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번호에 새겨지는 기억들, 이제는 낮춰야 할 영구결번의 벽

<일러스트 = 야구공작소 김채희>

2022 KBO 한국시리즈 5차전 4대 2로 뒤지고 있던 SSG 랜더스의 마지막 공격. 9회말 무사 1, 3루. 대타로 나선 김강민의 타구가 좌측 담장을 훌쩍 넘어갔다. 2승 2패로 팽팽하던 2022년 한국시리즈의 균형이 무너지는 순간이었다. 이 한 방으로 키움 히어로즈의 투지는 꺾였다. 다음 날 SSG는 한국시리즈 6차전에서 승리하며 와이어 투 와이어 우승을 완성했다.

MVP는 김강민의 몫이었다. 2018년에 이어 다시 한번 팀을 구해낸 김강민은 SSG의 유력한 영구결번 후보로도 등극했다. 3년 뒤인 2025년 6월 28일, 김강민의 은퇴식이 개최됐다. 그러나 SSG의 0번이 오로지 김강민의 번호로 남지는 못했다.

 

전설들도 넘기 힘든 영구결번의 문턱

KBO리그에서 영구결번은 최고의 선수만이 누릴 수 있는 영예다. 야구 실력은 물론 팀에 대한 충성심과 인상적인 활약까지 인정받아야 한다.

현재까지 영구결번은 주로 ‘원클럽 레전드’들의 전유물이라는 성격이 강하다. 추모의 성격인 故 김영신과 원치 않게 트레이드됐던 故 최동원, 양준혁, 박경완 3명을 제외한 전원은 리그 역사에 한 획을 그은 레전드들인 동시에 원클럽맨들이다. 이러한 이유로 KBO리그 43년 역사 동안 단 17명만이 영구결번으로 지정돼 기준이 너무 높다는 비판의 목소리도 나왔다.

< LG 트윈스의 영구결번 선수 이병규(9), 박용택(33), 김용수(41) >

영구결번의 높은 벽은 자의든 타의든 이적을 소속팀에 대한 ‘배신’으로 간주했던 과거의 인식에서 기인한 결과물이다. 또한 FA 제도가 도입되기 전 트레이드를 보복 목적으로 활용한 구단 운영도 영향을 끼쳤다. 최근에는 선수의 이적을 배신으로 보거나 구단으로부터 버려진 것이라는 인식은 거의 사라졌다. 그러나 영구결번에서만큼은 여전히 ‘원클럽맨’이라는 가치가 주요한 명분으로 자리 잡고 있다.

KT 위즈 이강철 감독과 故 장효조 前 감독이 이러한 인식 탓에 영구결번으로 지정되지 못한 대표적인 사례다. 두 감독 모두 통산 성적이나 임팩트, 상징성 면에서 영구결번으로 지정돼도 전혀 부족함이 없는 선수 생활을 보냈다. 그러나 이강철은 1999시즌 종료 후 FA 자격을 얻어 삼성 라이온즈로 이적했고 장효조는 구단과의 갈등으로 트레이드된 탓에 영구결번으로 지정되지 못했다. 둘은 KIA 타이거즈와 삼성 라이온즈 각 팀에서 영구결번을 받지 못해 가장 아쉬운 선수로도 자주 언급된다.

 

명예의 전당과 새로운 출발

< 2026년 연말 개장 예정인 한국야구박물관 >

명예의 전당 부재도 영구결번의 문턱을 높이는 데 한몫했다. 한국 야구 명예의 전당은 리그 출범 후 40여 년이 흐른 2026년에야 겨우 개관을 앞두고 있다. 메이저리그와 일본프로야구보다 10년 이상 늦었다.

이러다 보니 각 구단의 영구결번들이 사실상 명예의 전당 역할을 대신하고 있다. 구단을 상징해야 할 영구결번 선수가 리그 전체를 상징하는 선수가 된 셈이다. 영구결번의 자격 요건으로 구단 내 활약뿐 아니라 국가대표 경력 등 구단 외적인 요소들까지 거론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영구결번 외에는 선수의 커리어를 기념할 마땅한 방식이 없는 것도 문제다. 은퇴투어가 있긴 하나 메이저리그에서도 단 5명만이 진행한 행사다. KBO리그는 이승엽과 이대호가 기준점인 만큼 그 벽이 압도적으로 높다. 사실상 영구결번과 은퇴식만으로 선수의 커리어와 업적을 남겨야 하는 상황이기에 자격 논쟁이 자주 발생하고 있다.

