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서, 손아섭의 2000번째 안타는 언제라고? – 서스펜디드 게임과 기록

시즌 초반 지독한 슬럼프에 빠지며 2할대 중반 타율에서 벗어나지 못하던 롯데 자이언츠의 간판 타자 손아섭이 드디어 살아나기 시작했다. 0.266의 타율로 6월을 시작한 손아섭은 6월의 마지막 경기에서는 0.313까지 타율을 끌어올렸다. 6월 중순 10경기 연속 안타를 기록했고 5번의 3안타 경기를 비롯해 13번의 멀티히트 경기를 달성하며 손아섭이라는 이름값에 걸맞은 성적을 거두고 있다.

그러면서 시즌 초반 부진으로 인해 다소 늦어질 것으로 보였던 2,000안타 기록도 어느덧 눈앞으로 다가왔다. 6월 30일 기준 만 33세 3개월 11일인 손아섭은 KBO 리그 통산 1,625경기에서 1,991개의 안타를 때려냈다. 144경기 기준으로는 연평균 176안타를 기록한 셈이고, 본격적으로 주전 선수가 된 2010년부터 계산하면 무려 연평균 182안타가 된다. 현재 페이스대로라면 2012년 장성호(34세 11개월)의 최연소 2,000안타, 그리고 2014년 이병규(1,653경기)의 최소 경기 2,000안타 기록을 깨는 것은 무리가 없다.

손아섭이 남은 경기에서 2경기당 3안타 정도 친다고 가정해보자. 2021년 7월 7일, 오랜만에 가득 들어찬 사직야구장에서 타석에 들어선 손아섭은 1회 말 LG 트윈스 선발 케이시 켈리의 3구째 패스트볼을 공략한다. 타구는 1루수 문보경의 옆을 총알 같이 뚫고 지나가면서 우익수 앞까지 굴러간다. 경기는 잠시 중단되고, 양 팀의 주장이 그라운드로 달려나와 손아섭에게 꽃다발을 전해준다. 2,000안타. KBO 리그 역대 11번째이자 최연소-최소 경기 2,000안타를 달성한 손아섭은 눈시울이 붉어지고, 양 팀 팬들은 기립박수로 ‘므찐 오빠’의 대기록을 축하한다.

그런데 2,000안타 축하 행사가 열린 지 4개월이 지난 10월 7일, 뜻밖에도 손아섭의 2,000번째 안타가 정정된다. 7월 7일 켈리에게 기록한 안타가 아니라 전날인 6일 경기에서 8회 말 기습번트 안타를 기록한 것이 2,000번째 안타였던 것이었다. 물론 영화 ‘미스터 3000’처럼 기록 이정표가 사라진 것도 아니고, 이미 넉넉하게 2,000안타를 넘긴 손아섭이지만 무언가 찜찜하다. 우리가 알고 있던 손아섭의 2,000안타는 2,000번째 안타가 아니란 말인가?

가정에 불과하지만 손아섭의 2,000번째 안타가 언제 나오는지는 실제로 석 달을 기다려야 알 수 있는 상황이다. 기록상 손아섭은 이미 2,000안타를 기록했는데 왜 10월이 되어서야 정확한 기록 달성 일시를 알 수 있는 걸까? 답은 ‘서스펜디드 게임(Suspended Game)’에 있다.

 

그래서 서스펜디드 게임이 뭔데?

롯데는 지난 6월 27일 열린 두산 베어스와의 경기에서 6회까지 0대 2로 뒤지고 있었다. 그런데 7회 초 선두타자 김민수의 안타를 시작으로 무려 6명의 타자가 연속으로 출루에 성공했다. 2번 타자였던 손아섭 역시 1, 2루 찬스에서 좌익수 앞에 떨어지는 행운의 안타를 기록하며 2루 주자 딕슨 마차도를 홈으로 불러들였다. 롯데는 다음 타자 전준우도 적시타를 쳐내며 단숨에 3대 2 역전에 성공했다.

그런데 이전부터 조금씩 내리던 비가 5번 타자 정훈 타석에서 굵은 빗줄기로 변했다. 중계 화면에도 잡힐 정도로 내리는 많은 비에 관중들은 우산을 꺼내들었다. 도저히 경기를 이어갈 상황이 아니라고 판단한 심판진은 우천 중단을 선언했다. 한 시간을 기다렸지만 도무지 비는 그칠 줄 몰랐고, 결국 경기는 이대로 끝나게 됐다. 아니, 미뤄지게 됐다. 바로 서스펜디드 게임을 선언한 것이다.

