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회의 4번타자’였던 사나이

[야구공작소 양정웅] 2010년 6월 17일, 부산 사직야구장에서는 롯데 자이언츠와 삼성 라이온즈의 경기가 열리고 있었다. 남아공 월드컵 아르헨티나전을 응원하기 위해 평일임에도 16시 30분에 개시된 경기였다. 이날은 4개 구장에 17,256명의 관중만이 찾았고, 그나마 경기 종료 후 단체응원이 예정되었던 사직구장의 입장객이 전체의 절반이 넘는 8,735명이었다.

경기장을 찾은 관중들은 20시 30분에 축구가 시작이었기 때문에 그 전에 무난하게 경기가 끝날 것이라 생각했다. 그리고 양 팀 선수들은 타임아웃이 없는 스포츠의 재미를 보여주려는 듯 거짓말 같이 연장승부에 돌입했다. 킥오프를 15분 정도 앞둔 연장 10회말, 이전 타석에서 홈런과 볼넷을 얻어내며 타격감을 올렸던 롯데의 4번타자 이대호가 좌중간 안타를 치고 1루를 밟았다. 제리 로이스터 감독은 바쁘게 움직였다. 그리고 이대호는 덕아웃으로 돌아왔다. 전광판에 찍힌 것은 ‘R(대주자) 이승화.’

관중들의 무관심 속에 이우민은 4번타자 자리에 대주자로 투입되었다. (사진 = 중계화면 캡쳐)

끝내기 득점의 사명을 안고 그라운드에 투입된 이승화(개명 후 이우민)는 뒤이어 터진 6번 전준우의 중견수 앞 안타 때 기민한 주루 플레이로 3루까지 내달렸다. 그의 센스로 인해 1사 2, 3루의 위기를 맞은 삼성은 결국 만루작전을 써야만 했다. 그가 이 경기의 결승점으로 바뀌기까지 27m가 남았다.

그러나 그가 대주자로 보여줄 수 있었던 기쁨의 순간은 여기까지였다. 1사 만루에 들어선 장성우는 우익수 얕은 플라이를 쳤고 이승화는 홈에 승부를 걸었다. 그러나 우익수의 송구는 포수 미트에 정확히 배달되었고 이승화는 동료들의 물세례 대신 글러브를 받고 쓸쓸히 다음 이닝 수비로 투입되어야만 했다. 드디어 축구를 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던 관중들의 입에선 짧은 탄식, 그리고 이따금 욕설이 쏟아졌다.

타순이 한 바퀴 돌아 12회말 4번타자로 나온 그는 0볼 2스트라이크에서 볼넷을 얻어내고 또 한 번 재치 있는 주루를 보여주며 3루까지 갔지만 이번에도 후속타 불발로 득점에는 실패했다.

 

그도 봄이라 불리던 때가 있었다

1994년 제6회 롯데기 야구대회 초등부 수상내역. 이우민(당시 이승화)은 타격 1위를 차지했다. 이른바 ‘수영초 타격왕’의 전설이었다. (사진 = 인터넷 커뮤니티 캡쳐)

다큐멘터리 영화 ‘스타로부터 스무 발자국’(2013)은 스타 가수들 뒤에서 화음을 넣어주는 ‘백업 가수’들을 조명한 영화이다. 영화에서 백업 가수들은 마이클 잭슨, 스티비 원더, 엘튼 존 등 음악사에 길이 남을 가수들의 뒤에서 그들의 음악을 더욱 두텁게 만들어주었다. 말 그대로 스타로부터 스무 발자국밖에 안 떨어진, 그러나 역설적으로 스타와 가장 멀리 떨어진 존재들이었다. 분명 평균 이상의 실력을 가졌지만 아무도 그들에게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야구에서는 ‘대(代)’자가 붙은 역할을 가진 선수들이 바로 이런 존재들이다. 대타, 대수비, 대주자 등은 보통 스포트라이트와는 거리가 멀다. 이들은 경기 시작을 벤치에서 시작하고 4회나 5회가 지나서야 그라운드에 모습을 드러낸다. 물론 다이아몬드 안이나 외야 잔디밭이 아닌 덕아웃 근처에서. 그렇게 감독에게 어필하듯 워밍업을 하는 그들에게는 경기 출장의 기회가 올 수도 있고 오지 않을 수도 있다. 이런 선수들의 삶은 고달프기만 하다.

