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인, 두 번째 스무살] 2017년 – 칠성에서 삼강까지

* 이 연재물은 ‘KBO 박스스코어 프로젝트’와 함께 합니다.

KBO 리그에서는 몇 년에 한 번씩 역사에 남을 시즌 최종전이 펼쳐진다. ‘져주기 게임’으로 대표되는 1984년 롯데 자이언츠와 OB 베어스의 후기리그 우승 대결을 시작으로 1986년에는 두 팀의 성적과 세 선수의 타이틀이 걸린 운명의 한판이 진행됐다. 이후 1990년에는 LG 트윈스가 최종전에서 끝내기 홈런을 터트리면서 페넌트레이스 우승의 주인공이 됐고, 1998년에는 아예 직접적으로 4위 자리를 두고 경쟁하던 OB 베어스와 해태 타이거즈가 최종전에서 사실상의 ‘원 게임 플레이오프’를 진행했다.

이후로도 KBO 리그에서는 최종전에 순위가 결정되는 경우가 여러 차례 나왔다. 1999년 롯데는 마지막 경기에서 패배하며 페넌트레이스 1위의 꿈을 접었고, 2005년에는 2위 SK 와이번스가 마지막 날 6위 LG 트윈스에 고춧가루를 맞으며 3위로 떨어졌다. 2013년과 2020년에는 7년의 간격을 두고 서울을 연고지로 하는 세 팀이 최종전에서 순위가 결정되는 심장 터지는 시즌을 보냈다. 2013년에는 2위에 올랐던 LG는 2020년에는 4위로 시즌을 마감했고, 키움 히어로즈는 2013년과 2020년 모두 자신들이 자멸하면서 낮은 순위로 떨어졌다.

그러나 앞서 언급한 경기들은 대부분 순위 싸움이 걸린 팀에게만 의미가 있었다. 이미 포스트시즌 탈락이 확정된 팀들은 큰 의미 없이 잔여 일정을 소화하기 위해 진행하는 경기일 뿐이었다. 2020년의 경우에도 서울 세 팀과 KT 위즈에게는 중요한 경기였지만 이미 순위가 결정된 나머지 6팀에는 개인 타이틀을 제외하면 중요한 경기는 아니었다. 그나마도 마지막 경기까지 알 수 없었던 타격왕의 향방도 ‘졸렬한 타격관리’ 없이 KIA 타이거즈의 최형우가 0.354를 기록하며 깔끔하게 결정됐다.

그런 의미에서 2017년 KBO 리그 페넌트레이스 최종전은 모든 경기가 주목받았다는 점이 특별했다. 5경기 중 4경기는 1위에서 4위까지의 순위를 결정할 수 있는 중요한 일전이었고, 포스트시즌 진출 순위와 아무 상관이 없던 나머지 1경기는 KBO 리그의 레전드 이승엽의 은퇴 경기였기 때문에 모두의 시선을 끌어올 수 있었다. 특히 1위와 3위 자리의 경우 9월 이후 갑자기 순위가 요동치며 바뀐 상황이어서 더 극적이었다.

특히 나머지 1~4위 경쟁 팀들이 전반기부터 상위권에 머물렀던 반면, 롯데는 8월에 접어들어서야 본격적으로 상위권 경쟁에 나섰다는 점에서 더욱 주목받았다. 어떻게 본다면 마지막 경기까지 이 순위를 가져온 것조차도 롯데에는 기적이나 다름이 없었다. 대체 롯데는 2017년 어떤 시즌을 보냈을까?

롯데는 2017시즌을 앞두고 에이스 조쉬 린드블럼이 팀을 떠나는 악재가 발생했고, 4번 타자 황재균 역시 메이저리그 도전을 선언하면서 투-타의 핵심이 모두 이탈하는 상황을 맞이했다. 그러나 해외 리그에서 5년 동안 뛰었던 ‘조선의 4번 타자’ 이대호가 무려 4년 150억 원의 계약을 맺고 복귀하면서 분위기가 반전됐다. 2016시즌 막판 병역의 의무를 마친 전준우까지 돌아오면서 롯데의 전력은 한 층 강화됐다.

하지만 2017시즌 롯데의 출발은 그다지 좋지 않았다. 린드블럼을 대체할 외국인 투수 한 자리는 계속 구멍이 났고, 결국 린드블럼 본인이 7월 다시 계약을 맺을 때까지 롯데는 사실상 브룩스 레일리 한 명만 믿어야 했다. 그 레일리도 부진했고, 외국인 타자 앤디 번즈가 부상으로 이탈했던 6월에는 아예 1군 엔트리에 외국인 선수가 한 명도 없는 초유의 사태가 발생했다. 심판진과의 마찰과 박세웅을 제외한 젊은 선수들의 더딘 성장은 롯데를 더욱더 아프게 했다. 시즌 초반 폭발했던 이대호마저 부진하자 롯데는 수렁으로 빠져들었다. 롯데는 8월 초 LG와의 3연전을 모두 내주면서 5위와 6경기 차 7위에 머물렀다. 가을야구는 점점 더 멀어지는 것 같았다.

