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연재물은 ‘KBO 박스스코어 프로젝트’와 함께 합니다.
롯데 자이언츠 팬들에게는 언급하면 트라우마를 불러일으키는 포스트시즌의 장면이 여럿 있다. 1995년 한국시리즈에서 우승까지 1승을 남겨두고 있던 상황에서 나온 박정태의 치명적인 실책이라던가, 2009년 준플레이오프 3차전에서 나온 이른바 ‘김거김’(김현수 거르고 김동주)*, 2012년 플레이오프 5차전에 나온 ‘강중전’(강민호 중전안타)**, 그리고 2017년 준플레이오프 1차전 연장에 나온 강민호의 치명적인 포일 등이 있다. 만약 주위에 롯데 팬이 있고, 그 팬의 혈압을 올려야 할 상황이 온다면 꼭 이 경기 중 하나를 자세히 묘사해주면 된다.
* 롯데는 0대 3으로 지고 있던 2회 초 1사 2, 3루에서 까다로운 좌타자 김현수를 고의4구로 거르고 우타자 김동주를 상대한다. 그러나 김동주는 만루홈런으로 화답했다.
** 5회 말 1사 1, 3루에서 1루 주자 최정이 도루를 시도하자 포수 강민호가 2루로 송구했다. 그러나 2루에 아무도 베이스 커버를 들어오지 않으면서 3루 주자 박재상이 홈을 밟았다. 당시 관중석에서 핫도그를 들고 분노한, 이른바 ‘핫도그아재’가 화제가 됐다.
그러나 뭐니 뭐니 해도 롯데가 세 번째 우승을 차지하기 전까지는 영원히 인구에 회자될 명장면(?)은 따로 있다. 바로 2011년 플레이오프 1차전에 나온 ‘손페베네’다. 지금도 롯데 팬들은 손아섭이 1사 만루에 타석에 들어서면 불행회로를 돌리기 바쁘며, 정우람(한화)에게 안타, 혹은 잘 맞은 뜬공을 날리기라도 하면 커뮤니티에는 “손아섭 저거 그때나 저렇게 정우람한테 치지”라는 넋두리 섞인 게시글이 수십 개가 올라오곤 한다. 손아섭이 KBO 리그 데뷔 후 15시즌 동안 쌓아온 여러 업적마저도 공 하나에 부정받기까지 한다. ‘손페베네’는 그야말로 롯데 팬들을 분노하게 만드는 치트키 아닌 치트키가 됐다.
대체 한 팀에서 뛰어본 적도 없는 손아섭과 정우람은 왜 10년 넘게 한 문장 안에 이름이 오르내릴까. 그리고 대체 ‘손페베네’는 뭘까.
이를 알아보려면 2011년 롯데의 상황을 알아야 한다. 3년 연속 포스트시즌 진출을 이뤄냈던 제리 로이스터 감독과 재계약을 하지 않은 롯데는 당시 양승호 고려대학교 감독을 신임 감독으로 선택했다. 베테랑 지도자였지만 1군 정식 감독은 처음이었던 양승호 감독은 시즌 초 언론 플레이에 다소 미숙한 모습을 보였다. 안 그래도 로이스터 감독과의 이별로 분노했던 롯데 팬들에게 양승호 감독의 말 한 마디 한 마디는 불 난 집에 기름을 붓는 것 같았다. 시즌 초 최하위까지 떨어지면서 양승호 감독은 부산 시내에서 고개를 들고 다니지 못할 정도로 많은 비난을 받았다.
그러나 6월까지 혼란을 자초했던 양승호 감독은 7월 들어 달라진 모습을 보였다. 좌익수 홍성흔, 3루수 전준우 같은 실험적인 라인업을 자제했고, 혼란 그 자체였던 마무리 투수 자리에도 12년 차 김사율을 고정하며 뒷문의 안정을 가져왔다. 선발과 구원을 오가던 고원준을 선발진에 고정했고, 이 외에도 여러 지적 사항에 대한 빠른 피드백을 보여주며 환골탈태한 모습을 보여줬다.
8월 3일 단독 4위에 오른 롯데는 8월 한 달 동안 승패마진 +9를 기록했고, 9월 첫날 승리를 챙기며 단독 2위까지 등극했다. 이후 SK 와이번스와 엎치락뒤치락하며 치열한 순위 싸움을 펼친 끝에 막판 7경기에서 6승을 거두며 2위 자리를 확정했다. 단일리그 체제가 시작된 1989년 이후 롯데가 정규시즌 2위를 차지한 것은 이때가 처음이었다. (양대리그였던 1999년과 2000년은 제외)
플레이오프에 직행한 롯데는 SK와 만나게 됐다. 롯데는 이 시즌 SK에 상대 전적 8승 10패 1무로 밀리고 있었다. 9월 9일 경기에서는 김강민 한 명에게 호되게 당하면서 9회 5점의 리드를 지키지 못하고 패배했다. 그러나 매년 SK를 상대로 1승씩 더 거두고 있던 롯데는 2011시즌 SK와의 마지막 3연전을 2승 1패로 마감하면서 좋은 분위기를 가져오게 됐다. 여기에 SK는 김성근 감독의 경질, 에이스 김광현의 부진 등이 겹치면서 왕조를 이루던 시절의 전력이 아니었다. 누가 봐도 할 만한 싸움이었다.
