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롯데 자이언츠에는 3명의 12승 투수가 있었다. 바로 손민한과 송승준, 장원준이었다. 세 선수는 모두 26경기에 등판, 150이닝 이상을 소화하며 시즌 내내 이탈 없이 선발진을 굳건히 지켰다. 로테이션에 세 자리가 고정으로 버티면서 롯데는 그해 외국인 투수가 시즌 도중 퇴출되는 상황 속에서도 안정적인 투수 운용을 이어갈 수 있었다. 세 선수의 활약 덕분에 롯데는 이른바 ‘비밀번호 8888577’를 끊어내고 8년 만에 가을 공기를 맛보게 됐다.
똑같은 승수를 기록한 세 선수였지만 당시 팬들이 느끼는 이미지는 달랐다. 1선발이었던 손민한은 2000년대 중반부터 팬들에게 ‘민한신’이라는 별명으로 불릴 정도로 카리스마가 넘치던, 말 그대로 에이스였다. 팬들은 손민한에게 기본적인 믿음이 있었고 본인 역시 그 믿음에 부응하곤 했다. 손민한이 선발투수로 예고되면 팬들은 안심하고 경기장으로 향할 수 있었다.
반면 송승준과 장원준은 팬들에게 좀처럼 신뢰를 얻지 못했다. 잘 던지다가도 갑자기 땀을 한 바가지 흘리며 무너졌다. TV로 경기를 시청하던 팬들은 도저히 채널을 다른 곳으로 돌릴 수 없었다. 팬들은 “매일 두들겨 맞는 것 같은데 시즌이 끝나보니 잘했네?”라는 말로 두 선수를 평가하곤 했다. 인간계에서는 잘하는 선수지만 ‘신’이라는 호칭을 받기엔 모자란 느낌이었다.
이후 롯데는 2013년까지 한 시즌을 제외하고는 항상 10승 트리오가 나왔다. 손민한, 장원준, 조정훈, 라이언 사도스키, 셰인 유먼, 크리스 옥스프링 등 매번 구성원은 바뀌었다. 하지만 송승준만큼은 항상 트리오의 한 자리를 맡았다.
8년이나 늦었던 입단, 기대를 품게 하다
경남고등학교 시절 에이스로 활약했던 송승준은 1999년 롯데의 고졸우선지명을 받았다. 그러나 메이저리그 보스턴 레드삭스의 입단 제안을 받고는 방향을 미국으로 돌렸다. 90년대 말 당시로서는 거액인 103만 달러를 받을 만큼 보스턴에서 거는 기대가 컸다. 마이너리그 단계를 차근차근 밟은 송승준은 2002년 ‘베이스볼 아메리카’가 선정한 보스턴 팀 내 유망주 1위에 올랐다. 하지만 트레이드와 부상이 발목을 잡았다. 2004년에는 메이저리그 승격 확정 직후 손목 골절상을 입으며 끝내 메이저리그 무대는 한 차례도 밟지 못했다.
결국 2006년을 끝으로 송승준은 빅리그 도전을 포기했다. 당초 해외파 복귀 제한 규정으로 인해 꼼짝없이 군 문제를 해결한 후 KBO 리그에 와야 했던 송승준은 2007년 한시적으로 도입된 해외파 특별 지명에서 총액 3억 원에 롯데 유니폼을 입게 됐다. 같은 부산 지역 출신의 이승학(전 두산)과 송승준 사이에서 고민하던 롯데는 비록 병역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지만 몸 상태가 상대적으로 더 좋았던 송승준을 선택했다.
어렵게 고향 팀으로 돌아온 송승준은 2007년 4월 21일 사직 현대전에서 처음으로 KBO 마운드에 올랐다. 이대호의 사직구장 최초 장외홈런이 나왔던 이 경기에서 송승준은 최고구속 147km/h를 찍으며 2이닝 무실점을 기록했다. 이후 송승준은 어린이날 첫 선발등판에서 4.1이닝 1실점으로 호투했고, 6월 30일 삼성전에서는 5이닝 3탈삼진 2실점으로 복귀 후 첫 승을 거뒀다. 비밀번호의 마지막을 지나고 있던 팬들은 송승준의 투구에서 희망을 봤다.
