-김태형 감독의 현역 시절 모습. (사진=두산 베어스 제공)

“운이 좋았죠. 선수들이 열심해 했고요. 김영덕 감독님을 두 번이나 괴롭혀 죄송한 마음입니다.”

24년 전인 1992년 한국시리즈, 롯데 자이언츠가 4승 1패로 우승한 후 강병철 감독은 김태형 감독처럼 자신이 패배를 안긴 상대 패장을 인터뷰에서 언급했다. 5년 만에 돌아온 팀, 8년 만의 우승을 자신이 수석코치까지 했던 팀을 상대로 달성한 강 감독은 한국시리즈 내내 마주보고 있던 김영덕 감독이 마음에 걸렸을 것이다.

김영덕과 김경문, KBO 리그에서 둘째 가라면 서러운 ‘2등 감독’이다. 작년까지 총 35번의 한국시리즈에서 두 감독은 10회의 준우승을 합작(?)했다(김영덕 6회, 김경문 4회). 우승을 못하다 보니 여러 구설에 오르기도 했다. 그리고 그들이 감독직을 맡았던 삼성 라이온즈와 빙그레 이글스, 두산 베어스와 NC 다이노스는 2등 팀으로 낙인 찍혔다.

두 감독, 그리고 NC를 제외한 앞선 세 팀은 공통점이 있다. 바로 ‘당대의 2등’ 이었다는 것, 초반에 찾아온 1등의 기회를 놓친 후 점점 원동력을 잃었다는 것이다. 6번의 준우승 끝에 다시 1군 감독으로 돌아오지 못한 김영덕 감독과 4번의 준우승 끝에 잠시 휴식기를 가지게 될 김경문 감독의 눈물겨운 2등 역사는 어땠을까.

 

김영덕과 삼성 : 제도가 만든 2등의 낙인?

1986년 전기리그 우승 축하연에서의 김영덕 감독(맨 왼쪽). 두 번째 우승도전에서 실패한 김영덕 감독은 시즌 후 사임했다. (사진=삼성 라이온즈 제공)


사실 김영덕 감독은 원년 OB 베어스의 감독을 맡으며 (당시 선수였던 김경문 감독과 함께) 한국시리즈 우승을 차지하는 등 커리어 전체를 준우승으로 도배한 사람은 아니었다. 그가 본격적으로 ‘2등 감독’이 된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그가 KBO 리그 첫 준우승팀으로 만들어버린 삼성 라이온즈로 팀을 옮기고 나서였다.

1984년 전기리그에서 승률 0.640을 기록, 압도적인 우승을 차지한 삼성은 여유롭게 한국시리즈를 준비했다. 김영덕 감독 자신에게 여러모로 껄끄러운 상대였던 OB를 거르고 전기리그 4위팀이었던 롯데를 한국시리즈 파트너로 고를 정도였다. 그러나 삼성은 거짓말 같이 한국시리즈에서 최동원 한 명에게 틀어 막혀 롯데에 우승컵을 헌납했다.

1985년 김영덕 감독은 전년도의 실패를 거울 삼아 압도적인 시즌을 보내고 통합우승을 차지했다. 그러나 한국시리즈가 무산되자 통합우승이라는 타이틀에는 다소 맥이 빠졌고 이를 우승으로 인정하지 않는 사람들도 생겨났다. 삼성은 또 한 번 이를 갈아 1986년 전기리그에서 7할대의 승률로 우승을 차지했다. 이번에는 제도의 변경*으로 한국시리즈에 직행하는 대신 플레이오프를 거쳐 올라간 끝에 해태 타이거즈에 1승 4패로 패퇴했다.

* 1985년 한국시리즈 무산 이후 KBO는 다시 한국시리즈 진출팀 결정 방식을 바꿔 전/후기리그 모두 2위 안에 들었던 팀에 한국시리즈 직행 티켓을 줬다. 이로 인해 1986년 전/후기 모두 2위였던 해태가 한국시리즈에 직행하고, 전기리그 우승팀 삼성과 후기리그 우승팀 OB가 플레이오프를 하는 상황이 되었다.

1986년 한국시리즈에서 무기력한 패배를 당한 김영덕 감독은 건강 문제 등으로 결국 삼성과의 재계약을 스스로 포기했다. 삼성은 이후 15년간 4회의 준우승을 더 한 끝에야 첫 한국시리즈 우승을 차지할 수 있었다.

 

김영덕과 빙그레 : 변명의 여지가 없는 2등

2018 시즌 한화 홈 개막전에서 시구 후 옛 제자였던 한용덕 감독과 악수하는 김영덕 전 감독. (사진=한화 이글스 제공)

1년을 쉰 김영덕 감독은 삼성 시절 3년을 제외하고 1977년부터 쭉 지도자 생활을 했던 충청도로 돌아간다. 빙그레 이글스의 감독이 된 것이다. 그는 과거 한화그룹 재단 소속 천안 북일고등학교의 감독이었던 인연과 더불어 원년 우승의 업적을 인정받아 어렵지 않게 감독직에 복귀할 수 있었다.

