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야구의 태동, 그 곁에 있었던 일본

< 일러스트 = 야구공작소 김민서 >

한국 야구는 1904년 미국 선교사 필립 질레트가 야구 장비를 들여온 것에서부터 시작됐다. 미국이 한국에 야구라는 씨앗을 심었다면, 그 씨앗이 성장하는 과정에서 가장 큰 영향을 미친 것은 일본이다.

프로야구 초창기 김일융, 장명부를 비롯한 다수의 재일교포 야구선수가 활약했고 1990년대부터는 다수의 스타 플레이어들이 일본 무대에 진출했다. 국제 대회에서의 한일전은 프로야구가 국내 최고 인기 스포츠로 성장할 수 있었던 주 원동력이었다.

이렇듯 한국 야구의 역사에서 일본의 존재감은 작지 않다. 본 글에서는 프로야구 출범 이전 한국 야구 초창기 역사에서 일본이라는 나라의 흔적과 영향력을 되짚어 보려 한다.

 

일제강점기에서 시작된 야구 인기

한국 야구와 일본 야구의 첫 만남은 1909년 조직된 동경유학생야구단이다. 동경유학생야구단은 1909년 도쿄의 한국 유학생들이 결성한 한국흥학회 모국방문단의 일원이었다. 이들은 한국보다 30년 이상 빨랐던 일본 야구를 경험해 뛰어난 실력을 자랑했다.

동경유학생야구단은 한국 최초의 야구단인 황성 YMCA 야구단을 포함해 여러 야구팀과 친선경기를 치렀다. 이들은 서북지방을 중심으로 경기를 치르며 압도적인 실력으로 이제 막 걸음을 뗀 한국 야구에 충격을 가져왔다. 1912년에는 YMCA 야구단과 연합팀을 구성했고 그 해 11월 국내 스포츠 역사상 최초로 해외 원정에 나서 일본 야구팀들과 경기를 치렀다. 동경유학생야구단의 방한은 한국 야구가 처음으로 ‘외부의 충격’을 통해 발전하기 시작한 계기라고 할 수 있었다.

< 1920년 제1회 전조선야구대회 개회식에서 시구하는 이상재 >

1920년대 조선 총독부는 한국 통치 기조를 문화통치로 전환했다. 그 결과, 다양한 스포츠 활동이 활성화됐다. 그중 최고 인기 종목은 야구였다. 1920년 조선체육회에서 주최한 전조선야구대회를 시작으로 여러 언론사들이 야구 대회를 개최한 덕에 야구는 주요 인기 스포츠로 성장할 수 있었다.

한국 최초의 스포츠 중계방송도 야구였다. 1927년 9월 전조선야구대회 중계방송을 시작으로 야구뿐만 아니라 농구, 권투 등 다양한 스포츠 중계가 이뤄졌다. 1920년대는 라디오가 점차 보급되던 시기였는데 이때 송출된 방송 대다수는 스포츠 중계였다. 최고 인기 종목 역시 야구였는데 1930년 4월부터 10월까지 경성방송국에서 송출한 야구 중계가 70회에 달할 정도였다.

이 시기 야구 인기는 야구가 라디오 등의 매체와 결합해 새로운 근대적 여가생활의 주축이 됐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또한 2020년대 한국 야구가 맞이한 천만 관중 시대는 한 세기 전부터 시작된 한국인의 야구 사랑에서 출발한 것이었다.

 

다카라즈카 운동협회와 손효준

야구의 인기가 치솟으면서 자연스레 우수한 선수들이 다수 배출됐다. 그러나 진입장벽은 여전히 높았다. 당시 한국인들이 경기장과 야구 장비를 마련하는 것은 매우 힘들었다. 야구로 생계를 유지할 방법도 실업팀이 있는 기업이나 관공서 입사뿐이었다. 그마저도 한국인이라는 이유로 급여 차별을 겪었다.

암울한 현실 속에서도 일본 선수 못지않은 대우를 받았던 한국 선수가 있었다. 주인공은 한국 야구 공식경기 최초의 홈런타자인 손효준이다. 손효준이 속한 일본운동협회는 한국 원정에서 많은 관중을 동원하기 위해 실력이 검증된 한국 선수들을 적극적으로 영입했다.

손효준은 4번타자라는 위치와 대졸 회사원보다 좋았던 팀의 처우 그리고 한국인 차별을 경계했던 팀 분위기를 고려하면 한국인임에도 상당히 좋은 대우를 받았을 것으로 보인다. 개인의 성공을 넘어 식민지 상황에서도 실력으로 차별의 벽을 넘어설 수 있다는 희망을 보여주는 사례다.

