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러스트=야구공작소 최원영)
[야구공작소 양철종] 1995년 8월 11일, 부산 수영만 요트 경기장에서는 MBC <인기가요 베스트 50> 생방송이 진행되고 있었다. 1위 후보였던 DJ DOC의 ‘머피의 법칙’과 노이즈의 ‘상상속의 너’ 외에도 더 블루, R.ef, 솔리드 등 당시 인기 있던 가수들이 부산에 내려왔다.
그중에서도 평소 TV에 자주 출연하지 않던 이승환이 출연한 것은 놀랄 일이었다. 1995년 6월 자신의 4집 앨범을 발매한 이승환은 이날 방송에서 타이틀곡이었던 <천일동안>을 (립싱크로) 열창했다. 관객의 환호도 엄청났다.
“보고 싶겠죠 천 일이 훨씬
지난 후에라도 역시 그럴 테죠”
천 일, 공교롭게도 방송이 나간 8월 11일은 부산을 연고지로 하는 야구팀이 우승한 지 1000일 되는 날(1995년 7월 11일)에서 정확히 한 달이 지난 날이었다. 이상하게도 그 팀의 운명은 <천일동안>의 가사처럼 흘러갔다. 그해도, 천 일이 훨씬 지난 후에도 우승은 볼 수 없었다.
한 번의 천 일이 지나고 두 번이 지나고 어느새 롯데 자이언츠가 마지막으로 우승한 지도 어언 10000일이 흘렀다. 대한민국 대통령이 6번 바뀌고, 미국의 부시 부자가 모두 대통령직에 올랐다가 내려왔다. 사람들의 주머니에는 삐삐에서 플립폰, 폴더폰을 거쳐 스마트폰이 들어가 있다. 부산직할시는 부산광역시가 됐고, 경상남도 울산시는 울산광역시가 됐다.
이렇게 보니 지금까지 우승을 못 했다는 것보다 어떻게 우승을 두 번이나 했는지가 더 신기해진다. 10000일 전, 롯데가 마지막으로 우승했던 그해에는 어떤 일이 있었을까?
6년의 암흑기, 희망의 1991년
그야말로 최동원의, 최동원에 의한, 최동원을 위한 무대였던 1984년 한국시리즈가 끝나고 롯데는 긴 침체기에 빠졌다. 막상 압도적 꼴찌나 처참한 승률을 기록한 시즌은 거의 없었지만 이상하게 잘 풀리지 않았다. 롯데는 1985년부터 1990년까지 포스트시즌 맛도 못 봤다.
그러나 희망은 모두가 포기한 순간 찾아온다. 1991년 롯데는 페넌트레이스 4위에 오르며 7년 만에 가을야구를 맛봤다. 성적보다 의미 있던 것은 팀의 체질 개선이었다. 80년대 후반부터 최동원, 김용희, 김용철의 역할을 대신했던 윤학길, 한영준, 김민호가 팀의 주축으로 자리 잡았다. 암흑기 끝자락에 입단한 박동희, 김청수, 이종운 등의 선수와 1991년 신인이었던 박정태, 전준호, 김태형이 베테랑과 조화를 이뤘다.
그렇게 롯데는 1992년을 향한 준비를 시작했다.
창단 최초 페넌트레이스 70승
많은 전문가들은 시즌 전 롯데를 4강 후보로 올렸다. 그러나 이것은 롯데에 이렇다 할 무언가가 있어서가 아니라 전년도 4위라는 성적 때문에 관성으로 예측한 것에 가까웠다. 4강에 포함은 됐지만 ‘굳이 따지자면 약보다는 강’이라는 의미에 가까웠고, 우승 후보로는 압도적 2강이었던 해태와 빙그레만 언급됐다.
