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6번 시퀀스에서, 관객이 멀린스를 만났을 때 (사진=Flickr Keith Allison, CC BY SA 2.0)
[야구공작소 김준업] 어느 날 문득 필자에겐 야구가 영화처럼 느껴졌다. 수비하는 배우들은 아웃 카운트를 잡기 위해 애쓰고 공격하는 배우들은 점수를 내기 위해 노력했다. 투구와 타격, 수비 쇼트(shot)가 모여 득점과 실점 신(scene)이 되었고, 켜켜이 쌓인 신들은 경기라는 시퀀스(sequence)가 되었다. 162개의 시퀀스가 이어졌을 때 영화는 비로소 끝이 났다.
자신에게 주어진 배역을 제대로 소화하기 위해 배우들은 던지고 치고 달리고 잡으며 최선을 다했다. 그렇게 만든 영화가 흥행에 성공하면 그들은 가을야구라는 속편을 제작해 관객에게 더 많은 기쁨을 줄 수 있었다. 그러나 해마다 그럴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영화의 질은 배우로만 결정되지 않는다. 제작사가 영화에 맞지 않는 엉뚱한 배우를 비싸게 영입하는 경우도 있고, 감독이 촬영 도중에 잘못된 지시를 하는 경우도 있다. 믿었던 배우들이 이유없이 부진한 모습을 보이는 일도 예기치 않게 발생한다. 이런 영화가 해피 엔딩으로 끝나는 경우는 매우 드물다.
볼티모어란 제작사가 만드는 영화의 팬들은 대부분 매해 상영되는 영화를 끈기있게 완주했다. 그러나 상영 중간에 나가서 다신 들어오지 않는 관객도 있었고, 화장실에 가는 척하다 다른 상영관으로 들어간 관객에 대한 소문이 가끔 들려오기도 했다.
볼티모어가 관객에게 선물한 116번 시퀀스
야구란 영화를 만들어가는 구성원들은 관객의 이탈을 막는 동시에 신규 팬 유입을 위해 매년 최선을 다한다. 그 방법은 단순하지만 명확하다. 최대한 좋은 기억들을 관객에게 많이 심어주는 것이다.
영화 <2018 볼티모어 오리올스>는 상영 내내 관객에게 고통을 줬다. 여기저기서 환불 요청이 들어오자 제작사는 7월 말 배우들을 대거 교체하였다. 몸값이 비싼 배우들을 다른 제작사에 넘기는 대신 향후 몇 년 후에는 대규모 관객을 불러들일 수도 있는 전도유망한 배우들을 키우기로 결정한 것이다. 쉽지 않은 제작사의 결정에 관객들은 지지의 환호성을 보냈다. 관객들은 밝은 미래를 꿈꾸며 더 이상 영화를 보면서 일희일비하지 않게 됐다.
매일 패배하는 시퀀스를 보면서도 한결 덜 슬퍼진 관객들은 이 영화를 끝까지 완주하고 있었다. 그러던 2018년 8월 10일, 116번 시퀀스가 상영되었다. 보스턴 레드삭스와의 이 시퀀스는 양측 도합 31점을 내는 엄청난 액션을 남긴 채 볼티모어의 패배로 끝났다. 그러나 승부와 관계없이 관객들은 이 시퀀스를 제작사가 준 선물로 오래오래 기억하게 될 것이다.
이 날은 볼티모어 주연 배역이 다음 후계자에게로 이어진 날이다. 이 자리를 빌어 그 날의 시퀀스를 복기해 본다.
#1. 브라이언 로버츠, 볼티모어 명예의 전당 입성
116번 시퀀스는 브라이언 로버츠가 25년간 라디오 중계를 맡은 프레드 맨프라 캐스트와 함께 볼티모어 오리올스 명예의 전당에 입성하는 신으로 시작됐다.
“제 곁에는 많은 베테랑 동료들이 있었습니다. 저는 그들 옆에서 배우고 행동에 옮겼습니다. 오늘 저는 드디어 그들이 섰던 자리에 서게 되었습니다.”
볼티 명전 이상 없다 (사진=Flickr Keith Allison, CC BY SA 2.0)
그의 이름만 떠올려도 볼티모어 관객들의 마음은 울렁거릴 것이다. 2000년대 지독한 암흑기에 빠져있던 볼티모어의 1번 타순에는 늘 로버츠가 있었다. 그는 무대에선 돌격대장, 클럽하우스에선 리더였다.