창단 후 2년간 하위권에 있던 빙그레는 김영덕 감독의 지휘 아래 전기리그에서 2위에 올랐다. 플레이오프에서는 김 감독의 전 소속팀 삼성을 꺾고 한국시리즈에 진출하는 파란까지 일으켰다. 비록 김성한과 선동열이 부상으로 제대로 가동되지 못한 해태 타이거즈에 2승 4패로 패배하긴 했지만 장밋빛 미래를 보았다는 평이 대다수였다.

그러나 이후로 빙그레는 처절한 준우승 폭탄을 맛봐야만 했다. 1989년 최초의 단일리그제에서 페넌트레이스 1위에 등극한 빙그레는 당대 최고의 투수 선동열을 두들겨 먼저 1승을 따냈으나 2차전 장종훈의 실책을 시작으로 사기가 급격히 저하, 1승 4패 준우승이라는 결과를 얻었다. 1990년 ‘종신감독’ 파동으로 4위에 그친 후 1991년 다시 오른 한국시리즈에서는 오히려 4패만을 기록하며 점점 퇴보하는 모습을 보여줬다.

1992년은 ‘콩그레’의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시즌이었다. 시즌 초반부터 치고 나간 빙그레는 2위와 10.5경기차라는 압도적인 성적으로 한국시리즈 진출을 확정했다. 상대팀은 정규시즌에서 상대전적 13승 5패의 절대우세를 보인 롯데 자이언츠. 하지만 김영덕 감독은 8년 전 자신을 좌절시킨 강병철 감독과 롯데에 또 다시 우승을 내줘야만 했다.

김영덕 감독은 1993년 포스트시즌 진출 실패의 책임을 지고 그라운드를 떠났다. 그리고 다시는 1군 감독으로 복귀하지 않았다.

 

김경문과 두산 : ‘호구 왔는가’

두산 시절의 김경문 감독. (사진=두산 베어스 제공)

김영덕 감독의 OB 시절 제자였던 김경문은 김영덕 감독이 물러난 이듬해인 1994년부터 지도자 생활을 시작했다. 두산 배터리코치로 2001년 우승을 맛본 김경문은 2004년 두산의 감독이 되었다. 그는 전년도 7위로 어수선했던 두산의 분위기를 강력한 리더십으로 휘어잡아 팀을 4위로 이끌었다. 이듬해에는 페넌트레이스 2위에 올랐고 한국시리즈에서도 3차전까지 접전을 이어가던 끝에 아쉬운 스윕패를 당했다.

그러나 2등 감독 김경문의 역사는 이제부터 시작이었다. 2006년 5위로 잠시 쉬어간 두산은 2007년, 향후 수 년간 프로야구의 트렌드가 되는 ‘발야구’를 내세웠고 MVP 다니엘 리오스의 활약에 힘입어 다시 한 번 한국시리즈에 올랐다. 한국시리즈에서도 SK 와이번스에 첫 2경기를 모두 이기고 홈으로 돌아왔다. 당시까지 한국시리즈를 2승 무패로 시작한 팀의 우승 확률은 100%. 그러나 두산은 이 확률을 91.7%로 만들어버리며 4연패로 시리즈를 마감했다.

2008년, 베이징 올림픽에서 전승 우승을 차지한 뒤 “고생해서 2등했는데 아무 대접을 받지 못하는 선수들을 보고 가슴 아팠다”며 2등의 설움을 내비친 김경문 감독은 다시 한 번 한국시리즈에서 SK를 만나 ‘복수’와 ‘2등 감독 탈출’이라는 과제에 도전했다. 하지만 현실은 냉혹했다. 중심타자 김현수가 21타수 1안타를 기록하는 부진과 에이스의 부재 등에 눈물 흘리며 결국 2008년에도 1승 4패, 안방에서 상대의 우승을 지켜보아야만 했다.

이후 두산은 여전히 강팀이었지만 무언가 삐걱거리는 모습이었다. 2009년에는 베테랑들이 팀을 떠나는 와중에도 정규시즌 3위를 차지했으나 3년 연속 가을야구에서 SK에 패배하며 ‘호구’라는 멸칭을 얻게 되었다. 2010년에는 이재우의 부상, 이용찬의 음주운전 등 악재 속에서도 3위에 올랐으나 결국 한국시리즈 진출에는 실패했다. 그리고 2011년, 삐걱거리는 팀 분위기 속에 두산은 7위까지 내려앉았고 김경문 감독은 자진사퇴로 팀을 떠나게 됐다.

 

김경문과 NC : ‘콩산’ DNA 이식?

신생팀을 리그에서 손꼽히는 강팀으로 키웠던 NC 시절의 김경문 감독. (사진=NC 다이노스 제공)

김경문의 두 번째 감독 팀인 NC 다이노스는 어땠을까. 사실 NC가 이제야 1군 6년차인 신생팀임을 감안하면 준우승을 한 것이 오히려 대단하다고 할 수도 있다. 그러나 현실은 현실, NC 역시 감독의 이미지가 덧씌워지며 2등 팀이 되었다.

