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일러스트 = 야구공작소 변영아 >
흔히들 야구는 ‘통계’의 스포츠라고 말한다. 실제로 선수의 활약을 수치화한 수많은 지표가 세상에 나와 있다. 이러한 통계 자료를 통해 선수들의 기술적 장단점을 쉽게 파악할 수 있다. 이는 구단과 팬들이 선수를 판단하는 근거로 활용되기도 한다.
하지만 야구가 오직 기술과 숫자로만 이루어져 있지는 않다. 더그아웃 리더십, 팀 케미스트리, 선수 개인의 슬럼프 등 성적과 관련된 여러 부분에서 멘탈적 요소가 작동한다. 이러한 멘탈적인 부분들은 수치로는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그 중요성은 무엇보다도 크다.
멘탈 문제로 어려움을 겪는 선수들
24시간 팬들과 미디어를 상대해야 하는 스포츠 선수들은 엄청난 심리적 압박감에 시달린다. 플레이 하나에 따라 경기의 결과가 달라지기도 하는 만큼, 선수들의 사소한 플레이에도 사람들의 이목이 쏠린다. 치명적인 실책을 저지른 날에는 경기장에서 팬들의 야유를 받기도 한다. 이 야유는 경기장을 넘어서 온라인상에서도 계속해서 이어진다.
또한 슬럼프가 찾아오거나 부진이 길어질 때도 선수들은 심한 스트레스를 받는다. 프로는 끊임없는 경쟁의 세계다. 주춤하는 사이 자신의 자리가 없어질 수도 있다. 보스턴 레드삭스의 재런 듀란이 부진한 성적과 팬들의 비난에 멘탈적인 어려움을 겪고 자살을 시도한 사건은 선수들의 극심한 압박감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예시다.

< 멘탈 문제로 커리어를 마감한 오스틴 메도우즈 >
멘탈 문제를 극복하지 못하고 결국 커리어를 일찍 마감한 선수도 있다. 2013년 전체 9순위로 피츠버그 파이리츠에 입단한 오스틴 메도우즈는 주목받는 유망주였다. 이후 트레이드로 건너간 탬파베이 레이스에서 잠재력을 터트렸다. 커리어 첫 풀타임 시즌에 OPS 0.922, 홈런 33개를 때려내며 탬파베이의 신성으로 떠올랐다.
하지만 디트로이트로 이적한 후 지속적인 현기증을 호소하면서 부상자 명단에 올랐고, 이후 정신 건강 문제를 앓고 있었다는 것이 밝혀졌다. 남은 기간을 치료에 전념한 메도우즈는 다음 시즌을 의욕적으로 준비했다. 하지만 여전한 불안 증세가 계속 발목을 잡았고, 결국 시즌 종료 후 방출을 당하게 된다. 현재까지도 소속팀을 찾지 못한 메도우즈는 사실상 은퇴 수순을 밟고 있다. 멘탈 문제가 얼마나 무서운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이렇듯 수많은 압박 속에서 자신을 증명해야 하는 선수들에게 멘탈을 지키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아무리 보유한 재능과 기술이 뛰어나도 멘탈적으로 무너진다면 커리어를 이어가는데 문제가 발생할 수 있다. 야구도 결국 ‘사람’이 하는 스포츠기 때문이다.
멘탈을 지키기 위한 구단들의 노력
메이저리그 구단들도 이러한 멘탈의 중요성을 이미 파악하고 있다. 이들은 다양한 방법을 통해 선수들의 멘탈을 관리한다. 텍사스 레인저스는 ‘멘탈 퍼포먼스 코디네이터’라는 새로운 직책을 만들어 경기장뿐만 아니라 웨이트 트레이닝, 영양 관리, 수면 분석 등 모든 분야에서 선수들의 멘탈을 최상의 상태로 만들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이러한 ‘멘탈 코치’는 더 이상 메이저리그에서 낯선 보직이 아니다. 오히려 좋은 성적을 내기 위한 필수적인 요소다.

