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어짐이 이별은 아니듯 – KBO 고별전史

인천 앞바다에 있던 비룡이 하늘로 사라졌다. 21세기를 앞두고 인천에 찾아왔던 이 비룡은 20년 동안 인천시민과 희로애락을 함께 하며 동고동락했다. 이미 떠날 것을 알고 있었지만, 막상 정말로 떠나는 장면을 지켜본 사람들은 착잡한 심경을 느껴야 했다.

KBO 리그에 또 다른 새 이름이 등장했다. SK 와이번스를 인수한 신세계그룹은 3월 5일 새로운 구단 이름을 ‘SSG 랜더스’로 결정했다. 이로써 지난 2000년 3월 20일 등장한 ‘SK 와이번스’의 이름은 약 21년 만에 역사의 한 페이지로 사라지게 됐다. SK는 창단 후 8번 한국시리즈에 진출, 그중에서 3차례 우승 트로피를 들어 올리면서 2000년대 후반 KBO 리그의 명문구단으로 이름을 날렸다. 그러나 이제는 김소월의 시처럼 ‘불러도 주인 없는 이름’이 되었다.

KBO 리그에서는 40년 동안 많은 팀이 하늘의 별처럼 생겼다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롯데 자이언츠나 삼성 라이온즈처럼 원년 창단과 함께 이름을 유지하고 있는 팀도 있지만, 운영 주체가 바뀌지 않고도 이름만 바뀌는 경우도 있었다. 또한 매각을 통해 팀명이 바뀌거나, 구단이 해체되면서 아예 흔적조차 없이 사라진 경우도 있다.

사라진 팀 중에는 ‘가야 할 때가 언제인가를 분명히 알고 가는’ 경우도 있다. 반면, 어떤 팀은 갑작스럽게 사라지면서 팬들에게 인사를 남기지도 못하고 가는 경우도 있다. 손을 흔들어준 팀과 그렇지 못한 팀, 과연 KBO 리그의 고별전에서는 어떤 일이 있었을까.

 

삼미 슈퍼스타즈 – 1985년 6월 21일 인천 롯데전(6대 16 패배)

1985년, 삼미 슈퍼스타즈는 개막전 승리 이후 기나긴 연패에 빠졌다. 김진영 감독(작고)이 잠시 지휘봉을 놓는 등 혼란을 겪었던 삼미는 4월 30일 홈에서 MBC 청룡을 만나 18연패를 끊었다. 그러나 다음날 삼미 선수단과 팬들은 충격적인 소식을 들었다. 바로 삼미 구단이 청보식품에 매각된다는 소식이었다.

후기리그 시작과 함께 팀명 변경이 확정되면서 삼미는 전기리그 마지막 경기에서 팬들에게 작별 인사를 올렸다. 삼미는 고별전에서 승리를 거두기 위해 에이스 장명부를 투입했다. 그러나 장명부는 모두의 기대를 저버린 채 1회에만 안타 6개와 볼넷 3개를 내주며 8실점을 기록했다. 여기에 금광옥과 김바위의 홈런으로 5대 9까지 따라간 4회 초에는 중견수 김우근이 김민호의 단타성 타구를 빠뜨리며 3루타를 내주기도 했다. 결국 삼미는 초반 열세를 극복하지 못하고 6대 16으로 대패했다.

(출처=1985년 6월 22일자 매일경제)

도깨비 팀 삼미는 고별전도 혼란했다. 새로운 구단 운영 주체인 청보식품 관계자는 인천야구장에 나타나지도 않았다. 4회 실책성 플레이를 저지른 김우근은 경기 종료 후 포수 김진우와 말다툼을 벌이면서 이용균 구단 전무가 두 사람을 말리는 촌극도 벌어졌다. “왜 타구를 빠뜨렸냐”는 불평이 갈등의 시작이었다.

어수선한 분위기 속에 팬들에게 마지막 인사를 남긴 삼미는 올스타전을 끝으로 ‘청보 핀토스’로 변신했다. 그러나 청보의 역사도 그리 길지는 않았다.

