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진 출처 = 국사편찬위원회 >
야구는 명실공히 우리나라의 최고 인기 스포츠지만 그 기원에 대한 논의는 많지 않았던 것이 사실이다. 특히 한국에 야구가 들어온 20세기 초반에는 일제강점기로 인해 남아있는 자료가 많지 않다. 이번 글에서는 먼저 한국 야구의 기원을 알아보고 한반도에 처음 야구가 전파되었던 시기의 모습을 살펴보려 한다.
한반도에 야구가 처음 들어온 날
일반적으로 우리나라의 야구는 1904년 미국인 선교사 필립 질레트(Philip Loring Gillett)가 황성기독교청년회의 회원들에게 지도한 것이 그 시초로 알려져 있다. 이는 한반도에서 조선인이 야구를 하게 된 시점을 기준으로 한 것이다. 하지만 조선인이라는 조건을 빼면 야구는 일제강점기 이전, 조선이 대한제국으로 국호를 변경하기 전부터 존재가 확인된다.
지금까지 남은 기록으로 확인된 한반도 최초의 경기는 한성(서울) 거주 미국인과 미국 해병대가 모화관 주변 공터에서 맞붙은 1896년 4월 25일 경기다. 해당 경기는 당시 언론인 독립신문의 영문판에 보도되면서 공식적으로 기록된 최초의 경기가 됐다.
공식 기록은 아니지만 야구에 대한 언급은 당시 외국인 거주자들의 개인적인 글에서도 찾을 수 있다. 특히 독립신문의 보도보다 2년 앞선 1894년에 작성된 것으로 추정되는 서울 거주 외국인의 일기에는 자신이 야구 경기에 초대받은 일이 언급된다.
< Elizabeth Greathouse의 개인 일기 표지 >
서울에서 거주하던 Elizabeth Greathouse는 1894년에 작성한 일기에서 10월 23일 열린 야구 경기에 자신이 초대받은 사실을 남겼다. 이때 경기가 열리는 곳은 동대문 내부의 군사 훈련장이라고 언급했는데, 해당 장소는 독립신문이 야구 경기를 보도할 때 경기장으로 언급한 곳 중 하나였다. 일기의 내용이 사실이라면 한반도에는 1896년 이전부터 경기가 열려왔고 야구가 한반도에 유입된 시점은 1894년 또는 그 이전이 된다.
그러나 한반도에 야구가 유입된 초기에는 야구가 외국인의 전유물이었다. 외국인의 경기는 앞의 경기 외에도 1899년 일본영어야학회(日本英語夜學會)의 일본인들이 인천에서 야구를 했던 기록 등이 있지만 1905년까지 야구 경기에 참여한 기록이 있는 조선인은 없다. 미국으로 귀화해 미국인이 된 서재필이 ‘Jaisohn’이라는 이름으로 미국인 팀에서 뛴 정도의 기록만 있다.
한국 야구의 대부, 필립 질레트
< 필립 질레트의 사진 >
외국인들의 경기를 지켜보기만 하던 조선인들이 직접 야구를 접할 수 있게 된 건 미국인 선교사 필립 질레트(Philip Loring Gillett)의 야구 보급 덕분이다. 야구가 한반도에 유입된 시점은 질레트가 국내 야구사에서 등장하기 이전이다. 질레트 이전에 헨리 먼로 브루엔(Henry Munro Bruen) 이라는 선교사가 조선 아이들에서 야구를 가르쳤다는 편지글도 있다. 하지만 본격적으로 조선인들이 야구를 접하게 된 것은 그의 공이 컸다.
1901년에 조선 YMCA 창설 책임자로 서울에 부임한 질레트는 자신이 학창 시절에 즐겼던 야구가 조선인과의 관계에 도움이 되겠다고 판단, YMCA 청년들에게 야구 장비를 보급하고 경기 규정을 알려주는 등 국내에서 야구 보급에 힘썼다. 이것이 1904년 봄부터 이루어진 활동이기에 현재 한국야구의 기원을 1904년으로 보고 있다. 특히 질레트를 비롯한 선교사들에게 야구를 배운 이들이 1910년대부터 규모가 커진 아마추어 야구계의 지도자로 나서면서 전국적으로 야구가 보급될 수 있었다.
야구 장비가 보급된 지 2년이 지난 1906년 2월에는 독일어를 가르치는 ‘덕어학교’ 팀과 황성기독교청년회(YMCA) 팀이 경기를 치렀다. 이는 현재까지 알려진 최초의 조선인 팀 간 경기다. 이 경기를 시작으로 조선인 팀의 야구 경기가 활성화됐고, 국내 학교에도 야구가 확산했다. 1908년에는 고종 황제가 야구팀을 불러 경기를 관람했다는 기록도 있다.