첫 시즌 117이닝 동안 5승 5패 평균자책점 3.85를 기록하며 희망을 보여준 송승준은 이후 롯데 마운드에서 꾸준히 활약을 했다. 2008년 베이징 올림픽에서는 난적 쿠바를 상대로 6.1이닝 3실점 승리투수가 되며 금메달 획득에 기여하기도 했다. 2009년에는 지금도 ‘송삼봉’으로 회자되는 3경기 연속 완봉승(역대 최다 타이)을 달성하며 리그 상위 수준의 선발투수로 자리매김했다.
왜 팬들은 그를 믿지 못했나
이렇듯 가끔은 인상적인 투구를 선보였던 송승준이지만 팬들의 평가는 유독 박했다. 송승준 본인도 언급했듯이 ‘장점: 로테이션을 거르지 않는다 / 단점: 로테이션을 거르지 않는다’는 말은 팬들이 송승준에게 어떤 감정을 가지고 있는지를 잘 보여준다.
이는 어느 정도 송승준이 자초한 면도 있다. 특히 2009시즌은 송승준 커리어의 정수(?)라고 할 수 있다. 첫 등판에서 6이닝 2실점으로 호투했던 송승준은 바로 다음 3경기에서 13이닝 19실점(17자책)으로 처참하게 무너졌다. 그러더니 5월 3일 두산전부터 무려 9연승을 달렸다. 6월 10일부터 7월 10일까지 한 달간 49이닝 2실점(평균자책점 0.36)을 기록했다. 그 기간 동안 류현진을 두 번이나 꺾었고, ‘삼봉’도 이때 나온 것이다. 하지만 직후 경기부터 3경기에서 12.1이닝 23실점(평균자책점 16.78)으로 주저앉았다. 도무지 종잡을 수 없는 모습이었다.
여기에 포스트시즌에서의 부진도 한몫 거들었다. 송승준은 통산 포스트시즌 11경기(9선발)에서 단 1승을 거두는 동안 6패를 기록했다. 평균자책점 역시 7.24로 높았다. 특히 2009년 준플레이오프 3차전에서는 이른바 ‘김거김(김현수 거르고 김동주)’이 나온 끝에 1.1이닝 7실점으로 부진하면서 롯데 팬들을 고통받게 만들었다.
하지만 송승준에게도 억울한 측면은 있다. 무엇보다도 롯데 팬들의 눈이 너무 높은 곳을 향해 있었다. 롯데는 과거부터 최동원-윤학길-염종석-주형광의 ‘에이스 계보’가 이어졌다. 여기에 송승준이 KBO 무대를 처음 밟았을 때는 하필 ‘전국구 에이스’ 손민한이 건재하던 시기였다. 자연히 롯데 팬들의 눈높이는 높아질 수밖에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잘하면 3점대 중후반, 못하면 4점대 후반의 평균자책점을 기록했던 송승준은 꾸준함과는 별개로 팬들을 만족시킬 수 없었던 것이다. 불운하게도 송승준은 계속 비교당할 운명이었다.
그래도 송승준만한 투수는 없었다
비록 팬들의 절대 신뢰는 얻지 못했지만 송승준은 묵묵히 롯데 마운드를 지켰다. 본격적으로 로테이션에 합류한 2008년부터 2013년까지 6시즌 중 5시즌에서 10승 이상을 거뒀고, 매년 150이닝 이상을 소화했다. 같은 기간 리그에서 가장 많은 이닝(992이닝)을 기록했고, WAR(대체 선수 대비 승리 기여도) 역시 7번째로 높았다(18.90). FA 계약 후 2016년 10경기 등판에 그치며 주춤하기도 했지만 이듬해 11승을 거두면서 화려하게 재기했다. 한 번 무너질지언정 다시 살아나는 선수가 바로 송승준이었다.
송승준 덕분에 롯데는 시즌 전 마운드 구상에서 한 자리는 빼놓고 시작할 수 있었다. 손민한이 부상과 기타 이슈로, 장원준이 군 입대와 FA 계약으로, 조정훈이 부상으로 인해 떠나고, 수많은 외국인 선수들이 명멸을 거듭하는 가운데 송승준은 홀로 10년을 버텨줬다. 에이스는 다른 선수가 맡을지라도 송승준의 자리는 항상 두세 번째 정도는 됐다. 송승준이 전성기를 맞이했던 2008년부터 2013년까지 롯데는 항상 5할 언저리의 승률을 유지했고, 송승준이 부활했던 2017년 롯데는 5년 만에 포스트시즌 진출에 성공했다.
