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구의 사회적 역할⑭ 은퇴 선수 지원, 이제는 한국 야구의 사회공헌으로 下

< 일러스트 = 야구공작소 김범수 >

이전 시리즈에서는 KBO의 은퇴 선수 지원이 단순한 복지를 넘어 야구계의 사회공헌으로 인식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하지만 ‘무엇을 해야 하는가’보다 먼저 ‘왜 그래야 하는가’를 물어야 한다. 어떤 시스템이든 결국 그것을 바라보는 시선 위에 구축되기 때문이다.

은퇴 선수를 바라보는 사회의 시선은 곧 그들의 제2의 인생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친다. 이번 시리즈에서는 일본과 한국의 인식 차이를 중심으로 은퇴 선수 지원이 왜 사회적 책임이어야 하는지를 살펴본다.

 

은퇴 선수는 실무형 인재다 – 일본의 ‘애슬리트 채용’이 보여주는 신뢰

일본 사회는 운동선수에게서 조직 적응력, 스트레스 대처 능력, 책임감, 목표 지향성과 같은 태도를 본다. 단순한 체력이 아니라 훈련과 경험을 통해 길러진 성향이며, 이는 사회에서 요구하는 역량으로 받아들여진다. 

이러한 인식은 제도로도 뒷받침된다. 일본 기업들은 운동선수 출신을 일반 공채와는 다르게 선발하는 ‘애슬리트 채용’을 운영한다. 프로뿐 아니라 대학과 실업팀 출신도 대상이며, 이들은 주로 영업, 마케팅, 교육, 서비스 분야에서 활동한다.

일본 기업들은 학력이나 스펙보다 현장에서 검증된 집중력, 인내심, 협업 능력을 높이 평가하므로 선수 출신을 포기하지 않는 사람, 조직 안에서 버틸 줄 아는 사람으로 본다. 스포츠, 교육, 산업이 자연스럽게 연결된 일본 사회에는 운동선수가 사회에 진입할 수 있는 구조와 언어가 이미 마련돼 있다. 그래서 야구밖에 모르던 사람이 아니라, 야구를 통해 준비된 사람이라는 믿음이 작동한다.

< 세계적인 컨설팅펌에서 세컨트커리어를 시작한 히사코 >

도쿄 야쿠르트 스왈로즈 출신 히사코 켄타로는 은퇴 후 회계 자격증을 취득하고 PwC에 입사했다. 현재는 딜로이트 토마츠 컨설팅에서 전략 컨설턴트로 일하며 새로운 커리어를 이어가고 있다. 그는 선수 시절 길러온 팀워크와 멘탈 관리 능력이 지금도 중요한 역량이라고 말한다. 커리어는 아마추어 시절부터 설계돼야 하며 스포츠와 비즈니스 모두에서 결과를 내는 능력이 핵심이라고 강조한다. 또한 개인의 노력만으로는 한계가 있다고 말한다. 기업의 이해와 사회의 수용이 함께 할 때 비로소 의미 있는 커리어가 만들어질 수 있다고 본다.


요코하마 DeNA 베이스타스 출신 사이토 슌스케는 은퇴 후 IT 기업 SB C&S에 영업사원으로 입사했다. 은퇴 직후에는 재취업이 되지 않아 이력서와 면접에서도 수차례 고배를 마셨다. 그는 사회가 선수를 어떻게 바라보는지를 온몸으로 체감했다고 한다. 그럼에도 도전을 멈추지 않았다. 야구장에서 쌓은 승패의 감각과 팀과 함께 목표를 향해 나아갔던 경험은 그를 결국 해낼 수 있는 사람으로 증명해 줬다. 성공은 개인의 노력만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선수라는 경력을 신뢰한 사회의 시선이 함께 있었다.

 

한국은 왜 아직도 ‘야구밖에 모르던 사람’인가

한국 사회는 은퇴 선수를 여전히 낯설게 본다. 익숙하지 않다는 건 사회적 이해가 부족하다는 뜻이다. 운동선수는 공부를 못 한다는 인식이 남아 있다. 사회 경험이 없다는 편견도 있다. 이런 시선은 은퇴 이후 삶에 영향을 준다. 

문제는 단절이다. 선수들은 어릴 때부터 운동에 집중한다. 학교와 멀어진다. 사회와도 멀어진다. 프로 진입은 빠르지만 경력을 준비할 시간은 없다. 조기 은퇴는 더 큰 공백을 만든다. 경력은 갑자기 끊긴다. 이어갈 길이 없다. 대부분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한다. 