서스펜디드 게임, 야구규칙 7.02에는 ‘일시정지 경기’라는 명칭으로 들어가 있는 이것은 특정 상황에서 경기가 중단되면 추후 일정을 정해 잔여이닝를 끝마치는 게임이다. 규칙집에 명시된 서스펜디드 게임의 사유는 다음과 같다.

(1) 법률에 따른 시간 제한
(2) 리그 규약에 따른 시간 제한
(3) 조명시설의 고장 또는 홈구단이 관리하고 있는 기계장치의 고장(내야덮개나 배수설비도 포함된다)
(4) 어두워졌는데도 법률에 따라 조명시설을 사용할 수 없을 경우
(5) 날씨 때문에 이닝 도중에 콜드게임이 선고되고 다음에 해당하는 상황일 때
(A) 원정구단이 1점 이상을 득점하여 동점을 만들고 홈구단이 득점하지 못했을 때
(B) 원정구단이 득점하여 리드를 잡고 홈구단이 재역전 시키거나 동점을 만들지 못했을 때

이에 따르면 6월 27일 롯데-두산전은 5번째 케이스에 해당한다. 원정팀인 롯데가 7회 초 3점을 얻으며 역전한 상황에서 경기가 중단됐고, 홈팀인 두산이 7회 말 공격 기회를 얻지 못한 상황이어서 콜드 게임 대신 서스펜디드 게임이 선언된 것이다. 경기 중단 시점까지 롯데는 공격 기회를 7번을 받은 반면, 지고 있던 두산은 6번밖에 받지 못했기 때문에 기회균등의 차원에서 어쩔 수 없는 측면이 있다. 원정팀이 선공, 홈팀이 후공을 맡는 야구에서 홈팀은 원정팀보다 많은 공격 기회를 받는 것이 불가능하다.

만약 롯데가 6회 말까지 이기고 있었고 7회 초에 추가점을 올렸다면 서스펜디드 게임은 선언되지 않았을 것이다. 이미 공격 기회가 6번으로 같았을 때도 리드하는 팀은 롯데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7회 초 공격에서 롯데가 경기를 뒤집었고, 공격 기회가 불공평한 상황에서 리드하는 팀이 바뀌었기 때문에 홈팀에도 한 번의 기회를 더 주어야 하는 상황이다. 서스펜디드 게임이 선언되는 상황이 날씨, 조명 고장, 경기장 문제 거의 모두 경기 내부와는 상관없는 요인 때문이라는 것을 생각하면 홈팀의 억울한 패배를 막기 위해서라도 서스펜디드 게임은 필요한 것이다.

다만 팬들이 의아해하는 것은 잔여경기가 3개월 뒤인 10월 7일에 열린다는 점이다. 이 역시 야구규칙 7.02(b)의 1항, ‘그 구장에서 벌어질 두 구단 사이의 다음 경기일정 중 싱글 경기(single game)에 앞서 치른다’는 조항에 따른 것이다. 규칙에 의거, 롯데와 두산 양 팀의 다음 잠실 시리즈인 10월 7일 경기 이전에 잔여경기를 7회 초 1사 2, 3루 정훈 타석으로 진행하게 된다. 만약 6월 27일이 두 팀의 마지막 잠실 시리즈였다면 규정상 롯데의 홈구장인 사직야구장에서 진행할 수도 있지만 잔여경기가 뒤에 남은 상황에서는 원래 경기의 구장에서 할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왜 손아섭의 2,000안타는 10월 7일까지 알 수 없는 것일까. 이 역시 야구규칙을 보면 알 수 있다. 야구규칙 9.23(d)에는 ‘일시정지 경기의 잔여분을 치르면서 발생한 모든 기록은 이 규칙의 목적에 부합하도록 원래의 경기 일에 치러진 것으로 간주한다’라는 조항이 있다. 따라서 시간상으로는 뒤에 나온 상황이라도 기록상 원래 경기일에 나온 것으로 처리한다는 것이다. 경기가 중단되기 전 3타수 1안타를 기록한 손아섭은 경기 재개 후 남은 이닝에서 기록할 안타 개수에 따라 2,000안타 시점이 달라진다. 모두가 2,000안타라고 알고 있던 기록이 사실은 2001번째, 혹은 2002번째 안타가 될 수도 있는 것이다.