10월 16일, 플레이오프 1차전의 막이 올랐다. 이날 경기는 장원준(롯데)과 김광현(SK)의 좌완 에이스 대결이었다. 2010년까지만 해도 장원준을 김광현과 비교하는 것은 실례에 가까웠다. 하지만 장원준은 2011년 15승 6패 평균자책점 3.14를 기록하며 류현진과 김광현, 봉중근과 양현종이 부진했던 틈을 타 리그 최고 좌완으로 등극했다.
배우 김선아의 시구와 김주혁의 시타로 경기가 시작됐다. 그리고 12분 30초 후 롯데는 1번 김주찬의 선두타자 홈런으로 선취점을 올렸다. 분위기를 탄 롯데는 손아섭의 안타와 이대호, 홍성흔의 연속 볼넷으로 1사 만루 찬스를 잡았다. 초반부터 김광현을 무너뜨릴 수 있었던 상황이었다. 하지만 6번 강민호가 초구부터 방망이를 내며 3루수 앞으로 향하는 병살타를 기록했다. 롯데 팬들은 이미 이때부터 무언가 이상한 낌새를 느끼기 시작했다.
롯데는 2회 김주찬과 손아섭의 적시타로 2점을 추가하며 1회의 아쉬움을 덜어내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SK는 4회 ‘가을거지’ 박정권의 솔로포를 시작으로 본격적인 공격에 나섰다. 흔들린 장원준은 만루를 만들었고, 여기서 박진만의 희생플라이와 정근우의 중전 안타가 나오며 스코어는 3대 3이 됐다. 이후 경기는 시소게임으로 흘러갔다. 롯데가 4회 말에 한 점을 내 역전에 성공하니 SK는 6회 박진만의 1타점 적시타와 7회 안치용의 투런 홈런으로 역전에 성공했다. 그러자 롯데도 7회 말 조성환의 (안타성 타구였던) 2루 땅볼로 한 점을 따라갔고, 8회 말 이대호가 천적 정대현에게 적시타를 뽑아내며 6대 6으로 균형을 맞췄다.
그리고 영원히 회자될 9회 말이 찾아왔다. 롯데는 선두타자 황재균이 우중간 2루타로 살아나간 데 이어 조성환의 페이크 번트 앤드 슬래시가 성공하며 무사 1, 3루를 만들었다. 안타, 폭투, 외야 플라이, 까다로운 땅볼 등이 나오면 바로 경기를 끝낼 수 있던 상황이었다. 롯데는 여기서 시즌 내내 대타로 쏠쏠한 타격을 보여준 손용석을 타석에 투입했다. 그러나 하필 손용석이 투수 앞으로 땅볼을 쳐내면서 3루 주자가 홈을 밟지 못했다. SK는 만루 작전을 쓰기 위해 이날 3안타를 기록한 김주찬을 고의4구로 걸렀고, 투수를 그해 홀드 1위(25홀드)를 차지한 정우람으로 교체했다.
타석에는 앞선 5타석에서 안타 3개와 4사구 1개를 얻어내며 밥상을 차려준 손아섭이 들어섰다. 비록 2011시즌 정우람과 7차례 만나 1안타에 그치기는 했지만, 타격감이 절정에 오른 상황이었기 때문에 그 누구도 손아섭의 활약에 대해 의심하지 않았다. 손아섭 본인도 마찬가지였다. 손아섭은 대기 타석에 있던 전준우에게 “초구 체인지업 노리고 들어간다”라며 오히려 정우람의 주 무기를 과감하게 노리고 들어간다고 예고했다. 그리고 정우람의 초구는 정말로 체인지업이었다. 그것도 다소 높게 형성돼 치기 좋게 들어간 시속 122km의 체인지업이었다. 기다렸다는 듯 손아섭은 배트를 내밀었다.
그리고 타구는 다소 앞에서 수비하던 2루수 정근우의 글러브로 들어갔다. 정근우는 침착하게 유격수 박진만에게 토스했고, 박진만도 1루수 박정권에게 송구하며 아웃카운트 두 개를 잡아냈다. 사직야구장은 일순간 도서관으로 변했고, 해설위원의 “어~ 이게 뭡니까~”라는 외침만이 공허하게 울려 퍼졌다. 상황을 바로 받아들이지 못한 롯데 팬들은 2초 동안 아무것도 하지 못했고, 곧 머릿속이 정리되자마자 갖은 욕설을 퍼부었다. 당사자인 손아섭은 입을 다물지 못했다.