로버츠의 몸을 사리지 않는 액션 연기는 언제나 관객을 열광케 했다. 매 순간 최선을 다하는 성향 탓에 해를 거듭할수록 로버츠의 부상은 잦아졌다. 그러나 무대로 복귀할 때마다 공격, 수비, 주루 모든 면에서 건재함을 과시했다. 전속 배우로 자리 잡을 무렵의 외야수 닉 마케이키스와 애덤 존스는 선배 로버츠를 보고 많은 것을 배웠다.
세월이 흘러 출연하는 날보다 병원에 있는 날이 더 많아진 로버츠는 결국 은퇴를 택했다. 그의 클럽하우스의 리더 배역은 애덤 존스에게 넘겨졌다. 그러나 돌격대장 배역은 여러 선수가 대역을 했을 뿐, 오랜 기간 동안 주연 배우를 구할 수 없었다.
#2. 클럽하우스 리더 애덤 존스의 선택
한편, 로버츠로부터 클럽하우스 리더 자리를 물려받은 애덤 존스는 오래전부터 볼티모어에 없어서는 안 될 존재로 자리 잡고 있다. 관객들은 10년 전부터 지금까지 늘 캠든 야즈 외야 중앙에 서 있는 애덤 존스를 봐왔다.
그러나 언제나 든든했던 존스는 최근 몇 년 간 더 이상 예전처럼 수비하지 못했다. 특기였던 홈런도 줄어들었다. 철강왕이라 불렸던 그가 세월을 이기지 못하고 결장을 하곤 했다. 팀의 승리에 기여하는 정도도 급격히 줄어들었다.
시민 존스 (사진=Flickr Keith Allison, CC BY SA 2.0)
그러나 존스는 트레이드를 거부하고 볼티모어라는 무대에 남았다. 물론 올시즌이 끝나고 존스는 다른 곳과 계약할 수도 있다. 그렇기에 그는 브라이언 로버츠에게 받은 클럽하우스 리더 자리를 다음 후계자에게 전달할 준비를 해야 했다.
야구란 영화에서는 수비하러 처음 무대로 나갈 때, 전통적으로 클럽하우스의 리더가 선두에 서서 팀을 이끈다. 오랫동안 볼티모어에서 그 역할을 해온 존스는 116번 시퀀스에서 세드릭 멀린스라는 신인 배우에게 그 역할을 넘겨줬다. 그리고 그는 자연스럽게 우익수 자리로 향했다. 볼티모어에서 활동하는 동안 그가 중견수 자리를 내주고 다른 포지션으로 수비 배역을 소화하러 들어간 것은 처음이었다.
수비하러 먼저 나가라는 존스의 지시를 받은 멀린스는 그 배역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았기 때문에 장난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존스의 계속되는 지시와 주변 동료들의 설득 끝에 멀린스는 자리를 박차고 무대로 향했다.
멀린스씨 캠든 야즈에 가다 (영상=MLB Cut4 제공)
#3. 차세대 돌격대장 세드릭 멀린스 데뷔
꽤 오랜 기간 황무지였던 볼티모어의 배우 농장은 외야수 어스틴 헤이즈와 포수 찬스 시스코 덕분에 평가가 점점 올라갔지만 올시즌 부진을 통해 다시 내려갔다. 그러나 묵묵히 성장하고 있던 작은 외야수가 있었으니, 바로 올시즌 영화의 후반부 흥행을 책임지는 중견수로 활약하고 있는 세드릭 멀린스다.
신장이 173cm인 멀린스는 메이저리그의 대표 단신 선수인 168cm인 호세 알투베보다 조금 큰 수준이다. 체구가 매우 작은 편이 그는 경쟁력을 갖추기 위해서 할 수 있는 노력은 모두 했다.
“어릴 때부터 아버지는 ‘너는 결코 큰 사람은 아니지만 너의 체구에 맞는 최고의 야구를 할 수 있어.’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런 가치관은 제 야구인생에 절대적인 도움이 되고 있지요.”
왼손잡이였던 멀린스는 열 살 무렵 좌투수를 상대로는 경기에 기용되지 못한다는 것을 깨달았고, 경쟁력을 갖추고자 오른손 타격 연습을 하였다. 꾸준한 노력 끝에 멀린스는 스위치 히터로 거듭났다. 빠르지 않았던 달리기도 육상 선수와의 특훈을 통해 향상되었다.