 

역대 서스펜디드 게임에서는 무슨 일이?

6월 30일 기준 KBO 리그에는 역대 10번의 서스펜디드 게임이 선언됐다.

<표1> 역대 KBO 리그 서스펜디드 게임 목록

이번 롯데-두산전을 제외하고 9번의 서스펜디드 게임 중에서 6번이 해당 시리즈에 재개됐다. 같은 시리즈에서 재개경기가 열리지 않았던 나머지 3번도 대부분 2개월 안에 속행됐다. 이번처럼 3개월이나 뒤로 밀린 적은 없었다. 팬들이 이번 서스펜디드 게임 일정에 의문을 가지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경기가 중단된 후 한참 뒤에야 잔여 경기가 열리게 되면 양 팀 선수단에는 변화가 생길 수밖에 없다. 1998년 한화 이글스는 6월 24일 우천으로 중단된 경기가 8월 19일에 다시 열렸는데, 하필 이 사이 강병철 감독이 해임되면서 기존 경기와는 다르게 이희수 감독대행이 지휘봉을 잡았다. 1999년 현대 유니콘스도 6월 21일 경기가 중단된 후 일주일 뒤인 28일 새 외국인 타자 브렌트 바워스를 영입했다. 8월 21일 재개된 경기에서 바워스는 8번 손차훈 타석에서 대타로 들어섰다. 실질적으로 바워스의 KBO 데뷔전은 7월 17일 한화전이었지만, 서류상의 바워스는 계약도 하기 전에 KBO 리그에서 타석을 소화한 것이다. 이는 ‘원래 경기에는 출전선수로 등록되지 않았더라도 속행경기의 출전선수로 등록돼 있으면 그 경기에 출전할 수 있다’라는 야구규칙에 의거한 기용이었다.

KBO 기록대백과에는 바워스의 데뷔일을 1999년 6월 21일로 명시했다. (사진=KBO 기록대백과)

같은 시리즈라도 기록이 달라지는 경우도 있었다. 1999년 쌍방울레이더스는 시즌 막판 연패를 이어가고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LG 트윈스를 만난 쌍방울은 10월 5일 경기를 내주며 17연패를 기록한 후 다음날 더블헤더 1차전을 무승부로 마쳤다. 10월 7일 현대를 만나 3대 2로 지면서 쌍방울은 1985년 삼미슈퍼스타즈 이후 처음으로 18연패를 기록하게 됐다. 그러나 이순신에게 12척의 배가 남아있었듯이 쌍방울도 10월 6일 조명 고장으로 미뤄진 더블헤더 2차전이 남아있었다. 8일 재개된 경기에서 쌍방울은 8회 말 4점을 득점하며 결국 7대 5 역전승을 거뒀다. 야구규칙의 규정에 따라 쌍방울은 10월 6일 더블헤더 2차전에서 17연패를 탈출한 것으로 처리됐다.

KBO 리그보다 역사가 긴 미국 메이저리그(MLB)에는 서스펜디드 게임에 따른 특이한 기록이 많이 나왔다. 2021년 현재 MLB 통산 홈런 1위(762홈런)인 배리 본즈의 실질적인 메이저리그 데뷔일은 1986년 5월 30일(현지 기준)이다. 그런데 기록상으로 본즈는 메이저리그에 올라오기도 전인 4월 20일 경기에 출전한 것으로 나와있다. 이날 경기가 열렸을 때는 메이저리그에 없었던 본즈는 경기가 재개된 8월 11일에는 메이저리그에 있었기 때문에 규정상 경기에 나설 수 있었다. 후안 소토(워싱턴 내셔널스) 역시 2018년 5월 20일 메이저리그에 처음으로 콜업됐지만 데뷔 6일 전인 5월 15일 경기가 서스펜디드 게임이 선언되며 6월 19일로 밀렸고, 이날 경기에서도 홈런을 기록했다. 기록상 소토는 메이저리그 무대를 밟기도 전에 홈런을 기록한 선수가 됐다.

