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구유감(有感)]연극이 끝난 후

프로 스포츠 선수라면 누구나 스포츠 기량을 갖추어야 한다. 그리고 프로 ‘팀 스포츠’ 선수라면 거기에 더해 ‘배우’로서의 역량도 필요하다. 좋든 싫든 어느 정도는 가면을 쓰고 연기를 할 수 있어야 한다.

팬들은 선수에게 야구만 잘할 것을 바라지 않는다. 야구는 기본이다. 팬들이 바라는 것은 우리 팀 선수들이 우리 팀 팬이 되는 것이다. 우리들처럼 ‘조건 없이’ 팀을 사랑해 주길 바란다.

이를 바라는 이유는 역으로 이루어지기 어려움을 알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선수들에게 소속팀은 생계를 유지하는 직장이고, 나머지 팀도 언젠가 이직할 수도 있는 잠재적 직장이다. 아무런 금전적 이해관계가 없는 팬과 똑같은 시각을 가지는 것은 불가능하다. 팬들은 ‘조건’이 있을 수가 없으며 선수들은 ‘조건’이 없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박용택이 LG 팬들의 절대적인 지지를 받는 이유 중 하나로 2010년에 LG와 체결한 FA 계약을 들 수 있다. 사람의 진정성은 스스로 손해를 감수하면서까지 어떤 행동을 할 때 가장 분명하게 입증된다. 2010년 박용택은 마이너스 옵션까지 걸린 4년 34억이라는 계약을 체결함으로써 자신의 LG에 대한 ‘무조건적인’ 충성심을 가장 확실하게 보여줬다.

송승준이 마지막까지 롯데 팬들의 사랑을 받은 이유는 스스로 롯데 팬이었기 때문이다. 평소 송승준이 경기 중에 덕아웃에서 보여주는 모습은 ‘롯데 아재’ 그 자체였다. 누구나 ‘송승준은 우리와 마찬가지로 롯데 팬’이라는 감정을 느낄 수 있도록 행동한 것이 송승준의 가장 큰 매력이었다.

그렇기에 프로야구선수는 자기 자신이 소속팀의 팬이라고 연기하는 배우가 될 수 있어야 한다. 양심을 속이라는 뜻이 아니다. 애당초 100% 진심이나 100% 연기라는 건 있을 수 없다. 송승준도 방송에서 “롯데는 돈을 안겨준 팀”이고 “(롯데를)좋아하는 것과 (금전적으로)동기부여가 되는 것은 다르다.”고 말한 바 있다.

어떤 선수든 소속팀이 지길 바라진 않을 것이다. 특별히 갈등이 있는 게 아니라면 그 팀에서 커리어를 계속 이어가고 싶은 마음이 생기는 것도 당연하다. 10년쯤 같은 팀에 있다 보면 팬들에게 고마운 마음이 들고 지역에 정이 드는 것도, 사람이라면 당연히 생길 수 있는 마음이다. 이런 마음을 말로 나타내는 것이 선수들이 할 수 있는 연기다.

그리고 이런 말을 했다가 뒤에 더 좋은 조건을 제시한 팀으로 떠난다고 해서 ‘돈밖에 모르는 배신자’, ‘거짓말쟁이’ 소리를 들을 이유도 없다. 남고 싶다는 말이 ‘어떤 조건 하에서도’를 내포하는 건 아닌 것은 당연하다. 오히려 ‘조건이 맞으면’이 붙어 있다고 보는 게 자연스럽다. 생략됐을 뿐이다. 자신이 연극을 보고 있다는 것을 모르는 관객은 없지만, 그럼에도 배우가 연극 중에 ‘우리는 연극 중일 뿐입니다.’고 말하지 않는 것과 같다.

연극적 측면에서 FA 이적의 의미는 배역 변경이다. 인터미션 동안 A팀 팬 배역에서 B팀 팬 배역으로 바뀌는 것이다.

FA 이전에는 연기를 잘하고 못하고는 있어도 배우가 자의로 배역을 바꿀 수는 없었다. 조금은 연극이 단조로웠지만 관객의 배우에 대한 몰입감은 높을 수밖에 없었다. 배우도 배역이 좋든 싫든 평생 그 배역을 할 수밖에 없었고, 같은 배역을 십수년째 하다 보면 자신도 모르게 배역 그 자체가 되어버리기도 했다.

이제는 배우가 스스로 배역을 바꿀 수 있다. 노파심에 말하자면 필자는 FA 제도를 전적으로 지지하고 재취득기간도 없어져야 한다고 본다. 그러나 연극을 보는 관객의 입장에서는 매년 배역이 휙휙 바뀌는 이 시대가 썩 달갑지 않다. 연극적인 측면에서, 배역이 자주 바뀌는 건 역동성보다는 혼란함을 느끼게 한다. 대부분 관객에게는 잠깐의 놀람에 불과하고, 소수에게는 큰 충격이 된다. 안심하고 연극에 집중할 수 없는 시대가 된 것이다.

가끔은 배역을 바꾸었다가 원래 배역으로 돌아오는 경우도 있다. 흔치 않은 일이다.

배역을 옮길 수 있음에도 옮기지 않는 경우도 있다. 역시 흔치 않은 일이다.

 

야구공작소 오연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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