그런데도 사회는 책임을 선수에게 돌린다. 운동하면서 돈은 벌었고 이제는 혼자 살아야 한다고 말한다. 현실은 다르다. 선수 대부분은 짧은 시간 동안 제한된 수입을 얻는다. 은퇴 후를 준비할 기회도 없다. 정보도 없다. 성공 사례는 잘 보이지 않는다. 실패는 반복해서 소비된다. 결국 은퇴 선수는 준비되지 않은 사람으로 보인다.

문제는 개인이 아니다. 역량은 충분하다. 부족한 건 그 역량을 연결해 줄 구조와 신뢰다.

 

숫자로 보는 은퇴 운동선수의 현실

국회 문화체육관광위원회 민형배 의원이 공개한 자료에 따르면 2012년부터 2023년까지 은퇴 운동선수의 평균 실업률은 37.6%에 달한다. 관련 조사가 시작된 2012년에는 35.9%, 2013년 43.2%, 2016년 35.38%, 2022년 39.40%, 2023년에도 37.01%를 기록했다. 매년 30~40%대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취업하더라도 절반 이상이 비정규직이다. 비정규직 비율은 50.16%다. 1년 미만 근속 비율도 38%로 가장 높다. 월 소득 200만 원 이하는 78%에 이른다.

진로 설계에서 가장 큰 어려움은 방향을 모르겠다는 점이다. 전체의 38.47%가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답했다. 진로와 직업에 대한 정보 부족도 27.5%였다.

이건 개인의 문제가 아니다. 은퇴 선수의 심각한 실업 문제는 야구계와 사회가 처음부터 제대로 된 안전장치를 설계하지 않았다는 증거다.

 

가능성은 있다. 그러나 아직은 예외

한화 이글스 출신인 (주)제스트 김무성 대표는 은퇴 후 스마트 자동 배팅기를 개발했다. 이 장비는 국내외 20여 개 구단에 납품됐고, 2020년 CES에서는 250만 달러 수출 계약도 성사됐다.

이 사례는 단순한 창업이 아니다. 야구에서 쌓은 감각을 산업 기술로 바꾼 상징적인 전환이다. 훈련 방식과 데이터, 장비에 대한 이해가 시장의 언어로 재해석된 결과다. 하지만 그 길은 온전히 혼자 만들어낸 것이었다. 누구도 그의 두 번째 커리어를 안내해 주지 않았다. 한국 야구가 만들지 못한 틈을 혼자 메운 드문 예외였다.

이 사례가 구조로 이어지지 않는다면 앞으로도 선수들은 운과 체력, 정신력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기적에 기대는 구조로는 누구도 오래 버티지 못한다.

< 스마트 자동 배팅기 ‘Autobat’를 개발한 김무성 대표 >

 

시선을 바꾸지 않으면 ‘야모순바’라는 말은 계속될 것이다

일본은 가능성을 믿었고 시스템을 만들었다. 반면 한국은 가능성을 믿지 않았고 아무것도 준비하지 않았다. 이제는 시선을 바꿔야 한다.

한때 야구계에서는 ‘야모순바’라는 말이 농담처럼 쓰였다. 이는 야구밖에 모르는 순진한 바보라는 뜻의 줄임말이다. 야구팬들과 선수들끼리 웃으며 넘기던 말이다. 하지만 그 말에는 사회가 선수를 바라보는 낡은 인식이 그대로 담겨 있었다. 지금은 그 시선을 거둬야 할 때다. 야구를 해낸 사람은 문제를 해결하고 함께 이겨내는 법을 익힌 사람이다. 그렇게 이해하는 시선이 필요하다. 

이해는 사회만이 아니라 선수 자신에게도 필요하다. 한국에서는 공부하는 운동선수를 성적이나 입시와 연결한다. 하지만 공부는 지식을 쌓는 게 아니다. 배우는 태도이고 도전하는 습관이고 생각하는 힘이다. 야구는 단순한 기술이 아니다. 집중력이고 책임감이고 협업의 시간이다. 그 안에서 배움을 익힌 선수는 경기가 끝나도 다시 시작할 수 있다.

그들이 사회에 다시 설 수 있도록 돕는 일은 개인의 책임만이 아니다. 그것은 야구계가 사회로부터 받은 신뢰를 다시 돌려주는 일이다. 그것이 진짜 사회공헌이다. 우리가 그들의 삶을 이야기할 자격은 그 삶이 사회 속에서 존중받을 때 생긴다. 지금은 그 자격을 사회가 먼저 증명해야 할 때다.

 

참고 = 딜로이트토마츠, 여성자신, Fullcount, Halftime, 마이나비, 연합뉴스, 제스트, 여성자신, KBS 스포츠, 착한 자본의 탄생(김경식 저), Gratton, Chris; Preuss, Holger (2008). ISO26000(국제표준화기구 사회적 책임 표준), etc.

야구공작소 천태인 칼럼니스트

에디터 = 야구공작소 강상민, 전언수

일러스트 = 야구공작소 김범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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