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일러스트 = 야구공작소 김은빈 >
| 최동원은 ‘싸게 긁으려고’ 한 선수가 아니었다.
1981년 9월, 토론토 블루제이스는 한국의 한 투수에게 다음과 같은 임시 계약서를 내밀었다.

< 최동원 토론토 블루제이스 계약서 원문 중 >
계약 내용을 요약하자면 다음과 같다.
- 특별 규약 : 1981시즌 이후 구단이나 1982년 구단 스프링캠프 훈련지에 도착하면 각각 $10,000를 받는다.
- 1981년~1985년까지의 연봉은 다음과 같다.
- 1981년 : 메이저리그 서비스 기간에 비례해 연간 $32,500의 비율로 지급.
- 1982년 – $33,500
- 1983년 – $66,500
- 1984년 – $115,000
- 1985년 – $185,000
- 올스타팀에 선정될 경우, 1982년~1985년까지 선정된 해당 연도에 $25,000씩 받는다.
- 사이영상 수상자로 선정될 경우, 1982년~1985년까지 선정된 해당 연도에 $25,000씩 받는다.
- 최동원은 토론토 블루제이스의 현역 로스터(active roster)에서 메이저리그 경력을 시작한다.
1981년에 최동원은 실업리그 소속이었다. 비율 계약 조항(at the rate)은 그를 묶어두기 위한 장치에 불과했고, 올스타 출전과 사이 영 상 수상 계약은 임시 계약서 특성상 끼워 넣은 인센티브였다. 핵심은 메이저리그 로스터 등록 보장과 연봉 그래프의 기울기다.
이 중 5번 조항인 ‘1군 로스터 보장’이 얼마나 파격적인 것인지 이해하려면, 당시 국제 선수 계약의 실태를 먼저 봐야 한다. 1980년대 초반 국제 유망주 계약은 관련 규정이 전무했다. 일례로, 토론토는 1984년 단 13세의 도미니카 출신 지미 켈리와 $5,000짜리 계약을 맺었다. 당시 MLB의 국제 선수 계약 규정이 없다시피 해 사실상 구단 재량이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러한 환경임에도 토론토가 표준 마이너리그 계약서(standard minor league player’s contract)를 내밀지 않고 1군 로스터 보장을 명문화했다. 구단이 가능한 최대의 대우를 했다는 증거다.

< 1982년 토론토 블루제이스 로스터 등록 선수 연봉(내림차순) >
1982년, 토론토의 선발 로테이션을 꾸준히 소화한 선수는 짐 클랜시(Jim Clancy), 루이스 레얼(Luis Leal), 데이브 스티브(Dave Stieb), 짐 고트(Jim Gott) 뿐이었고 대부분의 선수는 최저 연봉($33,500)을 받았다. 최동원에게 제시된 처음 1982년의 연봉도 최저 연봉, $33,500. 출발선은 같았다. 그러나 그 이후 궤적이 너무나 다르다.

< 데이브 스티브, 짐 클랜시, 짐 고트, 최동원 연도별 연봉 변동 비교 >
1982년 288이닝, ERA 3.25로 아메리칸 리그 5위의 ERA를 기록하며 고액 연봉자가 된 스티브를 제외하면 나머지 두 선수의 곡선은 최동원의 그것과 비슷하게 맞닿아 있다. 이 그래프가 말하는 것은 하나다. 토론토는 처음부터 최동원을 클랜시 혹은 고트와 동급의 2~3선발로 두고 있었다는 것.
계약서의 최종 연봉만 따지자면 당시 메이저리그 평균 연봉($185,651) 수준에 그친다. 하지만 숨겨진 맥락을 이해하려면 당대 저연차 유망주 투수들이 받은 금액 모델을 참고해야만 한다.