< 시애틀 매리너스 스프링캠프 훈련장에 설치된 얼음물 욕조 >
시애틀 매리너스의 스프링캠프 훈련장에는 언제나 얼음물이 담긴 검은색 욕조 하나가 있다. 외진 구석에 놓여있는 이 욕조에서는 산맥 위로 떠오르는 해를 조용히 감상할 수 있다. 근육통을 줄이고 원활한 혈액순환을 돕는 얼음물 욕조는 이미 많은 구단에서 활용하고 있다. 하지만 시애틀의 얼음물 욕조는 신체적 이점보다는 멘탈적 이점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자연에 둘러싸인 평온한 분위기에서 몸을 담근 선수들은 압박 속에서도 안정적으로 호흡하는 법을 배운다.
이 훈련 방법을 제시한 사람은 시애틀의 멘탈 코치 아담 버네로다. 버네로는 정규 시즌 내내 팀과 함께하며 선수들과 끊임없이 소통한다. 시애틀의 선발 투수 브라이스 밀러는 편하게 고민을 털어놓을 수 있는 버네로의 존재가 자신에게 많은 도움이 되었다고 밝혔다.
2024년 여름, 경기력이 흔들리던 밀러는 버네로를 찾아갔다. 밀러의 고민을 들은 버네로는 머릿속에 깔때기를 떠올리는 ‘펀넬링(funneling)’이라는 멘탈 훈련을 추천했다. 이는 경기 상황에서 시야와 생각을 점점 좁혀 핵심 목표에만 집중하도록 돕는 심리 기법으로, 잡념과 불안을 줄이고 현재 해야 할 동작에 몰입하게 한다. 마치 깔때기 입구에서 출구로 흐르는 물처럼, 복잡한 생각을 하나의 단순한 행동으로 모으는 것이다.
이후 밀러는 마지막 15경기에서 평균자책점 1.94를 기록하며 시즌을 마무리했다.

< 멘탈 코치의 도움을 받은 프램버 발데스 >
이렇듯 멘탈 코치의 존재는 선수 개인에게 긍정적인 변화를 불러온다. 휴스턴 애스트로스의 프램버 발데스는 커리어 초반 스트라이크를 던지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뛰어난 구위에도 첫 2시즌 동안 평균자책점 4.60에 그쳤고 9이닝당 볼넷은 5.7개에 달했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고자 발데스는 도미니카공화국에 있는 휴스턴 멘탈 강화팀의 일원인 앤디 누녜스 박사를 찾아갔다.
누녜스는 꾸준한 대화를 통해 발데스가 미국 생활에 적응하고 경기에서 멘탈적으로 안정을 찾을 수 있도록 도와줬다. 이를 통해 이전까지 마운드에서 긴장과 불안에 휩싸였던 발데스는 요가, 심호흡 등을 통해 스스로를 조절할 수 있게 되었다. 이후 발데스는 리그 최고의 좌완 투수 중 한 명으로 발돋움했고, 이번 시즌도 2점대 평균자책점을 기록하며 휴스턴의 선발진을 이끌고 있다.
지금도 발데스가 경기 중간에 눈을 감고 명상에 빠지거나, 마운드 위에서 미소를 지으며 천천히 걸어 다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이러한 행동들은 모두 심리적 안정을 찾기 위한 발데스의 개인적 루틴이다. 결국 멘탈 관리가 발데스의 커리어를 성공으로 이끈 것이다.
마치며
스포츠 선수는 수많은 사람들의 감시를 받으며 살아간다. 경기장 안팎에서 사소한 실수가 커리어에 큰 영향을 미칠 수도 있다. 잠깐의 부진에도 대중의 질타를 받는 것이 이들의 일상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선수들은 멘탈적으로 엄청난 압박을 느낀다.
야구는 더 하다. 메이저리그 기준 한 시즌에 치르는 경기 수만 162경기다. 실패할 기회가 그만큼 많은 것이다. 아무리 최고의 선수라도 162경기 내내 최고의 컨디션을 유지할 수는 없다. 여기에 투수는 더 많은 심리적 부담을 느낀다. 한 경기에서 여러 타석을 들어서는 타자는 자신의 실수를 만회할 기회가 빠르게 온다. 하지만 선발 투수는 등판 이후 5일을 기다려야 한다. 그 기간동안 투수는 자신의 부진을 계속 곱씹게 된다.
하지만 이는 선수들의 숙명이자 책임이기도 하다. 이들은 선수이자 동시에 연예인과 같은 엔터테이너다. 많은 사람들에게 야구는 일상의 탈출구이자 위안이다. 그들은 야구의 재미를 느끼고 싶어 할 뿐, 선수들의 멘탈적 희생에는 그다지 관심이 없다. 결국 선수들이 느끼는 심리적 압박감은 피할 수 없는 것이다.
그렇기에 야구에서 멘탈적 요소를 더 주목할 필요가 있다. 특히 SNS 시대에는 선수들의 멘탈 관리 여부가 커리어의 성패를 좌우한다. 이는 기술적 지표를 넘어서는 결정적 변수이기도 하다. 이러한 요인은 구속, 배트 스피드와 같은 기술적 요소를 초월한다. 야구가 ‘멘탈’의 스포츠인 이유다.
참고 = MLB.com, ESPN, Fangraphs
야구공작소 김태현 칼럼니스트
에디터 = 야구공작소 천태인, 전언수
일러스트 = 야구공작소 변영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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