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연재물은 ‘KBO 박스스코어 프로젝트’와 함께 합니다.
사이클링 히트, 야구의 본고장 미국에서는 ‘히트 포 더 사이클(Hit for the cycle)’이라고 부르는 이 기록은 한 선수가 한 경기에서 1루타와 2루타, 3루타와 홈런을 모두 기록하는 것을 뜻한다. 보통 3루타를 잘 치는 선수는 홈런을 치기 어렵고, 홈런을 많이 치는 선수는 3루타를 기록하기가 매우 어렵다. 이 때문에 사이클링 히트는 빠른 발과 타격의 정확성, 파워, 그리고 운이 모두 따라야 할 수 있는 기록으로 평가받고 있다.
2021년 6월까지 KBO 리그에서는 모두 28번의 사이클링 히트가 나왔다. 그중에서 롯데는 5번의 사이클링 히트에 관여했다. 첫 사이클링 히트인 오대석의 기록이 1982년 6월 12일 당시 롯데의 홈구장이었던 구덕 야구장에서 나오기는 했으나 중립경기였기 때문에 논외로 한다면, 롯데는 3번의 사이클링 히트를 기록하는 동안 두 차례 사이클링 히트를 허용했다. 특히 롯데는 역대 5호부터 7호까지 3번 연속 기록 옆에 자신의 이름을 올렸다. 앞선 두 번이 대기록의 희생양이었다면(1992년 OB 임형석, 1994년 LG 서용빈), 오늘의 주인공인 7호 사이클링 히트는 바로 롯데 소속 선수가 기록한 것이었다.
1996시즌 롯데는 홈 유니폼을 스트라이프 스타일로, 원정 유니폼을 회색 디자인으로 바꾸면서 새 출발에 나섰다. 1995년 한국시리즈 준우승 멤버가 건재했고, 방위병 출전 금지 조치에도 강상수와 박정태가 각각 3월과 4월 전역하면서 전력 공백도 거의 없었다. 여기에 1991년 경남상고의 전성기를 이끌었던 ‘독고탁’ 차명주가 지금도 깨지지 않고 있는 5억 원의 롯데 신인 최고 계약금을 받고 입단했다.* 이 때문에 당시 전문가들은 롯데가 4년 만에 대권 도전에 나설 수 있다고 평가했다.
* 이후 1997년 신인 문동환, 손민한과 2021년 신인 나승엽이 똑같이 계약금 5억 원을 받고 입단했다. 다만 물가상승률을 감안한다면 앞서 5억 원을 받은 세 명과 나승엽을 같은 선상에 두고 비교하기는 어렵다.
그해 4월 13일에 열린 한화 이글스와의 개막전에서 롯데는 만 20세의 어린 에이스 주형광을 선발투수로 내세웠다. 주형광은 한화 선발 정민철과 함께 나란히 10탈삼진을 기록하면서 치열한 투수전을 펼쳤다. 두 에이스의 호투 속에 정규이닝에서 승부를 가리지 못한 두 팀은 결국 연장전에 접어들었다. 11회 초 3점을 내주며 패배 위기에 몰린 롯데는 11회 말 마해영의 2점 홈런으로 한 점 차까지 따라잡았으나 결국 3대 4로 패했다.
첫 경기부터 투수를 4명이나 소모하고도 이기지 못한 롯데는 다음날인 14일 열린 개막 2차전에서 ‘예비역’ 강상수를 선발투수로 투입했다. 이에 맞서 한화는 전년도 7승을 거두며 가능성을 보여준 이상목을 마운드에 올렸다. 8년 뒤 FA를 통해 롯데로 오게 된 이상목이었지만 이때만 해도 그런 미래의 일은 상상하기 어려웠다. 단지 롯데는 이상목을 공략해 개막전의 아픔을 씻어내겠다는 생각밖에는 없었다.
이런 바람이 통했을까. 롯데는 1회 말부터 2번 이종운의 안타를 시작으로 5안타 1볼넷을 집중시키며 시작부터 5점이나 뽑아냈다. 폭죽처럼 터져 나온 롯데의 공격에 이상목은 1회를 마치지 못하고 9번 김민재 타석에서 마운드를 내려갔다. 2회에도 한 점을 추가한 롯데는 3회 말 한화 유격수 김주성의 실책으로 만든 기회에서 추가로 3득점을 올렸다. 여기서 멈출 생각이 없었던 롯데는 5회까지 매 이닝 득점을 기록하며 14대 3으로 크게 앞서나갔다. 경기 초반부터 승부가 일찌감치 결정되면서 사직야구장을 찾은 관중들은 다소 집중력이 떨어질 수도 있는 상황을 맞이했다.