< 최동원과 론 달링/오렐 허샤이저/로저 클레멘스/대니 잭슨 연봉 곡선 비교 >
이 그래프에서 최동원의 연봉 곡선은 묘한 자리에 위치한다. 같은 시기 대니 잭슨($175,000)과 거의 포개지고, 론 달링($440,000)이나 오렐 허샤이저($1,000,000)에는 한참 못 미친다. 얼핏 보면 보수적인 제안처럼 보일 수 있다.
그러나 이 선수들이 저 연봉에 도달하기까지 무엇을 했는지를 같이 보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론 달링은 3년 차에 248이닝 ERA 2.90 fWAR 2.2를 기록했고, 허샤이저는 3년 차에 239이닝 ERA 2.03 fWAR 4를 찍은 뒤에야 저 곡선을 탔다. 클레멘스의 높은 1년 차 연봉에 대한 의문은 그가 ‘1라운더 출신’이라는 것을 감안해야 한다. 즉 저 연봉들은 검증 이후의 보상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정식 리그조차 출범하지 못한 나라 출신 투수에게 1군 로스터 보장과 연봉을 완전 보장했다는 맥락을 파악해야 한다. 토론토는 4년 뒤 그가 대니 잭슨급 이상의 선발로 자리 잡을 것을 미리 계산하고 적어넣은 숫자다. 실제 성과에 따른 연봉 조정 없이, 처음부터 에스컬레이터를 보장했다.
| 최동원(崔東原), 그 이름 석 자가 타향에 울려 퍼지다

< 1981년 대륙간컵 주요 등판 일지 >
이처럼 치밀한 계산하에 완성된 파격적인 계약서. 그렇다면 신생팀 토론토는 대체 어디서 이 괴물 투수를 발견한 것일까?
1981년 8월, 캐나다 에드먼턴. 대륙간컵 직전 산타클라라 월드 게임에서 미국 대학야구 선발팀에게 석패를 당했던 대한민국 야구 국가대표팀은 최정예 멤버로 돌입했지만 출전도 하기 전에 주전 멤버들이 잔부상을 당하는 등 악재가 꼈다. 그러나 이런 뒤숭숭한 분위기 속에서도 최동원은 자신이 왜 한국 최고의 투수인지 증명했다.
그의 최고점은 8월 14일 캐나다전이었다. 직전 호주전에 1이닝만을 던지며 체력을 비축한 그는 캐나다의 타선을 단 1피안타로 꽁꽁 묶어 완봉승을 거뒀다.

< 1981/08/14 경향신문 기사 중 >
당일 경기가 끝난 후 캐나다 관중들은 최동원의 놀라운 피칭에 그의 이름을 연호했고, 현지 매스컴 역시 관심을 가졌다고 한다. 최동원은 대회 유일의 2승을 거뒀고 최우수 투수상까지 수상했다.
기사 원문 : “캐나다 관중들은 최동원의 놀라운 피칭에 감격해서인지 ‘초이(Choi)’를 외쳤고 현지 매스컴들은 ‘최동원은 이번 대회에서 가장 뛰어난 투수’라고 격찬했다.”
특히 에드먼턴 저널지는 1면에 최동원의 사진을 크게 싣고 [세계 아마야구의 슈퍼맨]이라고 대서특필하기도 했다.

< 1981/08/18 경향신문 기사 중 >
당시 토론토의 단장 팻 길릭(Pat Gillick)은 “어디서든 재능을 찾아야 한다(One needs to fish in many waters)”라는 철학 아래 여러 국제 시장을 물색하고 있었다. 1977년 도미니카에 성장 시스템을 구축한 것을 시작으로, 그 손길은 1981년 에드먼턴에까지 뻗쳐있었다. 대회 올스타 투수라는 명예를 거머쥔 최동원은 너무나 매력적인 선수였고 직후 토론토의 스카우트진은 최동원에게 접근한다. 그리고 그해 9월 15일, 계약금 1만 달러에 임시 계약서를 작성하게 된다.