그런 활약들이 한 시즌 한 시즌 모여 2017년에는 역대 29번째이자 팀 내에서 윤학길, 손민한에 이어 3번째로 통산 100승을 기록했다. 봉중근, 김선우, 이승학, 류제국 등 여러 해외파 선수가 있었지만 100승 투수는 2020년 현재까지 송승준이 유일하다. 2007년 한국으로 돌아올 때만 해도 상상할 수 없었던 순간이었다. ‘송승준이 언제 100승을 거뒀지?’ 하며 놀라는 팬들도 있었다.
비록 ‘신’은 아니지만…
잘하는 선수들에게는 항상 ‘신(神)’이라는 칭호가 붙는다. ‘야구의 신’을 시작으로 ‘종범신’과 ‘양신’, ‘민한신’ 등등 팬들은 야구장이 신전이 아닐까 할 정도로 여러 신을 숭배했다. 비록 어느 노감독은 “신도 여러 가지 신이 있잖아요”라고 말하기도 했지만, 어쨌든 뛰어난 활약을 펼쳐야 붙는 칭호가 바로 ‘신’이다.
하지만 송승준은 항상 그런 호칭과는 거리가 멀었다. 잘할 때에는 ‘송삼봉’, ‘송선생님’, 못할 때에는 차마 입에도 담기 어려운 욕설이 이름 뒤에 붙었다. 이는 팀 내에서 항상 상위권이지만 1등은 거의 하지 못했던 본인의 입지를 반영한 걸지도 모른다. 인간계에서는 훌륭했지만 신 대접을 받기에는 조금 모자라다고 생각했을 수도 있다.
그래도 송승준은 팬들의 사랑을 많이 받았다. 마운드에서 본인이 아쉬운 투구를 보인 날도 더그아웃에서는 항상 열정적으로 팀을 응원했다. 야구선수가 아니라 흡사 ‘사직아재’ 같은 느낌마저 들 정도였다. 끝내기 순간에는 누구보다 먼저 뛰어나갔고, 누구보다 기뻐했다. 불펜투수로 보직을 옮기면서 끝내기 안타 때 그라운드로 가는 동선이 길어졌다고 아쉬워 할 정도였다. 여기에 팬서비스에도 충실했다. 전화를 받다가도 팬의 사인 요청이 오면 흔쾌히 받아주기도 했다.
그래서 롯데 팬들은 송승준을 신이라고 부르지는 않았지만, ‘행님’이라는 호칭으로 부르곤 했다. 범접할 수 없을 것 같은 에이스와는 다르게 우리 주위에 항상 있을 것만 같은 선수, 처음 만나도 말이 통할 것 같은 친근한 선수, 어떨 때는 욕을 한 바가지 하지만 어떨 때는 나도 마운드로 가 꽉 안아주고 싶은 선수. ‘행님’이라는 단어 안에는 송승준에 대한 롯데 팬들의 수많은 감정이 담겨 있다.
이제 우리 곁을 떠나는 ‘행님’
송승준은 윤학길의 롯데 최다승(117승)에 8승만을 남겨둔 상황이다. 그러나 본인은 기록 달성이 현실적으로 어렵다고 판단하고 있다. 송승준은 지난 2월 한 프로그램에 출연해 “중간계투가 됐기 때문에 욕심이 있어도 할 수 없다”라고 말했다. 그러면서도 “선발승은 내가 더 많다”라며 자신의 기록에 자부심을 드러내기도 했다
이제 송승준의 롯데 최다승 달성은 정말 어려워졌다. 14시즌 동안 롯데 팬들과 울고 웃은 그도 어느덧 불혹을 지나며 서서히 이별을 준비하고 있다. 지난 11월 26일 롯데는 송승준과 재계약하면서 2021시즌 플레잉 코치로 활동할 예정이라고 발표했다. 송승준은 선수로 시작했다가 시즌 중 은퇴 경기를 치른 후 현역 생활을 마감할 계획이다.
롯데 팬과 울고 웃으며 15년을 보낸 송승준은 이제 그라운드에서 떠난다. 항상 있을 것만 같던 존재의 부재는 롯데 팬에게 어떻게 다가오게 될까.
야구공작소 양철종 칼럼니스트
에디터=야구공작소 오연우, 나상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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