시범경기를 6승 2무 3패로 마감한 롯데는 4월과 5월에 각각 에누리 없는 5할 승률을 거두며 페넌트레이스를 시작했다. 본격적인 출발은 6월부터였다. 시작부터 9연승을 달린 롯데는 6월에만 14승 5패, 승률 0.737을 기록했다. 6월 4일에는 3위 자리를 탈환해 시즌 마지막까지 지켜냈다. 박동희, 김민호, 김응국, 이종운 등 많은 주전 선수들의 부상과 결장을 딛고 얻어낸 성과였다.
9월 5일 사직 쌍방울전에서는 창단 후 처음으로 70승 고지에 올랐다. 시즌 최종 성적은 71승 55패. 승률 0.563으로 2위 해태와는 불과 0.5경기 차이였다.
페넌트레이스 에피소드
– 4월 11일 LG전에서는 신인이었던 염종석이 선발투수로 나서 9회 2아웃까지 무실점으로 막았다. 하지만 최연소 완봉승이 눈앞이었던 상황에서 2루타와 유격수 실책으로 점수를 허용하며 아쉽게 완투승으로 끝내야 했다.
– ‘호랑나비’ 김응국은 시즌 중 롯데그룹 계열사인 롯데햄의 광고 모델 제안을 받았다. 출연료는 500만 원이었다. 하지만 김응국은 이 제안을 단칼에 거절했다. 야구인의 자존심 때문이었다. 이름이 비슷한 김흥국이 주연인 광고에서 김응국은 들러리 역할이었다. 한 야구인은 “자기 선수를 빛나게 하지는 못할망정 망신을 시켜서야 되겠느냐”며 혀를 찼다고 한다.
– 시즌 초 롯데는 이른바 ‘일요일 징크스’에 시달렸다. 개막 시리즈였던 4월 5일 사직 OB전을 시작으로 5월 17일 대전 빙그레전까지 일요일에만 7연패에 빠졌다. 강병철 감독은 아예 징크스라는 이야기도 금지할 정도로 예민해졌다. 이 징크스는 5월 24일 일요일 경기에서 승리하며 깨졌다. 하지만 공교롭게도 1992년 한국시리즈의 유일한 패배였던 3차전은 일요일이었다.
– 쓸데없는 팀 전통인 ‘야구장에서 축구 하기’는 이때도 여전했다. 5월 13일 태평양 돌핀스와의 경기에서 태평양 이광근의 타구가 윤학길의 스파이크에 맞고 패스처럼 유격수 김민재에게 굴러갔다. 김민재는 이 타구를 침착하게 잡아 아웃으로 처리했다. 반면 3일 뒤 대전 빙그레전에서는 좌익수 김응국이 빙그레 이정훈의 2루타성 타구를 잡으려다 글러브에 제대로 넣지 못하고 담장 밖으로 패스(?)해 주며 홈런을 허용했다.
– 5월 22일 사직 삼성전에서는 1회초부터 삼성 정경훈에게 인사이드 파크 만루홈런을 허용한 후 5회말 롯데 전준호가 똑같이 인사이드 파크 홈런으로 응수했다. KBO 리그 첫 1경기 그라운드 홈런 2개가 나온 날이었다.
– ‘기록의 롯데’는 여전했다. 5월 31일 해태전에서는 이호성-한대화-홍현우에게 3타자 연속 홈런을 내주며 최초 팀 1000홈런 타이틀의 희생양이 됐다. 8월 20일 해태전에서는 김성한의 첫 통산 2000루타를 내줬고, 8월 28일 사직 빙그레전에서는 장종훈에게 한 시즌 최다 홈런 경신(36호)의 도우미가 됐다. 그 사이 8월 23일에는 OB 임형석에게 사이클링 히트도 허용했다. 반면 롯데가 달성한 기록은 6월 16일 김민호의 KBO 리그 통산 5000호 홈런 정도였다.