하지만 8월이 되자 롯데는 완전히 다른 팀이 됐다. 한 달 사이 2번이나 6연승을 기록했고, LG 3연전 스윕 이후로는 한 번의 루징 시리즈 없이 8월을 마감했다. 8월에만 19승을 거둔 롯데는 어느덧 4위까지 올라왔다. 9월에도 여전히 무서운 기세를 보여준 롯데는 9월 23일 NC 다이노스를 제치고 드디어 3위 자리까지 올랐다. 특히 ‘낙동강 더비’의 당사자인 NC는 전년도 롯데를 상대로 무려 15승 1패를 거뒀고, 2017시즌 전에는 베테랑 손시헌이 “롯데와 8승 8패만 해도 억울할 것 같다”라는 말로 롯데를 자극했다. 자연히 NC만큼은 잡아야 한다는 분위기가 퍼졌다.

그러나 전년도 한국시리즈 준우승팀 NC는 만만한 팀이 아니었다. 롯데가 시즌 막판 연승을 추가하는 사이 NC 역시 같은 기간 패배를 더하지 않고 승리만을 추가하고 있었다. 좀처럼 승차는 벌어지지 않았고, 결국 최종전을 앞두고 두 팀은 공동 3위에 위치했다. 이대로 시즌이 끝났다면 상대전적이 앞섰던(9승 7패) 롯데가 3위를 확정했겠지만, 아직 두 팀에는 한 경기가 남아있었다. 만약 롯데가 최종전에서 승리한다면 자력으로 3위를 확정하지만, 반대로 롯데가 패배한다면 NC가 무승부만 해도 4위로 내려앉게 되는 상황이었다.\

10월 3일, 운명의 최종전이 시작됐다. 이날 벌어진 5경기의 매치업은 다음과 같았다.
14:00 – KIA 타이거즈 vs. KT 위즈(수원) / SK 와이번스 vs. 두산 베어스(잠실) – 1위 결정
15:00 – LG 트윈스 vs. 롯데 자이언츠(사직) / NC 다이노스 vs. 한화 이글스(대전) – 3위 결정
17:00 – 넥센 히어로즈 vs. 삼성 라이온즈(대구) – 이승엽 은퇴식

경기가 시작되기 전부터 두 팀의 신경전은 치열했다. 당초 공휴일인 개천절에 경기가 예정됐기에 5팀 모두 14시에 경기를 진행할 예정이었다. 그러나 최종전 불꽃놀이를 해야 했던 한화와 이승엽의 은퇴식을 치러야 했던 삼성이 경기 시간을 17시로 변경했다. 그러자 자칫 손해를 볼 수도 있었던 롯데 측에서 항의했고, 결국 롯데와 NC는 나란히 15시에 경기를 시작하는 것으로 결정됐다.

우여곡절 끝에 15시 정각에 경기가 시작됐다. 이날 롯데는 당시 팀 내 외국인 투수 단일시즌 최다승에 도전하던 13승의 레일리가 등판했고, LG는 2년 차 우완 김대현이 선발로 나섰다. 선발의 무게감은 롯데 쪽으로 기울었지만 경기 초반은 의외의 투수전이 이어졌다. 롯데는 김대현을 상대로 첫 2이닝 동안 단 15구만을 던지게 하는 등 타선이 제 역할을 하지 못했다. 그런 와중에 경쟁팀인 NC는 1회 초 공격부터 5점을 올리며 3위 확정을 위해 온 힘을 다했다.

레일리는 2회 초 무사 만루를 만들며 위기를 자초했다. 그러나 이어 등장한 세 타자를 연달아 삼진 처리하며 고비를 넘겼다. 그러자 NC의 상대 팀이었던 한화는 사직 경기가 3회로 접어든 시점에서 1회 말 이성열의 3점 홈런 등으로 4점을 올리며 맹추격에 나섰다. 놀라울 정도로 두 경기의 운명은 비슷하게 흘러가고 있었다.

0의 행진을 이어가던 양 팀의 균형은 5회에 깨졌다. 롯데는 5회 말 김문호와 문규현의 안타로 1사 1, 3루 기회를 잡았다. 여기서 황진수의 2루수 앞 땅볼 때 송구 실책이 나오며 첫 점수를 올렸다. 병살타가 될 수도 있었던 상황에서 갑자기 주저앉으며 송구 동작을 방해한 문규현의 재치 있는 주루로 인해 득점으로 이어진 것이다. 롯데는 이어 전준우의 적시타까지 나오며 5회 말 2득점을 올렸다.