다카라즈카 운동협회로의 재창단 후에도 이들은 여러 차례 한국 원정을 오는 등 한국 야구와 밀접한 관계를 이어갔다. 해방 후 손효준은 조선야구협회 이사장 등을 역임했고, 그의 동료들도 초창기 한국 야구계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았다. 다카라즈카 운동협회가 한국 야구사에서 중요한 의의를 가지는 이유다.

 

실업 야구 열풍

일본에서 실업 야구는 1910년대 후반 제1차 세계대전으로 경제가 호황을 맞이하며 열기를 띠었다. 식민지 한국에서도 일본인 주도로 다수의 실업 야구팀이 창단돼 여러 대회가 개최됐다. 일본 실업야구팀이 한국 언론사의 초청으로 한국에서 친선경기를 치르기도 했다.

도쿄니치니치 신문(現 마이니치 신문) 소속 시마자키 신타로는 고시엔 대회에서 영감을 얻어 일본 제국 내지와 외지(한국, 만주국)의 실업 야구팀을 참가시키는 대회를 구상했다. 이를 바탕으로 일본 최고의 실업 야구팀을 가리는 대회를 제안했다. 

그렇게 개최된 것이 1927년 제1회 전일본도시대항야구대회다. 본 대회는 2025년에 제96회를 맞이할 정도로 유서 깊은 사회인 야구 대회다. 한국에서도 본 대회에 참여하기 위해 1928년 조선실업야구연맹이 조직됐고 지역 예선을 통한 대표팀 선발이 이뤄졌다.

< 1934년 메이저리그 선발팀 방일경기에서 베이브 루스와 이영민 >

주로 출전했던 팀은 전경성팀으로, 경성에서 활동하던 야구 선수들의 올스타팀이다. 그리고 이 팀의 핵심 선수로 활동했던 이가 이영민이다. 제7회 전일본도시대항야구대회에서 이영민이 속한 전경성팀은 우승 후보로 꼽혔고 이영민의 활약으로 한국팀 최초로 결승전에 진출했다. 

당시 한국 언론들은 전경성팀과 이영민의 활약을 대대적으로 보도했다. 대회는 아쉽게도 준우승으로 끝났지만, 야구 한일전 라이벌리의 시작이자 한국인들의 민족적 자긍심을 불러일으켰던 선전이었다.

 

한국 야구의 암흑기

조금씩 성장해 나가던 한국 야구는 1930년대부터 기나긴 암흑기에 빠졌다. 그 시발점은 1932년 4월 일본 문부성에서 발표한 야구 통제령이다. 당시 일본 야구계는 각종 비리가 만연했다. 일본 정부는 이를 통제할 수 있는 조직의 결성을 지시했으나 이행되지 않았다. 이에 일본 문부성은 학생 야구 건전화를 목적으로 직접 야구를 통제하겠다는 결정을 내렸다.

< 야구통제령 개정을 보도한 1935년 3월 27일 자 조선중앙일보 기사 >

야구 통제령은 한국에도 영향을 미쳤다. 1932년 9월 조선 총독부는 학무국의 허가를 받지 않은 야구 대회 제한, 유료 경기 금지 등을 골자로 한 야구 통제령을 실시했다. 그 결과, 일본이 주관하는 야구 대회를 제외하고 한국 언론사 등이 개최하던 다수의 야구 대회가 폐지됐다. 

표면적인 명분은 교육 건전화 등이었지만, 대규모 체육 행사가 한국인의 민족의식을 고취할 수 있다는 정치적 판단도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프로야구 출범 후 5월 18일 광주에서 해태 타이거즈 경기가 금지된 것처럼 야구가 민중 결집의 수단이 될 수 있었기에 억압의 대상이 된 것이다.

1941년 태평양 전쟁이 발발하면서 상황은 더 악화됐다. 일본은 전면적인 총력전 체제를 구축하며 스포츠를 사치로 간주하고 억제했다. 특히 야구는 미국의 대표 스포츠로 인식돼 더 금기시됐고 선수들은 징병되거나 군수 공장에 강제 동원됐다. 한국에서는 야구 자체가 전면 금지됐으며 경기장은 군용지로 전용되거나 폐쇄됐다.

한국 야구는 일본이 패망하고 조선야구협회가 결성된 1945년에 되어서야 다시 일어설 수 있었다. 하지만 김종필 前 국무총리의 형인 김종락 前 대한야구협회장의 지원이 시작된 1960년대 전까지는 최소한의 체계조차 갖추지 못했다.