두산 감독 사퇴 후 같은 해 NC의 창단 감독이 된 김경문 감독은 단시간에 팀을 궤도에 올렸다. 2013년 1군 첫 시즌 7위를 기록하고 이듬해에는 순위를 4위까지 끌어올렸다. 2015년에는 한국프로야구 최초로 40(홈런)-40(도루) 클럽에 가입한 에릭 테임즈와 시즌 다승왕 에릭 해커의 활약으로 페넌트레이스 2위를 차지했다. 하지만 플레이오프에서는 거짓말 같이 ‘김경문’했다. 2승 1패로 앞선 상황에서 두산의 원투펀치 니퍼트와 장원준에게 틀어 막히며 그대로 시즌을 마감한 것이다.

2016년, 비록 1위 두산은 따라잡지 못했지만 NC는 3위와 7경기차로 여유 있게 2위를 확정 지었다. 플레이오프에서도 LG 트윈스를 3승 1패로 누르고 한국시리즈에 올랐다. 두산이 강하다곤 하지만 NC 역시 6할에 가까운 승률을 올린 팀이었기 때문에 적어도 접전은 예측되었다. 완벽한 방패 ‘판타스틱4’에 대응할 화려한 무기 ‘나테이박’의 활약도 기대되었다.

그러나 NC는 한국시리즈 4경기 38이닝 동안 단 2득점이라는 수준 이하의 공격력을 보여주었고 결정적 고비들을 넘기지 못하며 한국시리즈 역사에서 손꼽힐 압도적인 패배를 당하고 말았다. 두산에서 이미 3회의 준우승을 차지한 김경문 감독은 이 준우승으로 김영덕 감독에 이어 두 번째로 많은 4회의 준우승 감독이 되었다.

NC 역시 김경문 감독 시절 두산의 전철을 밟는 모양새다. 2017년 중반까지 1위 싸움을 했던 NC는 후반기 부진의 늪에 빠지며 4위까지 떨어지는 굴욕을 맛봤고 포스트시즌에서는 또 다시 두산의 벽을 뚫지 못했다. 성적보다도 더 심각했던 불펜진의 과부하 이슈는 결국 2018년 NC의 추락과 김경문 감독 퇴진의 방아쇠가 되었다.

 

우승을 못하면 말이 나온다

우승을 오랜 시간 하지 못하면 팀 분위기도 자연스레 떨어진다. 빙그레 시절 4번의 준우승을 했던 장종훈은 한 방송에서 “그 해(1992년) 우승을 못하고, 똑같은 멤버였지만 1993년부터는 왠지 모르게 팀의 힘이 조금 빠지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그때부터 팀이 내리막길을 걸었다”고 술회했다. 두산과 NC 역시 김 감독의 마지막 시즌에 가서는 그라운드 밖 문제들이 터져나오며 감독 특유의 리더십에 생채기를 입혔다. 감독이 팀 장악에 실패한 결과는 두 번 모두 퇴진이었다.

우승을 했다면 ‘좋은 게 좋은 거’라고 넘어갔을 문제들도 심각하게 다가온다. 김영덕 감독 못지 않게 ‘타이틀 밀어주기’로 악명이 높았던 해태 김응용 감독은 우승을 했기 때문에 면죄부를 받을 수 있었다. 김성근 감독과 선동열 감독도 투수들을 ‘갈아 마신’ 것으로 유명했지만 김경문 감독과 달리 우승 당시에는 문제가 되지 않았다. 오히려 불펜 혹사 이슈가 불거진 것은 그들이 팀을 옮긴 후 부진에 빠졌을 때였다.

냉정한 말일 수도 있지만 “스포츠세계에서 2등은 꼴찌하고 똑같다”는 선동열 감독의 말은 결국 모두의 머릿속에 존재한다. 세상은 김영덕 감독의 6회 준우승만 기억할 뿐 페넌트레이스 2회 우승의 기억은 저 멀리로 날려버렸다. 프로야구의 트렌드를 주도했던 김경문 감독의 발야구 역시 이제는 기억 저편으로 사라졌다.

프로는 우승으로 말한다지만 우승을 못했다고 명감독의 자격이 없는 것은 아니다. 김영덕 감독은 창단 초기 혼란스러웠던 빙그레의 기초를 다듬어 ‘다이너마이트 타선’의 기틀을 마련했고 이는 이글스의 상징이 되었다. 김경문 감독은 기복이 심하던 두산에 ‘꾸준한 강팀’, ‘화수분 야구’라는 이미지를 심어주었다. 우승만 하지 못했을 뿐 이들이 팀에 준 영향은 어마어마했다.

“2등도 잘한 거야!”라고 외치던 또 다른 2등의 대명사, 프로게이머 홍진호는 자신의 은퇴식에서 이런 말을 남겼다.

세상은 1등만을 기억한다고 하지만, 2등도 많이 하면 사람들이 기억해주더라고요.”

 

에디터=야구공작소 박효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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