 

청보 핀토스 – 1987년 10월 4일 대전 빙그레전(5대 3 승리)

삼미 구단을 품에 안은 청보식품은 야구단을 통해 라면이나 과자 등 자신들의 상품을 홍보하고자 했다. 그러나 1987년 초 모기업 풍한방직이 은행관리에 들어가면서 1년 내내 구단 매각설이 오르내렸다. 이런 상황에서 야구가 잘 될 리가 없다. 3할대 승률에 머물렀던 청보는 9월 30일 홈 최종전을 가진 후 10월 4일 대전에서 빙그레 이글스를 상대로 시즌 마지막 경기를 진행했다.

청보는 이날 에이스 임호균을 내세웠다. 비록 플레이오프는 일찌감치 탈락했지만 후기리그 최하위만은 면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이런 바람이 통했을까, 청보는 0대 3으로 뒤지던 6회 정현발의 투런포를 포함해 3점을 얻어 승부를 원점으로 돌렸다. 이어 연장 10회에는 김한조의 결승 투런 홈런이 나오면서 5대 3 역전에 성공했다. 선발 임호균은 10회를 무실점으로 막으며 완투승을 기록했다. 1번 타자로 나온 이해창은 시즌 54번째 도루를 기록, 1982년 김일권이 세웠던 한 시즌 최다 도루 기록을 경신했다.

하지만 기쁨은 오래가지 않았다. 다음날 신문에는 ‘청보 구단, 태평양화학에 팔려’라는 기사가 나왔다. ‘아모레’로 유명한 태평양화학이 청보 구단을 50억 원에 사들인 것이다. 시즌 종료 후 매각 사실이 드러나면서 청보 구단은 인천 팬들에게 마지막 인사를 남길 시간도 없이 사라졌다.

 

MBC 청룡 – 1989년 10월 4일 사직 롯데전(2대 7 패배)

1989년의 MBC 청룡은 시작부터 어수선했다. 정삼흠이 시즌 전 신임 배성서 감독과 갈등을 빚은 데 이어 배성서 감독의 투수 기용에 대해 선수단이 불만을 표시하면서 팀 분위기는 최악으로 치달았다. 결국 MBC는 시즌 막판까지 롯데 자이언츠와 치열한 최하위 싸움을 치러야 했다.

MBC는 공교롭게도 시즌 마지막 경기에서 롯데를 만나게 됐다. 시즌 막바지 8연승을 달리며 ‘탈꼴찌’를 위해 전력투구했던 MBC는 항명의 주인공인 정삼흠을 선발로 내세웠다. 그러나 정삼흠은 2이닝 동안 7안타를 허용하며 무너졌다. 투수에서 타자로 전향한 롯데 김응국의 통산 첫 홈런까지 허용한 MBC는 결국 2대 7로 패배하며 시즌을 마감했다.

MBC는 시즌 종료 후 구단 매각에 나섰다. 결국 MBC는 12월 14일 100억 원을 받고 럭키금성그룹에 구단을 매각했다. 이듬해 2월 탄생한 청룡의 새 이름은 2021년 3월 현재까지도 사라지지 않고 있는 ‘LG 트윈스’였다.

 

태평양 돌핀스 – 1995년 9월 29일 광주 해태전(3대 5 패배)

1988시즌부터 청보 핀토스를 대체하게 된 태평양 돌핀스는 이듬해 창단 최초로 포스트시즌에 진출하며 암흑기를 청산했다. 이어 1994년에는 인천 연고 팀 최초로 한국시리즈에도 진출하는 쾌거를 이뤄냈다. 그러나 태평양그룹은 1990년대부터 몸집 줄이기에 나섰고, 결국 1995년 8월 야구단마저 현대그룹에 매각했다.

1995년 태평양의 홈 최종전에서 홈런을 치고 돌아오는 이숭용(오른쪽) (사진=중계화면 캡처)

매각이 확정된 상태에서 태평양 선수들은 9월 27일 인천에서 열린 OB 베어스와의 홈 최종전 승리를 위해 이를 악물었다. 김홍집, 안병원, 정명원 등 에이스급 투수들이 총출동한 태평양은 그러나 2대 3으로 패배하면서 OB의 페넌트레이스 우승 장면을 지켜봐야 했다. 김이 샌 태평양은 이틀 뒤 광주에서 열린 해태 타이거즈와의 시즌 최종전에서는 3대 5로 지면서 유종의 미를 거두지 못했다. 태평양은 해태 조계현에게 평균자책점, 이대진에게는 탈삼진 타이틀을 만들어주는 희생양으로 전락했다.