그러나 이런 선수들이라고 해서 봄날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들도 아마추어 시절에는 팀에서 이름깨나 날리던 선수들이었다. 이우민도 마찬가지였다. 인터넷에서 ‘수영초 타격왕’이라는 이름으로 회자되는 1994년 롯데기 아마추어 대회 초등부 타격 1위, 비록 팀은 결승에서 군산상고 이승호에게 폭격당하며 우승에는 실패했지만 2학년 신분으로 받았던 부산상고 시절 1999년 황금사자기 대회의 미기상. 그가 아마추어 시절 어느 정도의 선수였는지를 보여주는 상들이라 할 수 있다.

그 덕분에 그는 신인 드래프트에서 2차 2라운드에 이름이 불린다. 그의 뒤에 호명된 선수들 중에는 김강민, 손승락, 최준석 등 훗날 중·대형 FA 계약을 맺는 선수도 있었다. 그는 초등학교 동창이던 이대호와 함께 바로 롯데에 입단했다. 당시 그가 받았던 계약금 1억 원은 팀 내에서 사실상 1차 지명자였던 2차 1라운더 이대호의 2억1천만 원 다음가는 액수였다.

 

불행은 최고의 순간 찾아온다

그의 커리어하이 시즌이었던 2007년. 철벽 마무리 오승환에게 끝내기 안타를 때리며 수훈선수로 선정된 당시의 모습. (사진 = 롯데 자이언츠 제공)

큰 포부를 가지고 프로에 입문한 이우민이었지만 프로의 벽은 생각보다 높았다. 데뷔 첫 해 16경기 출장에 그친 그는 2년차였던 2002년 팀의 역대급 루징 시즌(승률 0.256)을 기회로 삼아 174타석의 기회를 받았지만 0.188의 저조한 타율을 보여주었다. 첫 3년간 몸에 맞는 볼을 제외하면(타석 당 HBP% 9%) 이렇다 할 활약을 보여주지 못한 그는 결국 상무 야구단에 입대하며 훗날을 기약했다.

전역 후 팀에 복귀한 그는 팀의 활력소가 되어달라는 기대를 뒤로 하고 2할이 안되는 타율로 주전자리조차 신인 황성용(개명 후 황동채)에게 내주어야 했다. 모든 걸 바꾸겠다는 마음으로 시즌 후 지바 롯데 캠프에 참석한 그는 그곳에서 야구에 대한 많은 것을 배워왔다. 그리고 맞이한 2007년은 그의 프로생활 중 최고의 시즌이 되었다.

개막전부터 주전 중견수와 테이블세터의 중책을 맡은 그는 그 역할을 100% 수행했다. 4월 한 달 동안 0.311의 타율로 공격의 첨병 역할을 맡은 그는 부진했던 정수근과 김주찬을 대신해 롯데 외야의 중심이 되어주었다. 곧 사그라들 것이라는 세간의 우려 섞인 시선에도 6월까지 3할 타율을 유지했다. 그렇지만 ‘호사다마(好事多魔)’라 했던가. 야구인생 최고의 순간에 불행은 찾아왔다.

6월 하순 어느 경기에서 홈을 향해 돌격해 들어간 그는 슬라이딩 도중 손목이 골절되는 부상을 입었다. 당시 최다안타 3위(70안타)에 이전 5경기에서 16타수 7안타의 맹타를 휘둘렀기에 더 안타까운 부상이었다. 부상에도 불구하고 당시 동군 외야수 중 득표수 1위(233,454표)로 올스타전에 뽑혔지만 이 부상으로 인해 7월과 8월을 통째로 날린 그는 결국 규정타석도 채우지 못한 채 2007년을 마감해야만 했다.

그리고 그의 야구인생의 황금기는 서서히, 하지만 너무 일찍 사그라들었다.