2022년 KBO는 프로야구 출범 40주년을 맞아 KBO 레전드 올스타 40인을 선정했다. 팬 투표와 전문가 투표를 합산해 선정됐다. 각 구장에서 선정된 선수들을 기념하는 시상식도 진행됐다.

미리 보는 명예의 전당이라는 평가도 있었다. 한국 야구 역사를 기리는 동시에 팬들에게 즐거움을 선사한 행사로 기억에 남았다. 또한 영구결번 선수들만이 아닌 많은 선수들이 한국 프로야구를 이끌었다는 점을 각인시키며 앞으로 역사에 남을 선수들을 기리는 방식에 대한 고민이 필요하다는 과제도 남겼다.

명예의 전당이 개관하기 전까지는 현재의 구조에서 변화를 기대하긴 힘들다. 하지만 레전드 기념 방식에 대해 재논의할 수 있는 기회이기도 하다. KBO 레전드 올스타 40인을 통해 우리가 기려야 할 선수들이 비단 영구결번 선수들에 국한된 것은 아니라는 게 드러났다. ‘누구를 기념할 것인가’가 아닌 ‘어떻게 기념할 것인가’로 인식을 전환해야 할 시점이다.

 

빅리그의 관대함

2025년 1월 22일 시애틀 매리너스는 스즈키 이치로의 51번을 영구결번으로 지정했다. 6월 3일에는 시애틀에서 먼저 51번을 달고 뛰었던 랜디 존슨도 함께 공동 영구결번으로 이름을 올렸다. 흥미로운 것은 랜디 존슨은 KBO리그 기준으로는 영구결번을 받을 수 없다는 것이다.

먼저 그는 1988년 몬트리올 엑스포스에서 데뷔한 후 6번이나 이적했다. KBO리그였다면 6번이나 이적한 랜디 존슨이 영구결번을 받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그는 이미 2015년 애리조나 다이아몬드백스의 영구결번으로 지정됐고 시애틀의 51번은 이치로가 먼저 영구결번으로 결정된 상태였다. 복수 팀이든 한 번호에 복수 선수든 공동 영구결번은 한국에선 상상조차 못 할 일이다.

메이저리그에선 존슨이 특수한 경우인 것이 아니다. 메이저리그는 역사가 오래됐고 규모도 커 선수 이적이 활발하다. 그래서 이적이 영구결번 지정에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 또한 복수의 구단에서 영구결번으로 지정되거나 한 번호를 두 선수가 공유하기도 한다.

프랭크 로빈슨과 놀란 라이언처럼 3개 구단에서 영구결번으로 지정된 선수도 있다. 20세기 최초의 흑인 선수인 재키 로빈슨의 등번호 42번은 유일한 메이저리그 전 구단의 공동 영구결번으로 지정돼 있다. 이후에 42번을 사용했던 브루스 수터와 마리아노 리베라는 로빈슨과 함께 각각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 뉴욕 양키스의 공동 영구결번으로 남았다.

이처럼 메이저리그와 KBO리그의 영구결번 문화는 꽤 차이가 있다. 야구 전체 역사에 남은 선수는 명예의 전당을 통해 기리고 있어 구단에 기여한 선수들은 영구결번과 구단별 명예의 전당을 통해 따로 기념하고 있다. 놀란 라이언처럼 한 팀에서 5년밖에 뛰지 않았음에도 큰 족적을 남겼다면 영구결번으로 지정되기도 한다.

