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출처 = 클리블랜드 가디언스 공식 트위터>
비제이 고빈다라잔 터크경영대학원 교수는 3박스 솔루션의 창시자다. 3박스 솔루션은 조직의 혁신을 도모하기 위한 결정 체계다. 그는 동아 비즈니스 포럼에서 혁신을 배면뛰기에 비유했다.
높이뛰기 초창기에는 가위 뛰기 방식이 정론이었다. 당시의 선수들은 최고의 가위뛰기를 구현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다만 역사적으로 볼 때, 높이뛰기 기록 혁신은 기술의 발전이 아닌 방식의 변화에서 나타났다. 웨스턴 룰, 이스턴 룰, 배면뛰기가 차례로 등장할 때마다 기록은 큰 폭으로 상승했다.
어쩌면 KBO 리그에서 히어로즈를 제외한 구단들 역시 가위뛰기를 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프로야구단 운영 체계에 3박스 솔루션을 적용하면 어떤 아이디어가 나올까? 과연 야구단은 앞으로 파괴적 혁신을 이뤄낼 수 있을까?
박스 1에서 박스 3으로
논의에 앞서 3박스 솔루션을 다시 들여다보자. 이 프레임워크는 명칭 그대로 세 개의 박스로 구성된다. 박스 1은 현재를 관리하는 영역이다. 박스 2는 과거와 결별하는 행위를 포함한다. 박스 3은 미래를 계획하고 준비하기 위한 전략이다. 박스 1이 현재라면, 박스 2, 3은 미래에 해당한다. 야구팬들에게 익숙한 사례를 들어 3박스 솔루션을 이해해 보자.
< 3박스 솔루션 >
탬파베이 레이스는 박스 2의 대표적인 사례다. 2005년, 앤드류 프리드먼은 레이스의 단장으로 부임했다. 그는 과거 데블레이스 시절의 부정적 이미지를 극복하고자 했다. 데블레이스는 1998년 시즌부터 2004년까지 한 번을 제외하고 모두 지구 꼴찌를 차지한 팀이었다. 프리드먼이 이끄는 레이스는 노후된 구장을 보수하고, 아마추어 데이터 전문가를 구단 직원으로 채용했다. 될성부른 유망주들은 일찌감치 장기 계약으로 묶어 놓았다. 2008년, 레이스는 지구 우승을 넘어 아메리칸 리그 챔피언에 올랐다. 2010년에는 다시 AL 동부지구 1위를 차지했다.
한편 피츠버그 파이리츠의 수비 시프트는 박스 3에 해당하는 혁신이다. 시프트 등장 전까지 수비수는 정해진 위치에서 공을 잘 잡기 위한 방법을 고민했다. 그들의 주요 관심사는 어떻게 하면 타구 판단이 빨라질지, 글러브에서 얼마나 빨리 공을 빼내는지 등이었다. 파이리츠는 선수의 역량 대신 시스템에 집중했다. 그들은 수비수가 서 있는 위치 자체를 조정했다. 효과는 끝없이 이어졌다. 올 시즌부터 메이저리그는 수비 시프트를 제한하는 조치를 단행했다.
다시 국내 프로야구단의 운영 방식을 들여다보자. 박스 1에 과도하게 업무가 집중되어 있다. 어찌 보면 당연한 현상이다. 프로야구는 거의 매일 경기가 치러진다. 경기 전후로 준비해야 할 것들과 업데이트할 사항이 넘쳐난다. 드래프트를 비롯한 각종 행사에도 참여해야 한다. 인력도 충분한 편이 아니다. 박스 2, 3에 대한 고민은 뒷순위로 밀려날 수밖에 없다.
자연스레 상대 구단 대비 기술적 우위를 점하려는 활동이 이어질 수밖에 없다. 다큐멘터리를 통한 마케팅이 대표적이다. 한화 이글스의 ‘클럽하우스’, 롯데 자이언츠의 ‘죽어도 자이언츠’, KT 위즈의 ‘위닝 런’이 모두 같은 해에 공개되었다. 나쁘다고 할 수는 없지만, 더 좋은 가위뛰기 선수가 되기 위한 노력으로 보이는 것도 사실이다.