 

피나는 노력의 대가는 어디로 가는가

2007년의 활약 이후 이우민은 붙박이 주전으로 나서지 못했다. 그의 역할은 주로 대주자, 대수비였다. (사진 = 롯데 자이언츠 제공)

화려했던 2007년 이후 그는 스포트라이트에서 멀어졌다. 수영초등학교 동기였던 이대호가 팀의 중심으로 우뚝 섰고, 투수였던 추신수마저 미국에서 타자로 전향해 호타준족의 면모를 메이저리그에서 자랑하는 동안 그는 다시 백업으로 돌아가야 했다. 카림 가르시아의 영입으로 외야 한 자리가 줄게 된 상황에서 맞이한 2008년, 4월까지 24타수 3안타로 시작한 이우민은 결국 시즌 내내 주전을 차지하지 못했고 김주찬은커녕 전년도 백업이던 이인구에게도 밀렸다. 수비력을 믿고 로이스터 감독이 주전 중견수로 출장시킨 준플레이오프 1차전에서는 발목을 다치며 남은 경기에서 벤치만 달궈야만 했다.

항상 모든 감독들은 시즌 초 키플레이어로 이우민을 꼽곤 했다. 백업으로 두기엔 너무나 아까운 리그 정상급 수비력, 그리고 조금만 고치면 평균급 타격이 가능할 것 같은 스윙을 보고서는 어느 감독이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있을까. 그러나 시즌이 시작하면 선발 라인업에 넣기도 민망한 기록을 보여주며 코칭스태프에게 깊은 고민을 안겨주었다.

2011년은 이러한 패턴의 대표적인 시즌이었다. 새로 부임한 양승호 감독은 이우민을 키플레이어로 찍었고 전년도 19홈런을 친 전준우를 3루수로 돌려놓으면서까지 그를 주전 중견수로 낙점했다. 그렇게 받은 기회에서 그는 22타수 무안타라는 극악의 기록을 보여주었고, ‘야구 못해도 연봉은 나온다’는 위로에도 불구하고 2군으로 내려가며 짧았던 주전의 시간을 마무리 지었다.

차라리 게으르고 성격이라도 좋지 않으면 팬들도 실컷 욕이라도 했을 것을 그는 너무 열심히 하는 너무 착한 선수였다. 그의 손은 많은 연습으로 물집이 잡혔다가 터지길 반복하며 보기 흉한 모양이 되었다. 게다가 그와 같이 뛰었던 펠릭스 호세가 지적했듯이 마음이 약해서 투수와 싸우지 못하고 피해가는 모습을 보여주며 팬들을 답답하게 만들었다. 부모의 입장에서는 나쁜 아이들과 어울리지도 않고 공부도 열심히 하는데 성적은 나오지 않는 ‘아픈 손가락’ 같은 존재였다.

 

17년의 헌신, 안녕을 고하는 ‘9회의 4번타자’

2017년 5월 23일 SK전 연장에서 극적인 홈런을 치고 금의환향하는 이우민. 이때까지도 2017년 겨울이 이렇게 추울거라곤 생각하지 못했다. (사진 = 롯데 자이언츠 제공)

이렇듯 화려했던 2007년 이후 이우민은 스포트라이트에서 멀어졌지만 자신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했다. 주전으로 나서진 못했다. 그렇지만 동시기의 이대형이나 이종욱이 주자였다면 이미 홈플레이트를 훑고 동료와 기쁨을 나눌 수 있었던 타구에도 3루 코치의 간절한 멈춤 지시를 받고 3루에 겨우 멈춰선 이대호, 그리고 그런 사태를 만들지 않겠다는 듯 아예 코치의 지시를 무시하고 홈으로 내달려 이미 홈에 도달한 공에 멋쩍게 하이파이브를 할 수밖에 없었던 가르시아를 대신해 경기 후반이면 대주자로 나가 ‘9회의 4번타자’가 되곤 했다.

또 메이저리그 진기명기 필름에서나 볼 수 있었던 ‘글러브 토스 홈런’을 만들어주며 외야수비에 있어서는 자신을 빼놓고 말하지 말라는 듯 플레이했던 김주찬이나, 펜스가 앞에 있건 없건 미친 듯이 돌진하여 공의 최종 낙구지점과는 전혀 상관없이 자신만의 위치에서 수비를 하던 손아섭을 대신해 외야에서 그물망 같은 수비를 보여주었다.