92년 롯데의 키워드 ① – 소총부대와 남두오성
1992년은 KBO 리그 출범 11년 만에 가장 많은 홈런이 나온 시즌이었다. 리그 홈런은 최초로 800개를 넘었고(871홈런) 이전까지 단 7번밖에 없던 100홈런 팀도 1992년에만 5팀이 나왔다. 하지만 당시로서는 큰 규모였던 사직야구장을 홈으로 썼던 롯데는 이런 흐름에서 예외였다. 오히려 1991년 팀 73홈런에서 줄어든 68홈런에 그쳤다. 리그 최하위였다.
그렇지만 롯데는 부족한 대포를 소총으로 대체했다. 1992년 롯데의 팀 타율은 0.288이었고 2루타와 3루타는 리그 1위였다. 담장을 넘기지 않고 발로 장타를 만든 롯데는 팀 홈런이 두 배 이상이었던 빙그레 이글스와 비슷한 생산력을 보였다. (롯데 팀 홈런 68개 – wRC+ 110.0 / 빙그레 팀 홈런 146개 – wRC+ 109.5)
소총부대의 중심에는 이른바 ‘남두오성’이라고 불렸던 전준호, 이종운, 박정태, 김민호, 김응국이 있었다. 4번타자였던 김민호는 “전준호와 이종운이 꼭 1회에 둘 중 하나는 살아나갔다. 그러면 박정태, 나(김민호), 김응국 중 하나가 불러들였기 때문에 항상 초반에 1~2점 앞섰다”고 회상했다. 한 방은 없었지만 ‘가랑비에 옷 젖듯이’ 상대를 무력화했다.
92년 롯데의 키워드 ② – 17승 선발 듀오
최동원 이후 묵묵히, 또 꾸준히 롯데 선발진을 지켜온 ‘고독한 황태자’ 윤학길은 사실상 안식년이었던 1990년 이후 부활했다. 1992년에도 9월까지 다승왕 경쟁을 하는 등 여전한 모습으로 마운드를 지켰다. 28경기에 선발로 나와 무려 14번의 완투를 기록할 정도로 여전한 체력을 보여줬다.
이런 윤학길을 고독하지 않게 만든 선수가 있다. 대학행을 포기하고 1992년 고졸신인으로 입단한 염종석이었다. 전지훈련부터 강병철 감독의 눈에 들며 선발진에 합류한 염종석은 데뷔 첫 승부터 완투승으로 장식했다. 이후로는 거칠 게 없었다. 데뷔 후 첫 9승이 모두 완투승이었고, 반대로 완투한 경기는 모두 승리했다. 1985년 이후 선동열에게만 문을 열어줬던 평균자책점 타이틀도 염종석이 가져갔다.
두 선수 외에도 신인 윤형배와 김상현이 깜짝 활약으로 마운드를 지탱했고, 전반기 의사 장티푸스로 11이닝 투구에 그친 ‘슈퍼 베이비’ 박동희도 후반기 재가동됐다. 이들의 활약으로 롯데는 기존 김청수와 김시진, 김태형의 부진 속에서도 마운드 높이를 유지할 수 있었다. 강병철 감독도 시즌 중 “세대교체에 성공한 것 같다”고 자평했다.
내실 있는 상위타선과 강력한 선발진은 시너지 효과를 냈다. 염종석은 야구공작소의 팟캐스트 ‘야자수’와의 인터뷰에서 “그때는 ‘질 것 같다’는 생각이 없었다. 윤학길, 박동희, 염종석 세 선수가 나오면 많아도 3~4실점으로 끝냈다. 그래서 타자들이 절대 포기하지 않았다”라고 회상했다.
가을야구, 그리고 대망의 우승
정규시즌을 3위로 마친 롯데는 포스트시즌 모드로 전환했다. 준플레이오프 상대는 전년도 롯데를 같은 자리에서 떨어뜨린 삼성이었다. 하지만 달라진 롯데를 막을 수는 없었다. 롯데는 1차전에 신인 염종석을 투입해 완봉승이라는 기대 이상의 결과를 얻었고, 2차전에도 에이스 윤학길 대신 박동희를 투입했으나 역시 완봉승을 거뒀다. 준플레이오프를 투수 두 명만 쓰고 끝낸 것이다.