그러나 이날 팬들은 끝까지 긴장을 놓지 않을 수 없었다. 이날 롯데의 5번 타자 겸 좌익수로 출전한 김응국이 1회 우전안타, 4회 우익 선상 2루타를 기록하더니 5회에도 교체된 중견수 오중석의 어설픈 수비를 틈타 3루타를 만들어냈다. 5회까지 3안타를 터트리며 김응국은 그때까지 KBO 리그에 6번밖에 나오지 않았던 사이클링 히트까지 홈런 하나만을 남겨두게 됐다. 그러자 롯데는 전준호, 이종운, 박현승, 김민재 등 선발 라인업에 이름을 올렸던 선수들을 교체하는 와중에도 김응국의 이름을 남겨놓으며 대기록 달성을 응원했다. 본인은 기록에 도전하는 줄도 몰랐지만 당시 장효조 타격코치의 조언에 따라 계속 타석에 들어서기로 했다.
7회 말, 한화의 4번째 투수 이상군을 상대로 롯데는 박정태의 2루타로 또 한 점을 내며 확인사살에 나섰다. 그리고 타석에는 ‘자전거’를 타기 위해 타석에 들어선 김응국이 들어섰다. 이상군은 가슴 높이의 바깥쪽 하이 패스트볼을 던져 김응국의 스윙을 유도하려고 했다. 그러나 이 공이 속된 말로 ‘공이 수박만 하게 보이는 날’이었던 김응국의 배트를 피해갈 수는 없었다. 이상군의 속구를 그대로 밀어친 김응국은 사직구장의 좌측 펜스를 살짝 넘기는 투런 홈런을 쏘아 올렸다. 모두가 기다린 대기록을 작성한 김응국은 만면에 미소를 머금고 다이아몬드를 돌았다. KBO 역대 7번째이자 1987년 정구선 이후 9년 만에 나온 롯데 선수의 사이클링 히트였다. 또한 2021년까지도 1루타-2루타-3루타-홈런을 순서대로 기록한 ‘내추럴 사이클(Natural Cycle)’ 달성자는 김응국 한 명뿐이다.
김응국이 4안타 3타점을 기록하는 등 팀 타선이 21안타 17득점으로 화력을 뽐낸 롯데는 결국 한화를 17대 4로 꺾고 개막 시리즈를 1승 1패로 가져갔다. 롯데 선발 강상수는 5.2이닝 4실점으로 다소 불안한 투구를 선보였으나 타선의 도움으로 첫 승을 가져갔고, ‘5억 신인’ 차명주도 9회 등판해 한화 타선을 무실점으로 막아내며 신고식을 치렀다. 경기 후 김응국은 “생애 최고의 날이다. 너무 기쁘다”라며 대기록을 작성한 소감을 밝혔다.
동대문상고와 고려대를 졸업하고 1988년 롯데에 투수로 입단한 김응국은 2시즌 동안 1군에서 14경기에 등판했지만 평균자책점 5.24에 그쳤다. 그런 와중 우연한 계기에 2군에서 타격 재능을 선보인 김응국은 1989시즌 말 1군에 올라와 29타수 14안타(타율 0.483)으로 가능성을 보여줬다. 이듬해부터 본격적으로 타석에 들어선 김응국은 롯데의 좌익수 자리를 든든하게 지키며 1995년까지 3차례 3할 타율을 기록했다. 그리고 1996시즌 시작부터 대활약을 펼친 김응국은 결국 그해 타율 0.321 143안타 9홈런 64타점 26도루로 커리어 하이 시즌을 만들어내며 외야수 골든글러브를 수상했다.
PS. 24년 뒤인 2020년 10월 4일, 김응국의 까마득한 팀 후배인 오윤석은 1회 2루타, 2회 단타, 3회 만루홈런, 5회 3루타를 기록하며 롯데 역사상 3번째 사이클링 히트의 주인공이 됐다. 김응국이 유일한 내추럴 사이클 달성자라면 오윤석은 메이저리그에서도 9번밖에 나오지 않은 ‘만루홈런을 포함한 사이클링 히트’라는 진기록을 KBO에서는 유일하게 기록하게 됐다. 경우는 다르지만 오윤석 역시 롯데에서 투수와 타자를 모두 해본 선수이기도 하다.
사진=중계화면 캡처
야구공작소 양철종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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