 

재일교포들이 물꼬를 튼 야구 교류

끊겼던 교류의 물꼬가 다시 트인 시점은 1956년이었다. 한국일보 주관으로 재일동포학생야구단이 방한 경기를 치른 것이다. 재일동포학생야구단은 1997년까지 주기적으로 파견됐는데 1972년 제2회 봉황대기 대회부터는 재일동포 팀을 구성해 토너먼트전에 참가했다. 이들의 이야기는 2015년 개봉한 ‘그라운드의 이방인’이라는 영화를 통해 다뤄지기도 했다.

재일동포학생야구단 방한 경기의 대표적인 수혜자는 장훈이다. 장훈은 해당 경기에서 일본 스카우터들의 눈도장을 받아서 토에이 플라이어즈(現 닛폰햄 파이터즈)에 입단해 프로야구 선수 생활을 시작할 수 있었다. 김성근도 제4회 재일동포학생야구단에 이름을 올려 처음 한국 땅을 밟았고 1961년 故 배수찬의 도움을 받아 한국에서 야구 생활을 시작할 수 있었다.

< 1982년 봉황대기 대회에 참가한 재일동포팀 >

1960년대에도 양국의 야구 교류는 계속됐다. 1962년 6월 한일친선야구대회가 개최됐다. 이때 서울에서 진행된 중소기업은행과 메이지대학의 경기는 한국 최초로 야외 스포츠 경기가 TV로 중계된 사례였다. 같은 해 백인천이 한국인으로는 최초로 일본 프로야구에 진출하기도 했다.

1975년에는 일본의 한국계 선수 원정팀이 한국을 방문해 서울에서 친선경기를 치렀다. 한국 정부가 장훈과 故 신격호 지바 롯데 마린스 구단주에게 일본의 한국계 선수들이 방한해 프로야구의 진수를 보여달라고 요청해 성사된 것이었다. 장훈은 선수 겸 감독으로 선수단을 이끌고 한국을 방문했고 그와 함께 방한한 일본 심판들이 한국 심판들을 교육하기도 했다. 한일관계라는 복잡한 역사 속에서 야구가 외교적·문화적 가교 역할을 수행했음을 보여주는 사례였다.

 

마치며

미국에서 씨앗을 받아 뿌리내린 한국 야구는 일본의 영향을 받으며 오늘날에 이르렀다. 일제강점기라는 역사적 배경 속에서 한국 야구는 일본과의 교류를 통해 성장했다. 해방 이후 재일동포학생야구단을 통해 교류가 복원됐고 재일교포 선수들의 활약과 한일전 등을 통해 한국 야구는 꾸준히 발전해 왔다.

2025년은 광복 80주년인 동시에 한일 수교 60주년인 해다. 지난 세기가 고통의 역사였다면, 오늘은 교류와 성장의 역사여야 한다. 고통의 역사 속에서도 성장했던 한국 야구는 연이은 국제대회 고전, 뒤쳐진 구속 혁명 등의 과제에 직면해 있다.

어느 때보다 정보와 지식이 넘쳐나는 시대에서 한국 야구는 오늘날의 자신을 만든 일본의 성장을 다시 참고할 필요가 있다. 과거처럼 대등한 라이벌이 아니라, 앞서 나가는 야구의 선두 주자로 인식해야 한다. 그때 다시 한국 야구가 발전할 수 있는 길이 열릴 것이다.

 

참고 = 한겨레, 서울신문, 동아일보, 조선일보, 연합뉴스, 중앙일보,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야구연표, 한국야구사, 김은식. (2024). “1960~1970년대 한국실업야구의 야구사적 의의에 관한 연구”, 강원도: 한국스포츠인류학회, 남궁영호. (2013). “일제강점기 한국의 스포츠미디어에 관한 역사적 연구”. 경기도: 경기대학교, 이호윤. (2023). “1920년대 프로야구단 다카라즈카 운동협회와 조선 원정”. “일제강점기 전경성야구팀 결성과 제7회 전일본도시대항야구대회”. 서울: 한국일본근대학회, 이호윤. (2023). “일제강점기 조선의 실업야구와 전일본도시대항야구대회”. 서울: 한국일어일문학회, 이호윤. (2024). “일본 최초의 프로야구단 일본운동협회와 손효준”. 서울: 한국일본근대학회.

야구공작소 조승화 칼럼니스트

에디터 = 야구공작소 천태인, 전언수

일러스트 = 야구공작소 김민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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