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인, 두 번째 스무살] 1993년 – 박정태, 그대의 이름은 투혼

  • 이 연재물은 ‘KBO 박스스코어 프로젝트’와 함께 합니다.

2011년 KBO는 리그 창립 30주년을 기념해 각 포지션 별로 최고의 선수를 선정해 기념하는 ‘프로야구 30주년 레전드 올스타 베스트 10’을 선정했다. 선동열, 양준혁, 장종훈, 이만수 등 프로야구를 빛낸 선수들이 선정된 가운데 2루수 부문에서는 ‘악바리’ 박정태가 뽑혔다. 박정태는 팬 투표에서 9만여 표를 얻는 등 야구인과 언론인, 팬 모두에게 인정받는 2루수가 됐다. 이미 현역 시절인 20주년 올스타(2001년), 그리고 은퇴 직후인 25주년 올스타(2006년) 때도 최고의 2루수로 뽑힌 박정태는 이로써 KBO 역사에 지워지지 않을 2루수로 남게 됐다.

사실 박정태의 전성기는 최근 선수들에 비해서는 길지 않은 편이다. 초반 2시즌 동안 빛나는 활약을 했지만 중간에 부상과 군 복무로 2년의 공백이 있었다. 복귀 후 1996년부터 2000년까지 5년 동안 3차례 골든글러브를 수상했지만 중간에 2할대 초반을 기록했던 시즌도 있었다. 21세기에 접어들어서는 선수협 사건과 노쇠화로 인해 부진한 성적을 거뒀고 결국 35세의 나이에 은퇴를 결정했다. 14시즌 동안 박정태가 리그 정상급 2루수로 활약한 시즌은 넉넉히 잡아도 6시즌에 불과하다.

그러나 박정태가 높은 평가를 받은 것은 성적 때문만은 아니었다. 물론 기록만 놓고 봐도 박정태는 최고의 활약을 펼쳤지만, 기록에 담기지 못한 그라운드에서의 투지는 팬들이 좋아하는 선수를 넘어 사랑하는 선수로 만들게 한 가장 큰 요인이었다. 상대 투수를 죽일 듯이 노려보던 눈, 출루를 위해 나쁜 공을 계속 골라내며 투수를 괴롭히던 모습, 경기가 잘 풀리지 않으면 철문이 찌그러질 때까지 분풀이하는 모습은 박정태를 ‘승부욕의 대명사’로 만들었다.

특히 현역 복귀는커녕 정상적인 생활도 불가능할 것으로 봤던 비관적인 상황에서도 오뚝이처럼 일어나 다시금 방망이에 불을 지피는 모습은 감탄을 넘어 모두를 숙연하게 만들었다. 박정태 본인에게는 아픈 기억이지만 역설적으로 ’불사조’로서의 모습을 볼 수 있게 만들었다. 1993년, 24세의 박정태에게는 무슨 일이 있었을까.

1992년 타율(0.335), 최다안타(149안타) 2위에 올랐던 박정태는 타격왕 도전에 나섰다. 타이틀에 대한 의지가 대단했던 박정태는 5월 중순까지 3할 6푼대의 타율을 유지하면서 LG 박준태와 함께 수위타자 자리를 두고 치열한 경쟁을 펼쳤다. 투고타저 흐름 속에 장타력은 다소 줄어들었지만 안타 생산력만큼은 1992시즌과 비교해도 뒤지지 않는 페이스였다. 5월 17일부터 심한 감기를 앓으면서 흐름이 잠시 끊기기도 했지만 22일까지도 박정태는 타율 0.360으로 리그 선두를 달리고 있었다.

그리고 5월 23일, 박정태는 5일 만에 3번 타자-2루수로 선발 라인업에 이름을 올렸다. 당초 팀에서는 이날까지 휴식을 준 후 25일부터 열리는 광주 원정에 박정태를 데려갈 예정이었다. 그러나 전날 팀이 태평양 돌핀스에 0대 7로 패하자 복귀를 앞당긴 것이었다. 승부 근성으로는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 박정태는 팀의 무기력한 패배를 지켜볼 수 없었다. 감기와 함께 찾아온 몸살로 인해 몸무게가 2kg에 빠졌음에도 박정태는 출전을 강행했다. 이날 집을 나서는 박정태에게 그의 어머니는 “우예 나갈라카노. 쉬어라”라고 말하며 출전을 만류했다. 그러나 박정태는 “내가 나가야 합니다”라며 끝내 경기장으로 향했다.

롯데는 경기 전부터 불길한 징조가 보였다. 이날 선발로 내정된 박동희가 밤에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하면서 얼굴이 붓고 등에 담이 걸리는 증상을 보였던 것이다. 이 때문에 강병철 감독은 박동희를 질책한 후 선발투수를 좌완 가득염으로 바꿔야 했다. 앞선 두 경기에서 모두 승리를 챙긴 박동희의 부재로 롯데는 힘겨운 경기를 펼칠 것으로 예상됐다. 강병철 감독은 당시 인터뷰에서 “이제 선수들에게 ‘밤새 안녕하십니까’라고 물어야겠다”라고 말하며 부상 선수가 속출하는 상황에 실망감을 드러냈다.

