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인, 두 번째 스무살] 2001년 – 호세의 ‘주먹’이 롯데에 남긴 선물

  • 이 연재물은 ‘KBO 박스스코어 프로젝트’와 함께 합니다.

롯데 자이언츠 역사상 가장 많은 시즌을 소화한 외국인 선수는 브룩스 레일리다(5시즌). 통산 WAR이 가장 높은 선수 역시 레일리다(19.62). 그러나 롯데 40년 역사에서 레일리를 최고의 외국인 선수로 꼽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짧은 기간 강한 임팩트를 심어주고 홀연히 떠난 펠릭스 호세가 버티고 있기 때문이다. 호세는 가장 오래 뛴 레일리, 타이틀을 획득한 카림 가르시아, ‘최동원의 후계자’라는 평가까지 들었던 적이 있는 조쉬 린드블럼 등을 제치고 팬들의 기억 속에서 최고의 외국인 선수로 남아 있다.

호세의 통산 기록지를 보면 두 번 놀라게 된다. 하나는 뛰어난 기록 때문이다. 짧은 기간 동안 통산 100홈런 가까이 기록했고, 통산 출루율도 0.437로 상당히 높다. 남들에게는 커리어 하이인 OPS 1이 호세에게는 평균(1.023)이었다. 그만큼 호세의 성적은 대단했다. 그리고 또 하나는, 생각보다 KBO 리그에서 머물렀던 시간이 짧았다는 것이다. 호세가 한국에서 뛰었던 것은 1999년과 2001년, 2006년과 2007년이다. 이 중에서 마지막 시즌인 2007년엔 고작 23경기에만 나왔다는 것을 감안하면 사실상 세 시즌만 뛰고 떠난 셈이다.

3년이라는 짧다면 짧은 시간 동안 호세는 많은 이야깃거리를 남겼다. 그렇지만 뭐니 뭐니 해도 2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잊히지 않고 오히려 (의도치 않게) 유행어를 만들었던 ‘참교육’ 사건을 빼놓고는 호세의 한국 생활을 설명할 수 없다. 과연 2001년 호세에게는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2000년 미국으로 돌아갔다가 2001시즌을 앞두고 롯데로 돌아온 호세는 한결 더 무서운 타자로 변모했다. 배트에 걸리면 쉽게 담장을 넘겼고, 그런 장면을 만들지 않으려고 투수들이 한두 개씩 스트라이크존 바깥으로 빼서 던지는 공에는 방망이를 내지 않았다. 이렇게 되자 투수들의 견제도 심해졌다. 호세는 이 해에만 127개의 볼넷을 얻었고, 그중에는 무려 28개의 고의4구도 포함됐다. 홈런을 맞을 바에는 아예 1루를 내준 것이다. 호세라는 ‘핵우산’을 받은 5번 타자 조경환이 커리어 최다인 26홈런 102타점을 기록할 정도로 ‘호세 효과’는 실로 대단했다.

당시 언론에서 타격 5관왕(타율, 홈런, 타점, 출루율, 장타율) 가능성을 언급할 정도로 호세의 페이스는 무서웠다. 호세가 시즌 내내 버텨준 롯데는 주전 유격수 김민재와 스위치히터로 변신한 포수 최기문이 3할 타율을 기록했고, 삼성에서 이적한 2년 차 김주찬이 뒤늦게 자리를 잡으면서 시즌 막판 4강 싸움에 청신호가 켜졌다. 실제로 7월 24일 김명성 감독이 급서하는 등 어수선한 분위기 속에 8월 중순까지 최하위에 머물렀던 롯데는 9월 초 잠시 4위에 오르기도 했다. 이렇듯 살아난 팀 분위기 속에서 호세 역시 이승엽, 타이론 우즈와 함께 홈런왕 경쟁에 나섰다.

운명의 9월 18일, 롯데는 마산야구장에서 삼성과 3연전 첫 경기를 가졌다. 이날 호세는 4번 지명타자로 선발 라인업에 이름을 올렸다. 2회와 3회 내야 땅볼로 물러난 호세는 5회 득점권 찬스를 맞이했지만 고의4구를 얻으며 허무하게 1루로 나갔다. 다행히 롯데는 다음 타자 훌리안 얀이 좌전 안타를 기록하며 4대 2로 달아나는 데 성공했다. 다승왕 경쟁을 펼치던 선발 손민한이 6회 1사까지 삼성 타선을 3점으로 막아내면서 롯데는 한 점 차 리드를 이어나가고 있었다.

그리고 7회 말이 찾아왔다. 삼성 마운드에는 여전히 선발투수 배영수가 있었다. 이날 배영수는 3회 실점의 빌미가 되는 폭투를 저지르는 등 다소 투박한 제구력을 선보였지만 선발로서 최소한의 역할은 수행하고 있었다. 7회에도 마운드에 올라온 배영수는 2아웃을 잘 잡은 뒤 3번 박현승에게 중전 안타를 맞았다. 그리고 다음 타자는 호세. 제대로 된 승부를 할 생각이 없었던 배영수는 빠지는 공을 던지며 볼넷으로 호세를 출루시켰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다소 위협적인 공이 호세에게 향했다. 호세는 화를 억누르고 1루로 향했다.