본즈의 데뷔일은 1986년 5월 30일이지만 기록상 본즈는 4월 20일 경기에도 출전한 것으로 나와 있다.

(사진=MLB.com(위) / 베이스볼 레퍼런스(아래))

이 외에도 켄그리피 주니어의 경우 2008년 4월 28일 아메리칸리그와 내셔널리그 모두에서 뛴 기록이 있다. 신시내티 레즈 시절 ‘진짜’ 4월 28일 경기에서 4타수 2안타를 기록한 그리피는 그해 트레이드 마감기한에 시카고 화이트삭스로 이적했다. 이후 8월 25일 재개된 ‘4월 28일 경기’에서 14회 말 대타로 출전, 고의4구를 얻어내면서 하루에 다른 팀 소속으로 2경기에서 출루를 얻어낸 선수가 됐다.

심지어 2009년 투수 조엘 한라한(당시 워싱턴 내셔널스)의 경우 5월 5일 경기에서 교체되지 않은 상태로 서스펜디드 게임이 선언됐는데 재개되기 전 피츠버그파이어리츠로 트레이드로 이적했다. 7월 9일 다시 열린 경기에서 휴스턴은 끝내기로 승리하며 한라한은 승리투수가 됐다. 공교롭게도 이날 피츠버그는 경기가 없었기 때문에 한라한은 누워서 승리를 챙기는 호사(?)를 누렸다. 이렇듯 서스펜디드 게임은 진귀한 장면을 연출하곤 한다.

 

인생이 그렇듯,야구도 기회는 공정해야 한다

이번 서스펜디드 게임 결정에 대해 일부 팬들은 ‘그냥 강우 콜드나 하지 왜 서스펜디드 게임을 해서 혼란스럽게 하냐’라고 말하고 있다. 모 커뮤니티에는 극단적으로 ‘그 사이 롯데 팬 그만두는 사람도 있겠네’라며 냉소적인 반응을 보이기도 했다.

그러나 서스펜디드 게임은 ‘양 팀이 똑같은 기회를 받아야 한다’는 대명제에서 시작한다. 추격의 기회조차 얻지 못하는 억울한 상황은 어느 팀이든 다 겪을 수 있는 상황이다. 우리네 인생이 그렇듯 야구 역시 나의 뜻과는 상관없는 일로 피해를 보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 이 때문에 안전망으로 서스펜디드 게임이 필요한 것이다.

‘야구는 인생의 축소판’인 것처럼, 어쩌면 서스펜디드 게임도 현실에서의 ‘공정한 기회’를 상징하는 규칙이 아닐까?

 

야구공작소 양철종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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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Comments

  1. 글쎄요, 과연 서스펜디드 경기가 공정성이라는 대전제에 정말 들어맞는 규칙일까요? 서스펜디드 게임이 과연 똑같은 조건, 똑같은 컨디션, 똑같은 라인업을 가져와 경기할 수 있다는 것 자체과 환상입니다. 현실 야구는 게임처럼 세이브 로드를 하거나 퍼즈하고 다시 플레이할 수 있는 게 아닌데 공정성 그 자체에만 목을 메다 오히려 공정성을 해치는 행위입니다.
    당장에 두산만 해도 10월 7일이면 부상으로 빠져 있는 호세 페르난데스와 김재환*, 그리고 2군에 있는 박건우 선수도 올라올 것이고, 홍건희 역시 이닝을 막던 중의 그 컨디션이 아닌 정상적인 컨디션으로 이닝을 재개할 것입니다.
    또 롯데에서도 박세웅 선수가 3이닝을 위해 등판할 지는 모르겠으나 등판하게 된다면 너무 손쉽게 완투 기회를 제공받게 됩니다. 이게 과연 공정하다고 할 수 있을까요?
    명목과 명분만 쫓다가 실제와 완전 동떨어진 결과를 낳은, 융통성 없는 규칙일 뿐입니다.

    • 글의 완전히 맥락을 잘못 이해하고 계시네요. 서스펜디드 게임이 공정하다는 것의 핵심은 똑같은 조건, 컨디션, 라인업 같은 이야기가 아니라 양 팀에 최소한의 공격 기회를 공정하게 준다는 건데 전혀 다른 이야기를 하고 계시니… ‘완투 기록 세우기’에서의 공정함 같은 게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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