< 빈 스컬리의 영구결번 기념판 >

영구결번을 선수들만 받는 것은 아니기도 하다. 클리블랜드 가디언스는 홈 455경기 연속 매진 기록을 기념해 ‘The Fans’라는 문구와 함께 455번을 영구결번으로 지정했다. LA 다저스는 67년 동안 구단 전담 캐스터였던 빈 스컬리를 영구결번으로 지정했는데 특별히 등번호가 아닌 라디오 마이크 모양의 기념판을 내걸었다.

 

변화의 바람 : 김강민과 김현수

원클럽맨 레전드들의 몫으로 여겨졌던 KBO리그의 영구결번 기준점에 변화의 바람이 처음 불어온 것은 2023년이다. 바람의 발원지는 SSG 김강민과 LG 트윈스 김현수다. 2023년은 김강민이 SSG에서 뛰었던 마지막 시즌이고 LG가 29년 만에 우승의 한을 풀어낸 해이기도 하다. 두 선수의 커리어는 전통적인 영구결번 기준에는 미치지 못한다. 그럼에도 영구결번 담론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 이유는 각 구단에서의 상징성과 활약상 면에서 지지받았기 때문이다.

우선 김강민은 원클럽맨이 아니다. 2023시즌 종료 후 SSG가 2차 드래프트 보호명단에서 제외한 탓에 한화로 이적했다. 기존 영구결번 선수들과 비교할 때 리그 전체에서의 영향력이나 누적 성적(통산 sWAR 24.96, 역대 99위) 면에서도 아쉬움을 남겼다.

하지만 김강민의 상징성은 WAR만으로 다 담아낼 수 없다. 2001년 SK 와이번스에 입단한 김강민은 외야수로 전향한 2003년부터 2023년까지 20년 동안 인천의 외야를 지켰다. SK-SSG 소속으로만 1,920경기를 출장해 최정에 이어 2위에 올랐다. 소속 시즌 기준으로는 최정(21시즌)보다도 긴 23시즌을 SK-SSG 선수로 뛰었다.

김강민의 전성기는 곧 팀의 전성기이기도 했다. SK는 김강민이 주전으로 도약한 2007년부터 탄탄한 수비와 작전 야구를 앞세워 전성기를 구가했다. 국내 최고의 중견수 수비를 자랑하는 김강민은 왕조의 핵심이었다. 팀이 2007년부터 2022년까지 5번의 우승 트로피를 들어 올리는 현장에는 항상 김강민이 있었다. 특히 2018년과 2022년의 우승은 김강민의 손에서 만들어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한화 이적도 구단의 실책으로 발생한 일이었다. 당시 SSG 팬들은 근조화환을 보내는 등 구단의 결정에 깊은 실망감을 드러냈다. 본인 의지에 의한 이적이 아니었던 만큼 한화에서의 1년은 김강민의 영구결번 담론에 큰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 그럼에도 2025년 열린 은퇴식에서 김강민의 영구결번이 이뤄지지 않자 많은 팬들은 아쉬움을 표했다.

< 2025년 6월 28일 개최된 김강민의 은퇴식 >

 

김현수 역시 원클럽맨이 아니다. 김강민과 달리 FA 자격을 얻어 LG로 이적했다. 하지만 이적 여부와 상관없이 두산 베어스와 LG 양 팀에서 레전드로 대우받을 만큼의 상징성과 공헌도를 자랑한다.

김현수는 2000년대 후반~2010년대 중반 두산의 상징과도 같은 선수였다. 김현수의 등장과 함께 두산은 리그를 대표하는 강팀으로 성장했고 2015년 기적 같은 우승 과정에서도 혁혁한 공을 세웠다. FA 자격으로 LG로 이적했지만 김현수는 두산 복귀를 희망했음에도 모기업 사정으로 협상 테이블을 차리지도 못했다. 라이벌 팀으로 옮겼음에도 김현수의 이적은 당시의 상황이 참작돼 팬들도 어쩔 수 없었다며 이해해 주고 있다.