비제이 고빈다라잔 교수는 획기적 혁신이란 기술이 아닌 비즈니스모델이라고 언급했다. 진정한 혁신은 구단 시스템 자체를 새로 바꾸는 일이다. KBO 리그의 키움 히어로즈, 미국 독립 야구의 포틀랜드 매버릭스 같은 이단아가 필요하다. 특히 포틀랜드 매버릭스는 독립야구단의 패러다임을 바꾼 팀으로 유명하다. 메이저리그 산하 구단이 아닌 지역 기반의 자생 야구단으로 활동한 그들의 이야기는 넷플릭스 프로그램 <더 배터드 배스터즈 오브 베이스볼>에 자세히 담겨있다. 앞선 두 팀을 제외하고 야구단의 또 다른 박스 3 버전은 무엇일까?
SC 형태의 구단 운영
종합스포츠클럽(SC) 방식이 해답이 되어 줄 수 있을까? 우리나라 야구단은 미국과 일본의 영향을 받은 기업형 시스템으로 운영된다. 스포츠팀은 하나의 종목을 운영한다. 고등학교 및 대학교 선수들을 드래프트 방식으로 수혈한다.
반면 유럽은 다르다. 레알 마드리드, FC 바르셀로나 같은 구단은 종합스포츠클럽 형태다. 축구팀이 가장 유명하지만, 다른 종목 팀도 함께 운영한다. 일례로 스포르팅 CP는 축구단 외에도 50개 이상의 종목을 갖추고 있다. 종목별로 생활체육팀과 유소년 시스템도 잘 설계되어 있다. 축구단을 제외한 모든 팀의 운영비 합산액은 230억 원에 불과하다. 비록 소정이긴 하나 구단이 가입자들로부터 이용료를 받기 때문이다. 지도자의 월급을 각 종목 협회가 부담하는 시스템 덕도 있다.
한 아이를 키우기 위해서는 온 마을이 필요하다는 말이 있다. 유럽 아이들이 생활 체육을 마음껏 즐기는 배경에는 종합스포츠클럽과 지자체, 종목별 협회의 굳건한 연합 체계가 자리 잡고 있다.
<스포르팅 CP 체조 수업에 참여하는 아이들>
그런 의미에서 종합스포츠클럽 형태의 구단은 존재 자체가 사회 공헌이다. 연고지 시민들의 건강을 증진하는 일은 스포츠 구단이 가장 잘 할 수 있는 CSR 활동이다. 그동안 국내 프로야구단의 사회 공헌 활동 중 다수는 돈만 있으면 어느 기업이든 할 수 있는 일이었다. 연탄 좀 기부한다고 착한 기업이 되지 않듯이, 진정한 사회 공헌 활동은 비즈니스 모델부터 선순환 구조를 갖추어야 한다. 스포츠 활동에 참여하는 시민들은 구단의 일원이자 소비자가 된다. 경기가 없는 날에도 구장에 운동하러 찾아온다. 그럴수록 경기 관람에 대한 진입 장벽 역시 점차 낮아진다. 가족 단위로 스포츠 활동에 참여할 경우 시너지 효과는 더욱 커진다.
종합스포츠클럽 구단은 고빈다라잔 교수가 정의한 비즈니스 모델의 3가지 물음에 답할 수 있다. 누가 구단의 고객인가? 연고지 시민들이다. 구단은 어떤 가치를 전달할 것인가? 스포츠를 통한 연고지 시민들의 건강 증진 기회를 제공한다. 어떤 가치사슬로 의미를 전달할 것인가? 구단 내부에 다양한 종목의 클럽을 운영한다. 두각을 나타내는 유망주의 경우 상위 레벨로 올린다. 학업은 계속해서 병행한다. 필요하다면 구단 내부에 아카데미를 마련한다. 이와 비교해 우리나라 프로야구단은 첫 번째 물음부터 제대로 답하지 못한다. 지난 칼럼에도 언급했듯이 B2C 모델의 탈을 쓴 B2B 모델은 바람직한 답변이 아니다.
