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 아메리칸리그 동부지구 정규시즌 우승 (사진=Flickr Keith Allison, CC BY SA 2.0)
[야구공작소 김준업] 1954년 볼티모어에 새로 터를 잡고 팀명을 브라운스에서 오리올스로 바꾼 팀이 있다. 이 팀은 마지막으로 월드시리즈 우승을 거두었던 1983년까지 약한 팀이 아니었지만, 그 후 기나긴 암흑기를 두 차례나 겪으며 오랜 세월 야구를 못하는 이미지를 굳히게 된다.
소위 명문팀이라 불리는 특정 몇 팀을 제외한 대부분의 팀 역사에는 오랜 기간 초라한 성적에서 벗어나지 못한 암흑기가 존재한다. 이미 극복한 팀도 있고 현재진행형인 팀도 있다. 암흑기는 차근차근 준비한 장기 플랜이 성공적으로 실행될 때 극복되기도 하고 불안요소였던 모든 변수가 긍정적으로 발현하여 우주의 기운을 모을 때 끊어지기도 한다. 그리고 급변하는 대외 여건에 빠르게 대응하는 것도 효율적이면서도 빠르게 암흑기를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일지도 모른다.
급변하는 대외 여건 중 가장 큰 영향력을 가지는 건 리그 개편일 것이다. 긴 역사를 자랑하는 프로 스포츠 리그는 오랜 세월 동안 많은 변화를 거친 끝에 최적화된 방식으로 운영된다. 그러나 시대의 수요에 맞춰 체제를 바꾸는 경우가 있다. 특히 기존 운영체제를 뜯어고치는 수준의 대규모 리그 개편은 특정 팀의 장기적인 계획을 엎어버리는 동시에 일시적으로 투자 동기를 부여하기도 한다.
볼티모어가 두 번의 암흑기를 극복한 시기는 메이저리그의 운영체제 개편 시기와 묘하게 맞닿아 있다.
와일드카드 제도 도입, 크게 투자해볼까?
오랜 기간 리그별로 운영되어 온 메이저리그의 양대 지구 체제는 1994시즌에 이르러 세 개의 지구로 개편되면서 와일드카드 제도가 도입되었다. 이로써 두 장이었던 가을야구의 초대권은 네 장으로 확대되었다. 확고한 지구 우승권은 아니지만 와일드카드를 노릴 수 있는 전력을 가지고 있던 구단들은 그동안 망설였던 투자 의욕을 보이기 시작한다. 그중에서도 가장 공격적인 투자를 감행한 구단은 피터 앙헬로스 구단주가 운영하던 볼티모어 오리올스였다.
1983년 월드시리즈를 끝으로 가을야구를 하지 못한 볼티모어의 암흑기는 어느덧 10년을 넘어가고 있었다. 칼 립켄 주니어와 라파엘 팔메이로만으로는 화력이 부족하다고 판단한 구단주는 1995년 시즌 종료 후 페이롤을 끌어올려 로베르토 알로마, B.J.서호프 등 검증된 팔방미인들을 영입하여 라인업을 보강하였다. 고독한 에이스 마이크 무시나의 뒤는 데이빗 웰스와 스캇 에릭슨이 받쳐주면서 가을야구를 노릴 수 있는 탄탄한 선발 로테이션이 완성되었다.
팬들을 설레게 한 오프 시즌이 끝나고 개막한 1996시즌, 막대한 자금 투입은 곧바로 화력으로 나타났다. 전 시즌 173개였던 팀 홈런은 257개로 늘어났고 안정적인 선발 로테이션에 힘입은 볼티모어는 시즌 최종 88승을 기록하면서 와일드카드를 획득한다. 비록 디비전 시리즈에서 클리블랜드 인디언스를 제압하고 올라간 챔피언십 시리즈에서 뉴욕 양키스에게 석패하였지만, 암흑기를 탈출하면서 성공적으로 끝난 정규시즌은 구단주에게 ‘높은 페이롤이 곧 성적으로 이어진다’는 믿음을 주기에 충분한 결과였다.
과유불급, 두 번째 암흑기
이미 메이저리그 페이롤 최상위권이었던 볼티모어는 월드시리즈 우승을 코앞에서 놓치자 1997시즌을 앞두고 더 많은 투자를 감행한다. 양키스의 7300만 달러와 볼티모어의 6500만 달러 간 정규 시즌 대결은 더 적은 금액으로 98승을 거둔 볼티모어의 승리로 끝이 났다. 그러나 이번 챔피언십 시리즈에서는 클리블랜드 인디언스에게 저지를 당하면서 볼티모어는 또 한 번 월드시리즈 진출에 실패하고 만다.