그러나 레일리는 이 리드를 끝내 지키지 못했다. 7회 시작과 함께 유강남의 솔로 홈런이 나오며 한 점 차로 쫓긴 레일리는 2사 후 손주인의 볼넷과 문선재의 3루타로 결국 동점을 허용했다. 우익수 손아섭의 다소 무리한 수비 시도가 오히려 장타로 연결된 것이었다. 결국 레일리는 14승 도전에 실패하고 마운드를 박진형에게 물려줬다.

롯데 타선이 여전히 고구마 먹은 공격을 보여주는 사이 NC는 다시 달아나기 시작하며 사직 경기의 7회 말이 시작할 시점에서 8대 4까지 앞서고 있었다. 경기를 내주게 된다면 4위로 떨어지게 되던 롯데는 곧바로 힘을 냈다. 선두타자 김문호의 2루타와 번즈의 좌전 안타로 만든 무사 1, 3루 찬스에서 롯데는 문규현이 1루수 앞으로 굴러가는 스퀴즈 번트를 성공시키며 다시 리드를 잡았다. 롯데는 2아웃 후 LG의 두 번째 투수 정찬헌의 폭투 때 번즈가 홈을 밟으며 2점 차를 만들었다. 기다렸다는 듯이 한화도 6회 말 김원석의 3점 홈런이 터지며 1점 차 경기를 만들었다.

경기는 9회로 접어들었다. 롯데는 이미 세이브왕을 확정한 손승락을 마운드에 올렸다. 이날 경기 전 딸이 시구자로 나서며 기분 좋은 하루를 보냈던 손승락은 순식간에 2아웃을 잡아냈다. 남은 아웃카운트를 실점 없이 막아낸다면 NC의 경기 결과는 어떻게 나와도 상관없었지만, 손승락이 마지막 타자 손주인을 상대하는 사이 NC는 결국 8대 8 동점을 허용하고야 말았다. 이 상황을 알 리가 없는 손승락은 마지막까지 전력을 다했고, 결국 삼진으로 경기를 마무리했다. 자신의 손으로 경기를 끝낸 손승락은 오른손 엄지를 치켜세우며 팬들과 기쁨을 나눴다.

4대 2, 롯데의 시즌 80번째 승리였다. 창단 이후 롯데가 시즌 80승을 기록한 것은 이때가 처음이었다. 이날 승리로 승률 0.563이 된 롯데는 NC가 이겨서 동률이 된다고 해도 상대 전적에서 앞섰기 때문에 자력으로 3위를 확정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날 NC가 12회 승부 끝에 결국 8대 8 무승부를 기록, 롯데는 반 경기 차 3위를 확정했다. 창단 35년 만에 처음으로 아래에 7팀을 깔고 가게 된 것이었다.

(사진=롯데 자이언츠)

경기 후 롯데는 곧바로 준플레이오프 출정식을 가졌다. 추석 연휴를 맞아 외국인 투수 린드블럼과 레일리가 한복을 입고 절을 하는 진풍경을 연출했던 이날 롯데는 ‘무쇠팔’ 최동원이 남긴 “마, 함 해보입시다!”를 2017년 포스트시즌 슬로건으로 내세웠다. 이 기세대로라면 정말로 함 해볼 수도 있었다.

그러나 롯데의 2017년은 새드 엔딩으로 끝났다. NC와 다시 만난 준플레이오프에서 롯데는 1차전부터 만루홈런, 폭투, 포일 등 나올 수 있는 가장 안 좋은 장면만을 연출하며 패배했다. 어렵게 2승 2패를 만들고 홈으로 돌아왔지만 끝내 5차전을 완패하면서 플레이오프 진출에 실패했다. 마지막 경기에서는 어느 중학생이 인터넷에 ‘2층 화장실에 폭탄 있음. 오늘 경기 취소’라는 허위 글을 올리면서 사직 야구장에는 경찰이 수색에 나서는 사태까지 발생했다. 이를 지켜보던 팬들은 ‘차라리 진짜 취소됐다면…’하고 생각했으리라.

PS. 10월 3일 열린 나머지 3경기의 결과는 다음과 같다.
– KIA는 이명기와 나지완의 홈런을 앞세워 10대 2로 승리했고, 두산은 7회 3실점하며 결국 2대 3 역전패를 당했다. 이렇게 되면서 페넌트레이스 1위는 KIA의 차지가 됐다. KIA는 2009년 이후 8년 만에 페넌트레이스 우승 트로피를 품에 안았고, 내친김에 한국시리즈에서도 4승 1패를 기록하며 통합 챔피언에 등극했다.
– 포스트시즌과 아무 상관이 없었던 넥센과 삼성의 경기, 그리고 이승엽의 은퇴 경기는 삼성이 10대 9로 진땀승을 거뒀다. 이날 23년의 프로 생활을 마치게 된 이승엽은 1회와 3회 연타석 홈런을 터트리면서 역대 최고의 은퇴 경기를 만들었다.

2017년 10월 3일 LG-롯데전 박스스코어(사진=KBO 연감)

[거인, 두 번째 스무살] 모아보기 (링크)

사진=롯데 자이언츠

야구공작소 양철종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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