허무하게 끝내기 찬스를 날린 롯데는 10회 초 수비에서 투수 크리스 부첵이 선두타자 정상호에게 왼쪽 담장을 아주 살짝 넘어가는 홈런을 내주며 7대 6 역전을 허용했다. 롯데는 ‘기회 다음은 위기’라는 야구계 속설을 그대로 증명했다. 홈런이 나오자 중계 카메라는 손아섭을 향해 줌을 당겼다. 쥐구멍에라도 숨고 싶은 순간이었다. 이미 동력을 상실한 롯데는 10회 말 클린업 트리오가 등장했지만 모두 내야 땅볼로 물러나며 허무하게 경기를 내줬다.
이날 패배로 롯데는 1999년 한국시리즈 1차전부터 이어졌던 포스트시즌 홈 연패 기록을 12연패로 늘렸다. 다음날 송승준의 호투와 전준우-강민호의 홈런으로 승리하며 연패는 중단됐다. 그러나 롯데는 물고 물리는 흐름 끝에 마지막 5차전을 내주며 결국 한국시리즈 진출에 실패했다. 3차전 찬스에서 초구 땅볼을 치며 또 한 번 십자포화를 맞았던 손아섭은 4차전에서는 공을 오래 보면서 결승 적시타를 기록했다. 하지만 최종 5차전에서 하필 3번의 득점권 찬스를 모두 날려 먹는 바람에 플레이오프에서 나쁘지 않은(타율 0.316) 기록을 남겼음에도 1등 역적으로 등극했다.
사실 플레이오프 1차전에서 9회 말만 빼고 보면 이 경기는 롯데로서는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보여준 경기였다. 예년처럼 역전을 허용한다고 허무하게 무너지지도 않았고, SK에 비해 허약한 불펜진을 가지고 있음에도 막판까지 대등한 경기를 펼쳤다. 타선에서도 세 명의 선수가 3안타를 터트리며 공격을 이끌었다. 특히 2번 타자로 나선 손아섭은 4번의 출루를 기록하며 절정의 타격감을 보여줬으나 하필 마지막 타석의 실수 아닌 실수로 인해 앞선 활약상이 모두 묻히게 됐다.
특히 1차전 병살타 장면은 두고두고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렸다. 그 전해에 종영된 시트콤 <지붕뚫고 하이킥>의 새드 엔딩 장면이 논란이 된 이후 인터넷상에서는 허무한 결말이 날 때마다 엔딩 화면에 나온 ‘카페베네’를 따서 ‘X페베네’라는 별칭을 붙여주곤 했다. 그리고 손아섭의 ‘손페베네’는 이런 ‘X페베네’ 사례 중에서도 가장 길고 끈질긴 생명력을 자랑하고 있다. 롯데 팬들은 손아섭이 만루 상황에서 나오기만 하면 ‘그 타구’, ‘그 카페’ 등을 외치며 10년 전의 악몽을 떠올렸다. 2021시즌 SK가 이름을 바꾼 SSG 랜더스와의 개막전에서도 9회 만루 상황에서 내야 땅볼로 물러나자 ‘10주년 기념 리마스터’라는 비아냥이 나오기도 했다.
사실 가장 아쉬움을 느낀 건 손아섭 본인이었다. 훗날 한 유튜브 콘텐츠에서 2011년 플레이오프를 회상한 손아섭은 “1차전이 끝난 후 새벽 6시까지 잠을 못 잤다”라며 당시를 기억했다. 이후로도 1사 만루 상황만 돌아오면 트라우마가 도졌다는 손아섭은 이를 극복하는 데 시간이 조금 걸렸다고 말했다. 손아섭은 “아무리 잘해도 저거(병살타) 하나에 다 묻혀버리더라”라는 말로 자신에게 있어 ‘손페베네’가 굴레로 작용했다고 털어놓았다.
하지만 롯데 팬의 입장은 또 달랐다. 당시 롯데는 10년 넘게 한국시리즈에 진출하지 못했다. 이런 상황에서 후반기 돌풍을 일으키며 플레이오프에 직행한 롯데는 한국시리즈 무대에 오를 것이 유력했다. 그러나 손아섭의 병살타로 1차전을 내주면서 끝내 시리즈를 내줬다는 것이 롯데 팬들에게는 아쉬움으로 돌아왔다. 이후로도 롯데는 계속 한국시리즈 진출에 실패하면서 손아섭은 10년이 지난 아직도 여전히 ‘그 타구’의 굴레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사진=롯데 자이언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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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구공작소 양철종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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