김현수는 포스트시즌 문턱에만 머물던 LG를 강팀으로 성장시킨 장본인이다. LG에서 통산 wRC+ 135를 기록 중이고 2번의 골든 글러브를 수상하는 등 개인 실적도 훌륭하지만 후배들에게 귀감이 되는 덕아웃 리더이기도 하다. 이적 첫해부터 팀 분위기를 긍정적으로 바꿨고 메이저리그에서 익힌 웨이트 트레이닝을 적극적으로 전수하기도 했다. 2023년 한국시리즈 MVP는 오지환이지만 LG가 한국시리즈까지 가는 과정에서의 MVP는 김현수라 할 수 있다.

김현수는 김강민에 비해 영구결번 논의가 활발하지 못한 편이다. 그러나 두산과 LG 팬 사이에서의 김현수 영구결번 담론 중 잠실 공동 영구결번이라는 주제는 거의 빠지지 않는다. 김현수는 두산에서 1,131경기 4,769타석, LG에서 1,049경기 4,455타석을 소화해 양 팀에서 뛰었던 기간이 거의 비슷하다. 내년에는 잠실야구장에서 가장 많은 경기를 뛴 선수가 된다. 양의지, 최형우와 달리 이적 후 두산을 상대로 우승 트로피를 들어 올리거나 구단과 갈등을 빚지도 않았다.

이렇듯 ‘잠실의 레전드’라는 상징성을 가지는 만큼 역사상 첫 복수팀 영구결번의 주인공으로는 부족함이 없다. 한 걸음만 더 나아가 김현수를 2026년이 마지막이 될 잠실야구장의 상징으로 남기면 어떨까. 김현수 정도의 공헌도와 상징성이라면 원클럽맨이 아니더라도 영구결번을 받을 수 있다는 좋은 선례가 될 수 있다.

 

마치며

야구는 흔히 기록의 스포츠라 불린다. 하지만 기록만으로 영구결번을 줄 세우듯 결정한다면 동의할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WAR이 영구결번 논쟁의 기준으로 자주 등장하지만, WAR만으로는 선수의 커리어를 다 담을 수 없다. 우리가 야구를 보는 이유는 숫자가 아니라 감동이기 때문이다.

피츠버그 파이리츠의 빌 매저로스키는 통산 성적만 놓고 보면 리그를 대표할 정도의 선수는 아니었다. 그러나 김강민처럼 월드시리즈에서 우승을 확정 짓는 끝내기 홈런으로 팀 역사에 남아 피츠버그의 영구결번으로 지정됐다. 놀란 라이언, 랜디 존슨처럼 이적생임에도 팀에서의 상징성과 기여도를 통해 영구결번으로 지정되는 사례도 메이저리그에서는 흔히 볼 수 있다.

 

원클럽맨은 아니지만 KBO 리그 전체를 대표하는 레전드 김현수, 양의지, 최형우. 누적 성적은 부족하지만 구단의 역사에 남은 김강민, 김재호, 박경수. 김응용 前 감독, 조지훈 롯데 응원단장 같은 선수 외의 인물들까지. 류현진, 김광현, 양현종뿐만 아니라 모두 영구결번을 받을 만한 커리어와 소속팀에서의 기여도를 갖췄다.

이처럼 리그를 대표하지 않았더라도, 한 팀에서만 뛴 선수가 아니더라도, 심지어 선수가 아니더라도. 팀과 팬들의 기억에 남을 만큼 의미 있는 인물이라면 기념 받을 자격이 있다. 성적·이적·인식이라는 세 가지 벽을 조금만 허문다면 더 많은 레전드를 기념할 수 있을 것이다.

한국 야구 명예의 전당이 2026년 개관을 앞두고 있다. 2022년 40주년 레전드 올스타 선정과 맞물려 한국 야구의 레전드 기념 방식을 재논의할 수 있는 계기가 될 수 있다. 이때 영구결번은 물론 명예의 전당, 은퇴식 및 은퇴투어 등을 어떻게 유연하게 운영할 것인지 정비가 있어야 한다. 동시에 레전드와 작별하는 방식에 대한 구단과 팬들의 인식 전환도 필요하다.

 

참고 = MLB.com, Los Angeles Times, 미국 야구 명예의 전당

야구공작소 조승화 칼럼니스트

에디터 = 야구공작소 천태인, 장호재, 전언수

일러스트 = 야구공작소 김채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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