동경 유학생, 한국 야구에 자극을 주다
1900년대 초반부터 전국에 야구가 알려지기 시작했지만, 당시 경기 수준과 장비 상태는 무척 엉성했다. 미숙했던 국내 야구계에 신선한 충격을 통해 발전하는 계기를 만들어 준 존재는 일본 동경에서 유학하다 방학 때 한반도로 건너온 유학생 팀이었다.
일본은 1873년부터 야구를 접해 야구가 훨씬 앞서 있었다. 1909년, 일본에서 유학하며 야구를 배운 조선 학생들은 여름 방학 때 모국으로 건너와 야구 경기를 치렀다. 이 경기에서 유학생 팀은 황성 YMCA에 19-9로 승리하며 명확한 기량 차이를 보여줬다. 또한 이들은 이전까지 조선에 없었던 유니폼과 스파이크를 착용하고 왔으며 분명하지 않았던 야구 규칙을 알려주는 등 조선 야구계에 충격을 가져왔다.
동경 유학생과의 경기 이후 자극을 받은 황성 YMCA는 이전까지 부 활동에 머물렀던 야구부를 정식 야구단으로 조직하고 원정 경기를 진행하는 등 기량 향상에 신경을 쓰기 시작했다. 1910년에는 동경 유학생들처럼 유니폼을 갖춰 입고 경기를 나서면서 국내 최초로 유니폼을 갖춰 입은 팀이 됐다.
한편 동경 유학생들은 황성 YMCA와의 경기 이후로도 서북 지방을 돌아다니면서 시범경기를 개최했다. 한국야구사는 이러한 유학생들의 노력이 지방에도 야구 열기가 퍼진 계기라고 평가한다.
일제 강점기와 함께 맞이한 암흑기
이어진 1910년대는 한국 야구가 발전할 기회를 놓친 안타까운 시기로 꼽힌다. 또한 한글로 발행된 신문이 대부분 폐간돼 국내 야구 기록이 많이 남지 못한 시기이기도 하다.
1910년대 초반에는 국내에서 순조롭게 야구가 보급되는 듯한 모습을 보이면서 치러진 경기의 수도 늘어났다. 특히 황성 YMCA팀은 일본에 원정 경기를 다녀오기도 했는데, 이는 국내 스포츠 역사상 최초의 타국 원정 사례로 남아있다.
잘 풀릴 것만 같았던 흐름이지만 애석하게도 안타까운 우리나라의 역사에서 야구계도 자유롭지 못했다. 국내 야구의 뿌리를 심어준 필립 질레트가 1913년에 벌어진 ‘105인 사건’의 진실을 외국에 전달하다가 조선총독부에 의해 추방당하면서 당시 그가 조직해 국내에서 가장 수준 높았던 팀인 황성 YMCA 팀도 사실상 해체됐다.
또한 1910년대부터는 한반도에도 공식적인 야구 대회가 개최됐지만 대부분의 대회는 조선인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 1913년에 경성일보가 주최한 전조선 야구대회에는 일본인으로 구성된 팀만 참가했으며, 2년 뒤 조선공론사(朝鮮公論社)가 주최한 전조선 야구대회에는 총 7팀이 참가했으나 그중 조선인 팀은 오성(五星) 구락부(친목회) 1팀만 출전하는 데 그쳤다.
1915년에 중앙(서울) YMCA가 국내 최초로 중학급 대회를 개최했으나 이는 일회성에 그쳤다. 당시 우승팀인 ‘청년회관’(황성 YMCA 팀이 개칭)은 다음 해 고시엔 대회에 참가할 의사를 밝혔지만, 조선총독부의 불허로 대회 참가가 무산됐다.
위와 같은 이유로 1910년대 후반은 조선 야구에서 경기 수와 관련 사료가 적은 시기로 남았다. 위기를 맞았던 조선 야구가 되살아난 시점은 일제가 무단 통치에서 문화 통치로 전환하면서 ‘조선체육회’가 활동을 시작한 1920년대다. 조선체육회 설립 이전에는 국가의 내환에 더해 각 야구팀이 재정적인 문제에 시달리면서 팀이 해체되는 일도 잦았다. 이렇듯 한국 야구 초창기 역사는 새로운 도전과 함께 힘없는 나라의 국민들이 겪은 문화 양상을 보여줬다.
참고 = 한국야구사, 중앙일보, 조선야구사,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야구연표, TheKoreaTimes, 인천야구 한 세기, 플레이볼: 조선·타이완·만주에서 꽃핀 야구 소년들의 꿈, 대한체육회 90년사 I
야구공작소 김민준 칼럼니스트
에디터 = 야구공작소 오연우
ⓒ야구공작소. 출처 표기 없는 무단 전재 및 재배포를 금합니다. 상업적 사용은 별도 문의 바랍니다.
댓글 남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