< 최동원의 계약을 보도한 UPI 신문 >
최동원은 어떤 스타일의 투수로 비춰졌을까. 토론토와 협상이 타결된 날, UPI가 타전한 기사에 따르면 토론토는 이미 최동원을 2년간 지켜봤다고 한다. 또, 그의 강점은 제구력이었다. 정확히 표현하자면 메이저리그 평균의 포심/커브볼, 그리고 평균 이상의 슬라이더와 컨트롤을 가졌다고 했다. 이를 20-80 등급으로 표현하자면 50의 포심과 커브, 55-60의 슬라이더와 커맨드를 보유한 선발투수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토론토 입단 계약을 취재했던 유승민 당시 한국일보 기자의 인터뷰에 따르면 그저 좋은 정도의 컨트롤이 아니었다. ‘완벽한 제구력(Perfect control)’이라는 찬사. 유승민 기자는 토론토 블루제이스의 선수개발팀장 엘리엇 왈리(Elliott Wahle)의 코멘트를 20년 넘게 기억하고 있었다.

< 1982/09/06 경향신문 기사 중 >
한국의 기사에선 더 적나라하게 나타난다. 선동열과 비교도 포함돼 있으며, 그들이 원했던 것이 ‘즉시 전력’이었음을 확실하게 알 수 있다.

< Ballpark Figures: The Blue Jays and the Business of Baseball(1987) – 170, 171p >
해당 서적은 캐나다의 스포츠 기자이자 작가인 래리 밀슨(Larry Millson)이 저술한 책이다. 토론토의 경영 방법론과 비즈니스 측면을 다룬 에세이에 가까운 구성을 띄고 있는데, 최동원의 일화도 1장 분량 정도 나와 있다.
단장이었던 길릭은 스카우트 모건에게 갑작스러운 지시를 내려 에드먼턴으로 향하게 한다. 앞서 언급했던 2년간의 탐색에 종지부를 찍으러 가고 싶었던 듯 하다.
그렇게 에드먼턴에 도착한 모건은 단번에 그가 메이저리그 포텐셜(major-league prospect)을 가졌다고 파악한다. 그런데 토론토 말고도 그에게 접근한 구단은 몇 개 더 있던 모양이다. 대륙간컵 캐나다전을 관찰한 LA 다저스가 먼저 15만 달러를 제안했지만 마이너리그 계약이었고, 최동원은 난색을 표했다.1 이에 그들은 경기 직후 한국인 대학생을 대동하여 짧은 대화를 나눴고, 이후 4번이나 한국을 방문하며 계약을 따낸다. 하지만 KBO의 출범을 앞두고 슈퍼스타인 최동원을 놓치고 싶지 않았던 수뇌부의 외압에 의해 그는 영원히 토론토의 흙을 밟지 못한다.
“…일본과 마찬가지로 한국과도 해당 선수들과 계약할 수 없다는 규약이 맺어졌다.”(…the agreement was made with Korea, the same as it is with Japan, that you can’t sign those players.)
“그는 국가적인 영웅이었고, 그들(수뇌부)은 최동원이 떠날 수 없도록 수많은 번거로운 규제를 걸어서 떠날 수 없게 만들었다.”(He was a national hero and they put up enough red tape so he couldn’t leave.)
– 토론토 블루제이스 스카우터 웨인 모건(Wayne Morgan) –
“서울의 세계대회를 앞두고 82년 7월에 몬트리올에서 메이저리그 올스타 게임이 열렸다 (…) 거기서 만난 한국 프로야구 관계자들은 최동원 선수의 북미 진출을 도와주기는커녕 방해를 하는 느낌을 받았다.”
“팻 길릭과 스카우트인 웨인 모건을 만났다. 그들은 한국팀 우승에 많은 희망을 걸었다. 한국은 우승을 했고 최동원 선수의 병역도 해결되었다. 그러나 프로야구 출범을 앞둔 한국은 막무가내로 최동원 선수의 북미 진출을 막았다. 오히려 밀워키 마이너리그에서 뛰고 있던 박철순 선수를 불러들이는 등 한국 선수들의 해외 진출을 막고 있었다.”
– 유승민 당시 한국일보 기자 –
| 앞으로 나와서는 안 될 기록들