인천의 돌고래는 다시 태평양 앞바다로 돌아갔다. 대신 1995년 11월 22일 ‘현대 유니콘스’라는 새 이름이 인천에 상륙했다.

 

쌍방울 레이더스 – 1999년 10월 8일 전주 LG전(7대 5 승리)

1991년 제8구단으로 합류한 쌍방울 레이더스는 1996년과 1997년 연거푸 포스트시즌에 진출하며 강팀으로 발돋움하는 듯했다. 그러나 1997년 말 외환위기로 인해 모기업 쌍방울그룹이 부도 처리됐고, 1999년에 들어서는 야구단에 대한 지원도 하기 어려운 상황으로 접어들었다. 전반기가 끝나고 김성근 감독이 경질되는 혼란 속에 쌍방울은 8월 23일부터 10월 5일까지 한 달이 넘는 기간 단 한 경기도 이기지 못하고 17연패를 당했다.

10월 6일 LG 트윈스와의 더블헤더 1차전을 비긴 쌍방울은 다음날 현대 유니콘스와의 경기에서 정민태에게 시즌 20승째를 허용하며 연패를 추가하는 듯했다. 그러나 서류상 최종전인 현대전 이후 실질적 최종전인 10월 8일 LG전이 남아있었다. 6일 더블헤더 2차전이 1회 초 종료 후 전주야구장의 조명시설 고장으로 서스펜디드 게임이 선언되면서 쌍방울은 8일에 더블헤더 2차전을 마무리 지어야 했다.

사실상 해체가 확정된 상황에서 쌍방울 선수단은 이를 악물었다. 쌍방울은 홈런 4방을 허용하고도 뒷심을 발휘, 3대 4로 뒤지던 8회 말 대거 4득점을 올리며 경기를 뒤집었다. 9회 올라온 박정현이 조인성에게 솔로홈런을 맞았지만 리드를 지켜내며 쌍방울은 7대 5 역전승을 거뒀다.

‘일시정지 경기의 잔여분을 치르면서 발생한 모든 기록은 이 규칙의 목적에 부합하도록 원래의 경기 일에 치러진 것으로 간주한다’라는 야구규칙의 규정에 따라 쌍방울은 10월 6일 더블헤더 2차전에서 17연패를 탈출한 것으로 처리됐다. 하지만 최다연패는 피했어도 팀 해체는 피하지 못한 쌍방울은 결국 이듬해 1월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쌍방울의 선수단은 SK 와이번스가 인수, 인천에서 새 역사를 써 내려갔다.

 

해태 타이거즈 – 2001년 7월 29일 광주 삼성전(6대 8 패배)

1980년대와 1990년대를 휩쓸었던 해태 타이거즈 역시 21세기의 시작과 함께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1997년 외환 위기 때 해태그룹이 부도 처리되면서 해태 야구단 역시 ‘바람 앞의 촛불’ 신세가 됐다. 1999년과 2000년 최악의 성적을 거뒀던 해태는 2001년 김성한 감독 취임 이후 전반기 내내 4강 싸움을 포기하지 않았다. 새 구단주를 찾기 위한 노력의 일환이었다.

진심이 통했을까, 5월 말 광주에 공장을 보유한 기아자동차가 해태 구단 인수 의사를 표시했다. 이후 6월 중순 KBO가 기아자동차의 해태 구단 인수를 승인했고, 7월에는 매각 협상까지 타결되면서 8월 1일부로 ‘KIA 타이거즈’라는 이름을 새로 달게 됐다. KIA는 구단 인수와 함께 일본에서 돌아온 이종범과도 3억 5000만 원에 계약을 맺었다.