안달이 난 앙헬로스 구단주가 약 1000만 달러를 추가로 투입하며 볼티모어는 양키스를 뛰어넘고 1998시즌 메이저리그 페이롤 1위를 기록하게 된다. 2014년 LA 다저스가 나타나기 전까지 1998시즌의 볼티모어는 양키스의 페이롤을 뛰어넘은 유일한 구단이었다.
<1995~1999년 페이롤 상위 구단 (단위: 달러)>
그러나 야구는 돈으로만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이라도 하듯 1998년 볼티모어는 승보다 패를 더 많이 기록하면서 지구 4위로 시즌을 마감한다. 이후 구단주의 추가 투자 의지는 급격히 식어버렸고 알버트 벨을 필두로 한 악성 장기계약이 줄이어 터지면서 볼티모어는 기나긴 암흑기를 맞이하게 된다.
2008시즌 탬파베이 레이스가 월드시리즈에 오를 때까지 아메리칸리그 동부지구는 양키스와 보스턴 레드삭스가 번갈아가면서 왕좌를 차지하고 있었다. 이 기간 동안 볼티모어는 늘 하위권에 머물면서 감독을 여섯 번 갈아치웠지만 다시 찾아온 암흑기도 어느덧 10년을 넘어가고 있었다.
장기적인 팀 플랜에 제도 개편을 끼얹으면
암흑기에 빠져있던 팀의 걷잡을 수 없는 침체된 상황은 2007년 앤디 멕페일 단장이 부임하면서 조금씩 바뀌기 시작한다. 그는 에이스 에릭 베다드를 시애틀 매리너스에 주고 애덤 존스와 크리스 틸먼을 데려오는 성공적인 트레이드를 하였고, 지금 당장 필요한 즉전감보다는 장기적인 계획을 기반으로 드래프트에 임하면서 포지션별로 어린 코어 선수들을 모으기 시작한다. 몇 년이 지나 선수들이 하나 둘 모이기 시작하자 앙헬로스 구단주는 리빌딩 전문가로 정평이 난 벅 쇼월터를 감독으로 영입한다. 이로써 2010시즌 후반기부터 팀의 체질 개선이 본격적으로 이루어진다.
2012 ALDS, 구심에게 항의하는 벅 쇼월터 감독 (사진=Wikimedia Commons CC BY 2.0)
이 무렵 메이저리그 와일드카드 제도에도 변화가 생긴다. 리그별로 각각 한 팀씩 더 가을에 초대하여 와일드카드 1, 2위가 디비전 시리즈에 진출할 팀을 결정하기 위한 한판 승부를 펼치게 된 것이다. 이 제도가 처음 시행된 2012시즌, 볼티모어는 탄탄한 수비와 화끈한 화력, 그리고 끈기 있는 불펜 야구를 선보이면서 1년 만에 93패를 93승으로 바꾸는 기적을 만들어낸다. 역사상 처음으로 치러진 와일드카드 결정전에서 볼티모어는 같은 승률을 기록한 텍사스 레인저스를 상대로 5대 1로 이기면서 아메리칸리그 디비전 시리즈에 진출한다. 15년 만에 끊어낸 암흑기였다.
컨텐딩을 할 수 있는 전력에 와일드카드 제도까지 개선되면서 볼티모어의 미래에는 긍정적인 요소가 많이 보였다. 향후 몇 년은 와일드카드를 계속 노려볼 수 있다고 판단한 앙헬로스 구단주는 2012시즌을 기점으로 동결했던 페이롤을 조금씩 늘리기 시작한다. 지속적인 투자 덕분이었을까, 볼티모어는 2012시즌부터 2016시즌까지 5년 동안 5할 승률 이상을 기록하고 가을야구에 세 번 진출하게 된다.
<최근 6년 볼티모어 투자 규모와 팀 성적 변화 추이>
점점 멀어지는, 우리가 아는 볼티모어
2012시즌 이래 볼티모어는 격년제로 가을야구에 진출을 했다. 아이러니하게도 볼티모어가 좋은 성적을 거두었던 시즌은 전문가들이 지구 최하위로 예상한 시즌이었다. 반면 좋은 성적을 거둔 시즌 다음해 좋은 평가를 받으면 가을야구에 진출하지 못하였다.