우려와는 달리 대체 선발이었던 가득염은 6회까지 태평양 타선을 무실점으로 잘 막아내며 좋은 흐름을 만들었다. 투구 수도 74개밖에 되지 않는 등 효율적인 투구를 펼치고 있었다. 5회까지 함께 침묵하던 롯데 타선도 6회 말 공필성의 2루타와 상대 실책으로 만든 무사 1, 3루에서 전준호의 병살타로 첫 점수를 얻었다. 한 점을 올리자 롯데는 7회 초부터 투수를 윤형배를 교체하며 지키기 모드로 전환했다.

앞선 두 타석에서 모두 우익수 뜬공으로 물러났던 박정태도 자극을 받은 듯 7회 말 선두타자로 나와 안타를 터트렸다. 이 안타로 박정태는 타격 1위를 지키는 동시에 살얼음판 리드를 이어가던 팀에 활력을 불어넣을 수 있는 찬스를 만들었다. 그러나 사건은 이때 터졌다.

다음 타자 김민호가 2루수 앞 병살타성 타구를 날렸다. 박정태는 ‘병살만은 막자’는 생각으로 다리를 들고 슬라이딩을 하며 2루 베이스로 돌진했다. 공을 잡은 2루수 손차훈은 병살 플레이를 위해 유격수 염경엽에게 송구했고, 같은 타이밍에 박정태도 2루 베이스로 들어왔다. 이때 박정태의 왼쪽 발목이 염경엽의 오른쪽 다리와 부딪히며 꺾였다. 결과는 병살타였고 박정태는 일어나지 못했다. 누가 봐도 아쉬움 때문은 아니었다. 극심한 고통을 호소한 박정태는 결국 들것에 실려 그라운드를 빠져나갔다. 박정태의 ‘악바리 정신’이 본인에게 독이 된 순간이었다.

당시 스포츠신문 1면에 실린 박정태의 부상 소식(사진=양철종 / 원본=일간스포츠 1993년 5월 17일자)

곧바로 인근 병원으로 후송된 박정태는 왼 다리 정강이뼈 골절과 발목 복합 골절 진단을 받았다. 롯데는 이날 경기를 4대 0으로 승리했지만 당시 언론의 말대로 ‘1승보다 더 귀중한 타자’를 잃은 아픔을 달랠 수는 없었다. 강병철 감독도 “큰일이다. 팀이 문제가 아니라 (박)정태가 하루빨리 완쾌하길 빈다”라며 제자를 걱정했다. 가장 답답한 것은 박정태 본인이었다. 훗날 박정태는 “시즌 초반에는 정말 좋았다. 정말 가슴 아프고 억울했다”라며 겨우내 흘렸던 땀이 물거품이 된 상황을 애석하게 생각했다.

부상 직후 병원에서는 ‘완치까지 최소 3개월’이라는 진단을 내렸다. 그러나 상태가 예상외로 심각해지면서 박정태는 세 차례 수술을 받아야 했다. 그 과정에서 무리하게 재활을 시도하다가 골수염까지 걸리면서 박정태는 뼈 이식까지 받는 지경에 이르렀다. 당시 의료진은 “이렇게 하다가는 다시는 야구를 못한다”라는 경고를 하기도 했다. 결국 박정태의 복귀는 다음 해인 1994시즌이 끝나도록 이뤄지지 않았다. 그 사이 롯데는 2년 연속 포스트시즌 진출에 실패하는 아픔을 겪었다.

현역 생활을 이어갈 수 없다는 우려에 컴퓨터 학원까지 다니며 제2의 인생을 준비하던 박정태는 이를 악물고 다시 한번 재활에 돌입했다. 병역의무를 수행하면서 수영과 체조로 몸 상태를 만들었고, 사직구장을 찾아 어머니와 함께 타격 훈련을 하기도 했다. 1994년 말 마지막으로 남아있던 정강이뼈 교정 금속 핀을 제거한 박정태는 드디어 복귀를 눈앞에 뒀다.

부상을 당한 지 정확히 2년에서 일주일이 빠진 1995년 5월 16일, 드디어 박정태는 1군 엔트리에 이름을 다시 올렸다. 곧바로 3번 타자로 출전한 박정태는 복귀전에서 3안타를 터트리며 화려한 부활의 신호탄을 쏘아 올렸다. 돌아온 박정태가 50경기에서 타율 0.337로 맹타를 휘두르며 활약하자 롯데는 1995년 3위로 정규시즌을 마감했고, 3년 만에 한국시리즈 진출에도 성공했다. (한국시리즈에서의 모습은 언급하지 않도록 하자.)

1993년 5월 23일 태평양-롯데전 박스스코어(사진=박스스코어 프로젝트)

야구공작소 양철종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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