광주 고별전 종료 후 관중 앞에서 인사하는 해태 선수단(사진=방송화면 캡처)

해태는 7월 29일 삼성 라이온즈와 홈 고별전을 치렀다. 공교롭게도 삼성에는 해태 왕조의 주역인 김응용 감독과 유남호, 김종모, 조충열 코치가 있었다. ‘왕년의 전우’들과 상대한 해태는 5회와 6회 6점을 내주면서 6대 8 역전패를 당했다. 경기 종료 후 해태 선수단은 그라운드에 도열해 팬들과 함께 ‘석별의 정’을 부르며 눈물을 삼켜야 했다.

애초 해태의 진짜 고별전은 7월 31일 인천 SK전이었다. 그러나 이날 경기가 우천으로 취소되면서 해태는 홈 관중 앞에서 ‘해태’라는 이름을 달고 마지막 경기를 펼칠 수 있게 됐다.

 

현대 유니콘스 – 2007년 10월 5일 수원 한화전(2대 0 승리)

삼미-청보-태평양을 이은 인천팀의 후계자였다가 수원으로 떠난 현대 유니콘스는 2000년 이후 모기업의 재정난으로 인해 어려움을 겪었다. 2006년부터는 현대그룹의 지원이 끊기며 KBO의 자금으로 운영됐고, 결국 2007시즌이 끝난 후 매각 또는 해체의 길을 걸어야 했다.

현대는 2007년 10월 5일 홈구장인 수원야구장에서 한화 이글스를 만났다. 4강 탈락은 확정됐지만 6위를 사수하기 위해, 그리고 한때 왕조를 이뤘던 ‘현대’라는 이름을 아름답게 마무리하기 위해 현대는 이숭용을 제외한 모든 주전이 선발 출전했다. 2회 폭투로 선취점을 얻은 현대는 3회 이택근의 내야 땅볼로 2대 0으로 앞서나갔다. 선발 김수경이 5이닝 7탈삼진 무실점으로 호투하고 이어 등판한 투수들이 무실점으로 리드를 지켜내면서 현대는 최종전을 승리로 장식했다.

(사진=중계화면 캡처)

경기 후 김시진 감독을 비롯한 현대 선수단은 ‘팬 여러분의 뜨거운 성원에 감사드립니다’라는 문구의 현수막을 들고 팬들에게 마지막 인사를 전했다. 마지막 남은 현대 팬들은 눈물을 흘리며 ‘왕조’의 마지막을 지켜봤다.

이후 현대는 2008년 1월 끝내 해체됐다. 선수단을 비롯한 인적 자원은 새로 창단한 서울 히어로즈가 인수, 2021년 현재는 키움 히어로즈가 됐다.

 

SK 와이번스 – 2020년 10월 30일 문학 LG전(3대 2 승리)

SK 와이번스는 팀명 변경이 확정된 2021년 3월 5일 청백전을 통해 팬들에게 마지막 인사를 남겼다. 김원형 감독과 주장 이재원의 유니폼 반납식 등의 이벤트를 진행한 SK는 이날 ‘SSG 랜더스’로 팀명을 바꾸게 됐다.

(사진=SK 와이번스)

하지만 SK의 마지막 경기는 3월 5일이 아니었다. 그때는 몰랐겠지만, 약 4개월 전인 2020년 10월 30일 ‘SK 와이번스’라는 이름을 달고 마지막으로 페넌트레이스 경기를 진행했다. SK에서 16년 동안 활약했던 윤희상의 은퇴식이 진행된 이날 경기에서 SK는 베테랑 김강민의 결승 솔로홈런에 힘입어 LG 트윈스를 3대 2로 물리치며 시즌 유종의 미를 거뒀다.

창단 20주년을 맞이했던 SK는 시즌 최종전에서 2000년 유니폼을 입고 경기를 뛰었다. 공교롭게도 창단 첫 경기였던 2000년 4월 5일 삼성전에서도 SK는 3대 2로 승리를 거뒀다. 완벽한 데칼코마니를 만들면서 SK는 야구 연감의 한 페이지 속으로 사라졌다.

 

야구공작소 양철종 칼럼니스트

에디터: 야구공작소 이승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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