혁신의 조건들
종합스포츠클럽으로 야구단 체계를 바꾸려면 헤쳐 나가야 할 과제가 많다. 먼저 스포츠그룹이 보유한 구단의 일원화다. 우리나라는 삼성, GS, 현대자동차 스포츠그룹 등이 다양한 종목의 구단을 운영하고 있다. 종합스포츠클럽의 정착을 위해서는 그룹 차원에서 힘을 실어 추진하는 방식이 가장 편리하다. SC 구단의 핵심은 구단 명칭과 연고지의 통합성에 있다. 그러나 현대자동차 스포츠그룹만 놓고 봐도 야구단은 기아 타이거즈, 배구단은 현대건설 힐스테이트라는 명칭으로 운영 중이다. 연고지 역시 광주와 수원으로 다르다. 타 스포츠그룹도 비슷한 양상이다.
두 번째 과제는 역량을 갖춘 리더다. 우리나라에서 SC 형태의 구단 창단을 시도한 사례가 없지는 않았다. 하지만 지자체, 지역 체육회, 구단 경영자 등의 반대로 모두 무산되었다. 고빈다라잔 교수는 특히 사고를 바꾼 CEO가 필요하다는 점을 역설했다. 야구단 단장은 종합스포츠클럽 구단의 명확한 비전을 설정하고, 구체적인 행동 계획을 제안할 수 있어야 한다. 다양한 이해관계자를 설득할 수 있도록 원활한 의사소통 능력까지 갖춘 인재여야 한다. 그룹의 협조를 끌어낼 수 있는 모기업 소속의 경영자라면 금상첨화다. 다만 KBO 리그는 아직도 선수 출신 단장을 기용해 박스 1에 최대한의 자원을 투입하는 인사가 보편화되어있다.
<학교 스포츠클럽 활동으로 탄생한 ‘팀 킴’>
마지막으로 교육 정책의 변화도 필요하다. 우리나라에서 생활 체육이 제대로 구현되지 않는 배경에는 학부모들이 스포츠의 필요성에 공감하지 못하기 때문도 있다. 자녀가 엘리트 코스를 밟을 게 아니라면 굳이 운동시킬 명분이 없는 것도 사실이다. 스포츠를 통한 사회화, 정서적 및 육체적 성장은 학업 대비 우선순위에서 밀려나곤 한다. 인식을 전환하려면 제도적인 보완이 필요하다. 학교스포츠클럽과 지역 내 프로 구단이 제휴를 맺는 방법도 있다. 최고의 시나리오는 아니지만 적어도 뜻이 있는 구단 홀로 외로운 싸움을 하는 사태는 피할 수 있다.
40년을 지속해온 프로야구단의 시스템을 바꾸기는 쉽지 않다. 더군다나 종합스포츠클럽 운영은 우리나라에서 아무도 해보지 않은 일이다. 보수적인 야구계 안에서는 더욱 어렵다. 하지만 국내에서 오직 야구단만이 할 수 있는 일인 것도 맞다. 유럽의 SC 구단도 축구라는 확실한 간판 종목이 있다. 타 종목은 축구팀의 후광 효과를 크게 받는다. 우리나라에서 프로야구단만큼의 영향력을 가진 스포츠팀도 없다. 다시 고빈다라잔 교수의 말을 곱씹어 볼 필요가 있다.
“오늘날의 전략은 2030년에 무엇을 할지에 대한 것이 아니다. 2030년의 비전을 현실화하기 위해 지금 박스 3의 어떤 프로젝트를 시도하는지가 되어야 한다.”
이미 자생력에 대한 고민은 시작되었다. 비단 야구단뿐 아니라 국내 스포츠 조직은 존재 이유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받고 있다. 불확실하지만 약한 신호는 눈 깜짝할 새 큰 파도로 바뀌기 마련이다. 휩쓸리지 않고 파도에 올라타려면 지금부터 작고 빠르게 실험을 거듭해야 한다. SC 형태의 구단 운영에 대한 고민은 파괴적 혁신을 이루어내는 첫걸음이다.
야구공작소 조훈희 칼럼니스트
에디터 = 도상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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