롯데의 다음 상대는 일찌감치 2위를 확정 짓고 포스트시즌을 준비한 해태였다. 하지만 에이스 이상의 의미였던 선동열의 등판이 어렵다는 소식이 전해지며 흐름은 롯데로 넘어왔다. 롯데는 에이스 윤학길과 염종석이 등판하는 날에는 최대한 두 선수만 쓰고, 아닌 날에는 2진급 투수만 투입하는 ‘투 트랙’ 전략으로 투수진 소모를 최소화했다. 특히 염종석은 1차전 3이닝 구원 – 4차전 완봉승 – 5차전 3이닝 세이브를 따내는 투혼을 보여줬다.
롯데의 한국시리즈 진출을 예상한 사람은 있었다. 하지만 롯데가 한국시리즈에서 빙그레를 꺾을 것이라고는 누구도 예상하지 못 했다. 1992년 빙그레는 KBO 리그 역대 최초로 80승을 넘긴 팀이었다. 정규시즌 상대 전적도 롯데가 4승 14패로 압도적으로 밀렸다.
그러나 기적은 아무도 기대하지 않을 때 또 한 번 찾아왔다. 한국시리즈 1차전 빙그레 선발이었던 송진우는 정규시즌 롯데전에서 5승 무패 3세이브 평균자책점 1.63으로 천적 그 자체였다. 하지만 롯데는 1차전에서 그 송진우에게만 6점을 뽑아내며 기선제압에 성공했다. 이어 2차전에서는 그해 14승을 거둔 빙그레의 특급 신인 정민철을 상대한, 사실상 ‘논개’ 카드였던 윤형배가 무려 8.1이닝을 소화하며 적진에서 2승을 챙겼다.
3차전 역전패로 잠시 쉬어간 롯데는 4차전부터 ‘콩코드’ 박동희가 팀을 ‘캐리’했다. 4차전 염종석이 팔꿈치 통증으로 조기강판되자 구원등판한 박동희는 3.1이닝 세이브를 기록했다. 5차전에서는 아예 4회 2사부터 올라와 던졌다.
9회말 2사 1루, 박동희는 빙그레 양용모에게 2루수 박정태 정면으로 향하는 땅볼을 유도했다. 박정태는 공을 잡자마자 직접 베이스를 밟았다. 4-2 롯데 승리. 1992년 10월 14일 대한민국에서 가장 야구를 잘하는 팀은 롯데 자이언츠가 됐다.
만 일이 훨씬 지난 후에라도 역시 그럴테죠
그리고 27년 하고도 3개월이 흐른 2020년 3월, 여전히 롯데는 1992년의 영화(英華)를 잊지 못하고 있다. 롯데 우승을 보지 못하고 태어난 아이가 군대를 갔다 오고 대학교를 졸업하고 사회생활을 하는 동안 롯데의 우승 시계는 여전히 1992년에 머물러 있다. 롯데 팬 사이에서는 “유니폼 오래 입고 싶으면 ‘V3’를 마킹해라”는 자조적인 말도 돈다.
30년 가까이 우승을 하지 못하고 있는 팀을 ‘항상 지켜주던, 감사해하던, 너무 사랑했던’ 팬들은 이제 1992년을 보내주고 싶어한다. 언젠가 ‘롯데 왕조’라는 단어가 생길 날, 롯데 팬들은 1992년을 ‘마지막’이 아닌 ‘시작’으로 생각할 것이다. 그런 날은 올 수 있을까.
에디터 = 야구공작소 오연우
기록 = STATIZ, KBO 연감
참고 = <야자수> 롯데우승-2 (feat.염종석), 일간스포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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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당시였던 것 같은데, 결국 김흥국과 김응국이 함께 출연한 광고를 본 것 같아요… 김응국은 말미에만 살며시… 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