모던 타임즈 (사진=Flickr Keith Allison, CC BY SA 2.0)
브라이언 로버츠가 맡았던 돌격대장 배역은 아무나 쉽게 차지할 수 있는 자리가 아니었다. 로버츠가 떠난 후 볼티모어에서 돌격대장으로 활약한 배우는 네이크 맥클라우스와 닉 마케이키스, 매니 마차도뿐이었다. 이처럼 여러 배우를 써봤지만 그 누구도 벅 쇼월터 감독의 마음에 들진 않았다.
대역했던 배우들이 부족한 건 아니었다. 그러나 적임자라고 생각됐던 맥클라우스는 짧은 활약 끝에 다른 곳으로 이적하였고, 나머지 대역 배우들은 리드오프보단 중심 타선에 맞는 배우들이었다. 작년 후반부에 탬파베이 레이스에서 이적한 팀 베컴도 1번 타순에서 멋진 역할을 했다. 그러나 베컴은 출루와 주루보단 장타에 더 장점이 있었다. 쇼월터 감독이 원한 건 좀 더 전통적인 리드오프, 즉, 자주 나가고 빨리 달리며 그라운드를 휘저을 수 있는 배우였다. 볼티모어의 돌격대장 배역은 오랜 기간 동안 오랫동안 무주공산이나 다름없었다.
세드릭 멀린스는 오랜만에 나타난 돌격대장의 자질을 갖춘 배우였다. 그는 올 시즌 보위 베이삭스(AA)와 노퍽 타이즈(AAA)에서 7.6%의 볼넷률과 13.6%라는 삼진율을 기록하며 준수한 눈야구를 보여줬다. 또한 22번의 도루 시도에서 21번을 성공한 멀린스는 리드오프 배역에 적임자라고 생각되는 인재였다.
특히 가장 큰 장점인 수비는 쇼월터 감독이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야수의 덕목이었고, 무엇보다도 마이너리그 동료들에게 굉장한 신뢰를 받는 선수였다. 드래프트에서 13라운드에 뽑힐 만큼 큰 주목을 받지 못했던 멀린스는 결국 빅리그 데뷔전에서 3안타를 치며 맹활약했다.
혜성처럼 나타난 멀린스에 대한 동료와 관객들의 지지 덕분이었을까, 멀린스는 데뷔 후 모든 시퀀스에 출연하면서 두 개의 홈런과 다섯 개의 2루타를 쳐내며, 타율 .309 출루율 .387 장타율 .509, wRC+ 145를 기록 중이다. 9번 타순으로 시작한 멀린스는 높은 출루율과 주루 스탯(BsR 0.5)을 기록하며 1주일만에 돌격대장 배역을 따내고 1번 타순으로 들어오고 있다.
캠든 야즈로 진로를 돌려라 (영상=MLB Cut4 제공)
다만 수비 측면에서는 아직 부족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아직 메이저리그 구장에 적응을 못해 담장 앞까지 쫓아가서 놓친 타구가 종종 있었다. 그러나 최근 경기에선 뉴욕 양키스의 지안카를로 스탠튼의 통산 300호 홈런이 될 뻔했던 타구를 훔치면서 점점 적응하고 있는 모습을 보여줬다.
관객은 이제 세드릭 멀린스로 버틸 수 있다
영화 <2018 볼티모어 오리올스>의 116번 시퀀스가 상영된 날, 볼티모어 관객은 가장 큰 기쁨을 느끼고 위로를 받았을 것이다.
오랜 기간 동안 주연을 찾지 못한 브라이언 로버츠의 돌격대장 배역, 그리고 애덤 존스에게 이어졌던 클럽하우스 리더 배역은 모두 세드릭 멀린스로 이어지고 있다. 멀린스가 정말 이 중요한 역들을 맡을 자질이 있는지는 아직 아무도 모른다. 그러나 그는 수비, 공격, 주루에서 늘 선두에 나서 팀을 지휘하는 중책을 맡아 잘 해내고 있다. 매니 마차도의 부재가 빚은 관객의 허전함도 멋진 활약으로 채워나가고 있다.
그가 보고 싶어 오늘도 관객은 극장으로 향한다. 데뷔 후 모든 시퀀스에 출연한 멀린스는 최근 엉덩이 통증으로 결장하고 있다. 그가 없는 무대는 상대를 이겨도 마냥 기쁘지 않다.
주연 배역은 후대로 이어지고 있다. 관객은 과거를 추억하고 현재를 기억에 새기며 미래를 기대하고 있다. 오늘도 지겠지만 즐길 수 있다. 주연 세드릭 멀린스가 이끌어나가는 무대를 볼 수 있기에.
출처: fangraphs.com, baseball-reference.com, masnsports.com
에디터=야구공작소 이청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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