아메리칸 동부 지구 컨텐더였던 최근의 볼티모어는 암흑기였던 시기에 비해 더 많은 관심을 받았다. 타선을 살펴보면 언제나 최상위권의 홈런을 기록하는 반면 도루는 최하위권을 독차지하고 있다. 기동력은 떨어지지만 한 방을 보여주는 화끈한 화력, 여기에 탄탄한 수비력이 뒷받침이 되면 2014시즌 지구 우승처럼 매우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었다. 그러나 외야 수비가 망가지기 시작한 2015시즌부터는 더 이상 야수들이 공수 모두 활약하며 짜임새 있는 야구를 하는 팀이 아니다.
<최근 6년 볼티모어 야수 팀 스탯 및 순위>
언제나 야수 영입에 집중을 한 구단주의 방침 덕분에 매 시즌 약점으로 지적되어온 선발투수진은 언제나 빈약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특히 2014년 정규우승을 차지했을 때 기록한 ERA를 제외하면 언제나 팀은 바닥을 벗어나지 못하였다.
반면 15년 만에 가을야구에 진출하게 해준 탄탄한 불펜진은 최근까지 볼티모어의 좋은 성적을 지탱하는 강력한 무기였다. 그러나 오랜 기간 투수 코치로 활약한 데이브 월러스가 로저 맥도웰로 교체된 2017시즌, 선발진이 완전히 붕괴되었고 과부하가 걸린 불펜진도 맥없이 추락하였다.
<최근 6년 볼티모어 투수 팀 스탯 및 순위>
두번째 암흑기를 끊어내고 구축된 ‘우리가 아는 볼티모어’는 이미 팬들에게서 조금씩 멀어지고 있다.
올해가 마지막일지도 모릅니다
팬들은 2010년대 초반 즈음부터 애덤 존스, 매니 마차도, 조나단 스콥의 센터 라인을 등에 업고 마운드에서 전력 투구하는 딜런 번디를 보고 싶었다. 2018시즌 개막전은 이러한 염원이 처음으로 이뤄지는 역사적인 날이었고, 연장 접전 끝에 존스가 끝내기 홈런을 치면서 그 추억은 더욱 깊게 새겨졌다.
2018 개막전, 애덤 존스의 끝내기 홈런 세레머니 (사진=Flickr Keith Allison, CC BY SA 2.0)
2018시즌을 맞이하는 팬들의 감회는 여느 때와는 조금 다르다. 이미 좋은 기억을 안겨다준 J.J.하디와는 소리없이 조용히 이별했다. 오랫동안 함께한 존스, 마차도, 잭 브리튼, 브래드 브락의 계약은 올해를 끝으로 만료된다. 프랜차이즈 역사상 최고의 감독인 얼 위버 이후로 가장 좋은 평가를 받게 될 쇼월터 감독, 그리고 선뜻 이해하기 힘들지만 구단주의 성향을 고려하면 납득은 되는 무브를 보여준 댄 듀켓 단장도 올해를 끝으로 볼티모어를 떠날 가능성이 높다. 이 팀에 남을 이가 누가 될지는 아직 아무도 모른다.
확실한 것은, 그동안 팬들을 즐겁게 해준 볼티모어가 내년부터 달라진다는 사실이다. 팬들은 고유의 색을 잃어버린 채 한없이 추락하던 암흑기의 볼티모어를 아직 기억하고 있다. 아니길 바라지만, 최악의 경우 세 번째 암흑기가 찾아와 매 시즌 다른 동네에서 벌어지는 가을 잔치를 먼발치에서 구경해야 할 것이다.
일전에 마차도는 두번째 무릎 수술 및 재활을 마치고 돌아오면서 이런 말을 남겼다.
“물론 개개인의 기록지만 살펴보면 최고가 아닐지도 몰라요. 하지만 필드에서는요, 우리가 최고입니다.”
그동안 볼티모어는 끈끈한 팀플레이를 통해 전문가들의 예상치보다 더 좋은 성적을 거두는 야구를 보여줬다. 그리고 이런 야구를 볼 수 있는 것도 올해가 마지막일지 모른다. 홈구장 캠든야즈는 오랜 기간 팬들의 마음에 자리를 잡아온 선수들과 그 틈새를 비집고 들어가야 할 유망주들이 함께 어울리며 전통을 계승하는 장이 되어야 한다. 또 다른 암흑기의 시작일지, 새로운 전성기의 시작일지 그 결과는 아무도 모른다.
그저 캠든야즈에서 치러질 매 경기를 차분히 기억에 아로새기며, 오랜 기간 삶에 닿아있던 것과의 이별을 준비하고 있을 뿐.
기록 출처: fangraphs.com, stlsports.com, stevetheump.com
에디터=야구공작소 이택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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