< 최동원의 경남고–연세대 등판 기록 – 1981/01/10 동아일보 >
그가 끝끝내 토론토의 유니폼을 입지 못한 것에는 정치적 외압 등 여러 이유가 있지만 그중 가장 치명적이었던 부분은 오른팔에 생겨진 혹사의 상흔이었다.
평균자책점(ERA)를 역산해 경남고-연세대 시절 총 이닝을 구하면 각각 294.1, 794.1이닝이 산출된다. 이를 현대 KBO의 규정이닝으로 묶어보면, 다 성장하지도 못한 경남고에서만 약 2시즌 – 연세대에선 4년간 약 5시즌 치의 부하가 한 남자의 어깨에 집중되었다.
최동원이 구타 사건으로 3학년 땐 학교에서 이탈했고 4학년엔 윤학길이 입단하며 등판 기회를 적게 가졌던 것을 감안하면, 대부분의 이닝을 단 2년간 소화했다고 볼 수 있다.

< 아마추어 시절 주요 경기 등판일지 >
경남고 시절 1975년 전국우수고교 초청대회에서 17이닝 연속 노히트노런을 거둔 것은 유명한 일화다. 연세대 재학 때도 그의 오른팔은 멈추지 않았다. 동아대와의 준결승에서 일몰 서스펜디드가 선언되자 다음날에 바로 마운드에 올랐고, 18회 끝내기 솔로홈런으로 결승전에 진출했다. 그리고 당일 오후 성균관대와의 결승에도 선발로 다시 등판해 완투승을 거뒀다. 이틀간의 합산 기록은 다음과 같다.
1978년 6월 4일 ~ 5일 등판 기록
27이닝, 투구수 375개, 12피안타, 33K, 2실점

< 1978년 세계선수권 대회 주요 등판 일지 >
같은 해 8월, 세계선수권 대회에서도 그는 쉴 수 없었다. 8월 28일부터 9월 2일까지, 달을 넘기면서 연투했고 8일간 7경기에 등판한 끝에 쿠바전 2이닝 5실점을 끝으로 물러난다. 이 무렵 누적된 피로와 이듬해 1979년의 연세대 구타 사건을 거치며 ‘철완’에도 점점 녹이 슬기 시작했다. 놀라운 점은 이 모든 것이 그가 토론토에 정식 오퍼를 받기 전에 일어났다는 사실이다.
| 그를 기억하며

< 1984년, 한국시리즈에서 역투하는 최동원 >
계약서 한 장은 말이 많다. 숫자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토론토가 최동원에게 제시한 빛바랜 종이 한 장에 담긴 건 동양의 청년에 대한 단순한 호기심이 아니었다. 대신 정식리그가 출범도 하기 전에, 실업리그 출신 한국 투수에게. 엄연한 1군 선발 자리를 열어둔 구단이 있었다는 사실이 존재했다. 그것만으로도 그 당시 최동원의 위치는 충분히 증명된다.
역사는 그에게 두 번의 무대를 주지 않았다. 이미 수백 이닝씩 혹사당한 팔로 대륙간컵을 완봉한 그는, 머나먼 타국의 환호와 역사적인 계약서를 뒤로한 채 한국 실업야구로 돌아갔다. KBO가 출범했고, 그는 리그 최고의 투수가 됐다. 하지만 경남고 마운드에서 시작된 혹사의 시계는 되돌릴 수 없었다.
“만약 한국프로야구가 5년만 더 일찍 출범했다면”이라는 가정보다 더 묵직할 수 있는 가언이 있다. 만약 그가 1982년 토론토 유니폼을 입었다면. 그 질문에 답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앞으로도 없을 것이다. 다만, 그 계약서가 남긴 숫자와 사람들의 말들은 활자가 되어 최동원이 세계가 주목한 투수였음을 조용히 증언하고 있다.
참조 = baseball almanac, 경향신문, fangraph, baseball reference, wikipedia, SABR, Sports Illustrated, NACLA, 캐나다 한국일보
야구공작소 서연우 칼럼니스트
에디터 = 이금강, 장호재, 전언수
일러스트 = 야구공작소 김은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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