사건은 다음 타자였던 얀의 타석에서 터졌다. 얀을 상대한 배영수는 몸에 맞는 공을 던졌고, 얀 역시 배영수를 노려보다가 심판의 제지로 1루로 가고 있었다. 그런데 1루에서 웬 들소가 마운드를 향했다. 호세였다. 고의성이 다분하다고 판단한 호세가 응징에 나선 것이다. 무섭도록 달려든 호세를 막아 세우기에 3루수 김한수는 역부족이었다. 이윽고 배영수와 마주친 호세는 오른쪽 주먹을 휘둘러 그대로 배영수의 얼굴에 꽂았다. 배영수는 그 자리에서 주저앉아버렸다. 화가 난 호세를 말리기 위해서 양 팀 선수단이 모두 나서야 했다.

사태가 진정된 뒤 이민호 주심은 호세와 배영수에게 모두 퇴장을 선언했다. 삼성 마운드는 전병호로 교체됐고, 롯데 역시 권오현을 대주자로 투입했다. 이후 경기는 큰 갈등 없이 마무리됐다. 6회 초 등판한 박석진이 3이닝을 무실점으로 막아낸 롯데는 결국 리드를 지켜내면서 4대 3으로 승리를 거뒀다. 그러나 상대 선수에게 주먹을 휘두른 순간 호세의 잔여 시즌 운명은 이미 결정된 것이나 마찬가지였고, 이를 알았던 롯데는 승리의 기쁨을 마냥 누릴 수 없었다.

KBO는 다음날인 9월 19일 상벌위원회를 열었다. 폭력을 행사한 호세에게는 잔여 경기(8경기) 출전 정지와 제재금 300만 원이 선고됐고, 빈볼성 투구를 던진 배영수와 선수 관리를 제대로 하지 못한 롯데 구단에는 엄중경고가 내려졌다. 당시 원인 제공자라고 할 수 있는 배영수의 징계가 약하다는 의견도 나왔지만, 호세의 징계만큼은 누구도 토를 달지 않았다. 그렇게 호세의 2001시즌은 마무리됐고, 1999년 플레이오프에서의 난동에 이어 호세는 또 한 번 삼성과의 악연을 남긴 채 한국을 떠났다. 이미 9월 중순부터 허리 부상으로 이탈했던 조경환에 이어 호세까지 라인업에서 제외되며 결국 롯데는 최하위로 시즌을 마감했다. 굴욕적인 ‘8888577’의 시작이었다.

이후 호세는 이중계약 파문에 휩싸이며 영구제명을 당했고, 2006시즌 어렵게 한국으로 돌아왔다. 공교롭게도 KBO 복귀전이었던 4월 8일 개막전의 상대 팀 선발투수는 배영수였다. 이미 2004년 MVP를 수상한 배영수는 호세에게 2타수 무안타 1볼넷을 기록하며 ‘교육의 효과’를 ‘스승님’에게 증명해 보였다. (다만 경기는 롯데가 4대 2로 승리하며 배영수는 패전투수가 됐다.)

여기까지 이번 글을 읽었다면 ‘대체 왜 제목이 ‘호세가 남긴 선물’일까?’라는 의문을 가질 수도 있다. 호세가 사건 다음 날 출전정지 징계를 받으면서 롯데는 1군 엔트리에 한 명의 선수를 대신 등록했다. 경남고등학교를 갓 졸업한 앳된 신인이었던 이 선수는 투수로 입단했지만 6월 중순부터 타자로 전향해 2군에서 좋은 성적을 거두고 있었다. 9월 19일 처음으로 1군 무대에 선 19살 선수는 7회 말 공격에서 좌투수를 상대로 타석이 들어섰다. 이 선수는 침착하게 볼넷을 골라나가며 데뷔전부터 자신의 능력을 증명했다.

호세의 공백으로 얻은 기회에서 6경기 8타수 4안타를 기록한 이 선수는 이듬해부터 주전 선수로 등극했다. 비록 부침은 있었지만 2000년대 중반 이후 KBO 리그 최고의 타자가 된 이 우타자는 일본과 미국을 거치며 ‘조선의 4번 타자’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다. “(호세를) 다시 만나면 고맙다는 인사를 해야 되나요?”라며 너스레를 떨었던 이 선수를 우리는 앞으로 이 연재물에서 자주 만나게 될 것이다.

2001년 9월 18일 삼성-롯데전 박스스코어(사진=박스스코어 프로젝트)

야구공작소 양철종 칼럼니스트

ⓒ야구공작소. 출처 표기 없는 무단 전재 및 재배포를 금합니다. 상업적 사용은 별도 문의 바랍니다.

1 Comment

댓글 남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