 

젊은 날 이우민의 수비는 리그 정상급이었다. 팬들은 ‘타격만 좋았으면…’하는 아쉬움을 드러냈다. (사진 = 롯데 자이언츠 제공)

그러면서도 가끔은 정말로 4번타자에 어울리는 활약을 해주곤 했다. 2014년 6월 26일 대전 한화전. 선발 4번타자 겸 1루수로 출장한 루이스 히메네스가 손바닥 통증을 호소하자 이우민은 히메네스를 대신해 5회부터 수비에 들어갔다. 그리고 타석이 돌아온 6회초, 1사 2, 3루 찬스에서 통렬한 역전 2타점 적시타를 기록했다. 두 번째 타석에서도 좋은 선구안으로 볼넷을 얻어내며 만루를 만들었고 추가점의 발판이 되어주었다.

그렇게 보낸 일 년 일 년이 더해져 쌓인 15시즌은 롯데에서 염종석(17시즌)과 김응국(16시즌) 다음가는 숫자였다. 입단 동기 이대호는 물론이고 최다경기 1위에 오른 강민호도 이루지 못한 위업이었다. 백업으로 주로 나오면서도 2017년 9월 17일 SK전에서는 통산 1,000경기 출장을 달성하기도 했다.

 

통산 1,000경기 출장 기념식 이후 동료들의 축하를 받는 이우민. 어쩌면 먼저 한 은퇴식이 될 지도 모를 장면이다. (사진 = 롯데 자이언츠 제공)

2016년이 끝난 후 FA 자격을 취득했지만 부진으로 권리 행사를 포기했던 그는 2017년 초반의 맹활약을 발판으로 FA를 신청했다. 선수 본인에게는 일생에 한 번뿐인 기회를 그냥 보내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실제로 세간의 예상도 적당한 금액에 계약이 마무리될 것이라는 게 중론이었다. 그러나 보기 드물게 눈이 내린 부산의 이번 겨울 날씨만큼이나 시장은 조용했다.

협상 초기 코치직을 제의했던 원 소속팀 롯데는 이를 거절하자 아예 더 이상의 협상은 없다고 선언했다. 17년간 한 팀에 헌신해온 야구인생의 결말은 헌신짝이었던 것이다. 이우민은 이런 상황에서도 해외에서 자비로 훈련하면서 몸을 만들었다. 그러나 구단들의 냉대는 36세의 베테랑에게도 힘든 일이었다. 결국 이우민은 수영초등학교 시절 이후 20년 넘게 달았던 ‘현역선수’라는 타이틀을 놓게 되었다.

이우민이라는 타자는, 사실 프로야구 역사에 있어서 돋보이는 타자는 아니다. 2017년 기준 1,800타수 이상 기록한 타자 중에서 그의 타율(0.232)은 229위(최하위는 240위 허준, 타율 0.220). 결코 높다고 할 수 없는 순위이다. 해당 팀 팬을 제외한다면 술자리에서도 쉽사리 나오지는 않을 이름이다. 그래서 팬들은 더더욱 그의 FA 신청 자체에 의문을 가졌고, 때로는 비아냥 섞인 말들도 뱉곤 했다.

그러나 성적이 FA 신청을 가로막는 이유는 될 수 없다. FA는 선수의 권리이다. 프로 선수 중 아무나 자격을 얻는 것이 아니다. 프로 선수로 최소 수년을 꾸준히 뛰어야 얻는 상장과도 같은 것이다. FA 신청으로 인한 결과는 본인이 책임져야 한다. 그러나 그가 17년 동안 선수생활을 하면서 누려야 할 권리까지 비난할 권리는 아무도 가지고 있지 않다.

그리고 그는 롯데의 ‘프랜차이즈’였다. 그 누구보다 롯데에서 오래 뛰었으며 화려한 시간 이후 긴 어둠의 터널을 지나면서도 포기하지 않았고 묵묵히 팀에서 자신의 역할을 수행했다. 어디서 무얼 하든 ‘9회의 4번타자’는 자신의 위치에서 제 역할을 묵묵히 수행할 것이다. 그가 제2의 인생에서는 ‘언제나’ 4번타자이기를 바란다.

 

(일러스트=야구공작소 박주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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