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러스트 = 야구공작소 이찬희)
[야구공작소 송동욱] 첫 인상이 강력하다 할지라도, 결국 남는건 마지막 인상이다. 야구 선수들은 은퇴라는 숙명을 짊어지고 선수생활을 한다. 그렇기에 화려한 전성기를 누리는 것만큼이나 좋은 모습을 남기며 떠나는 것이 또한 어렵다.
어우두. 2019 KBO리그도 두산의 6번째 우승으로 마무리됐다. 하지만 마지막 순간 마운드를 지킨 선수의 이름은 꽤나 의외였다.
20년 전 대구에서 선수 생활을 시작해, 서울의 마운드에서 자신의 손으로 선수 생활 마지막 매듭을 우승으로 맺어낸 선수의 이야기는 본인의 표현처럼 ‘참으로 굴곡진 선수생활’이었다.
#1차지명
21세기의 시작을 알리는 2000년 시즌을 앞둔 신인 드래프트 현장. 여기서 삼성은 꽤나 의외의 선택을 하게 된다. 99시즌 대구 홈 개막전에서 시구를 하며 1차 지명 유력 후보로 점쳐졌던 장준관이 아닌 배영수를 선택한 것이다.
이 선택에 대한 당시의 평가는 매우 박했다. 구속은 빠르지만 제구를 비롯한 투수로써의 완성도가 상대적으로 부족한 배영수를 선택했다는 이유였다. 하지만 이 선택은 우리가 다 알고 있는 것처럼 엄청난 반전을 만들어냈다.
본인을 선택해 준 삼성에서 뛰었던 배영수의 모습은 실로 대단했다. ‘푸른 피의 에이스’라는 별명답게 3년 연속(2004~2006) 2점대 평균자책점과 4번의 10승 시즌을 만들어냈다. 당연하게도, 대구 구장 마운드에서 공을 던진 15년(2000~2014) 동안 적립한 38.32의 WAR 또한 동기간 삼성에서 뛰었던 투수들 중 독보적인 1위다.
그 중 최고를 뽑자면 역시나 2004시즌. 리그에서 가장 많은 완투(4회)와 완봉(2회)을 기록하며 17승을 올렸고 다승 공동 1위, 평균자책점과 탈삼진, 최다이닝에서 3위를 기록하며 2004시즌 리그 MVP를 수상했다. 명실상부 국내 최고의 투수로 거듭나는 순간이었다.
그 이후로도 배영수와 비슷한 경북고 출신 우완 정통파 강속구 투수들이 삼성의 1차 지명을 받았다. ‘안경 쓴 우완 투수’가 롯데의 에이스를 상징하듯 배영수의 성공 사례 역시 삼성의 에이스를 지칭하는 이미지가 된 셈이다.
#한국시리즈
배영수의 커리어를 논하면서 한국시리즈는 빼놓을 수 없는 단어다. 에이스로 올라서기 시작했을 무렵, 2004년의 한국시리즈에서 그는 일약 스타덤에 오르는 인생 경기를 펼쳤다. 그 당시 최강이라고 평가 받던 현대의 타선을 10이닝 노히트노런으로 막은 것이다.
이미 너무 많이 회자된 얘기라 익숙할 것이다. 하지만 얼마나 많은 투수들이 정규시즌의 기록을 가을야구까지 이어가지 못했었는지 기억해 본다면, ‘가을 야구의 중압감’을 이겨내고 리그 최고의 타선을 10이닝 노히트 노런으로 막아내는 것이 보통 일이 아니란 것을 알게 될 것이다. 경기가 무승부로 끝나는 바람에 ‘비공인 10이닝 노히트노런’으로 남게 되었지만, 공인과 비공인을 떠나 박수 받아 마땅한 활약이었다.
그로부터 2년 뒤, 그는 본인의 선수생활에서 가장 찬란하게 빛나는 순간을 맞이한다. 2006년 시즌 말미부터 팔꿈치 부상을 견디며 팀의 정규시즌 우승을 이끈 배영수는 당연하게도 한국시리즈 1차전에 선발 등판했다.
2004년이 최고에게 도전하는 입장이었다면, 2006년은 최고의 자리에서 도전을 받아내야 하는 상황이었다. 도전자는 무서운 신예 류현진. 끊어진 인대도 그의 각오는 막을 수 없었다. 시리즈 내내 5경기에 등판해 10.1이닝을 투구하며 2승 1세이브 1홀드로 팀의 한국시리즈 우승까지 완성시켰다.
그렇게 끊어져버린 인대와 너무 늦었던 수술 타이밍은 그를 긴 재활의 터널 속으로 밀어 넣었다. 2007시즌을 통째로 날리며 재활에 매진했지만 2008시즌 복귀 후 그에게 남은 것은 10km남짓 감소한 평범한 구속뿐이었다. 그렇게 그의 전성기도 끝나는 듯 했다.
꾸준히 1군 무대에서 모습을 드러냈지만 모두의 기대에 부응하는 모습은 아니었다. 설상가상으로 2009시즌에는 1승 12패를 기록하며 다패왕에 올랐다. 본인 스스로도 은퇴를 생각할 정도였다. 그토록 강했던 가을야구에서도 더 이상 예전의 배영수는 없었다.(수술 이전 PS 71이닝 16자책 2.03 / 수술 이후 PS 32이닝 22자책 6.19) 그렇게 무대를 휘어잡던 스타는 사라지는 듯했다.
#124승
2006년 겨울 팔꿈치 인대 접합 수술(토미존 수술)을 하기 전까지 7시즌 동안 배영수는 4번의 10승 시즌을 기록했다. 25세의 나이로 68승이라는 빠른 페이스를 기록하며 우완 투수 최다승 기록 보유자인 정민철의 기록을 경신할 유력한 후보로도 점쳐졌다.
하지만 부상은 생각보다 그에게서 많은 것을 빠르게 빼앗아갔다. 타자들을 압도하던 구속은 평범한 수준으로 떨어져 버렸다. 더 이상 그가 등판하는 경기는 팀의 승리를 의미하지 않았다. 선발투수보다 경기 중간에 나가는 횟수가 점점 늘어났다.
불 같은 강속구는 그의 커리어를 재료로 썼던 것일까. 2008년 이후 황금기를 맞은 KBO리그의 중심에 더 이상 배영수라는 이름은 없었다. 그렇게 처음으로 떨어져 본 바닥에서 그는 버티고 또 버텼다.
전성기 시절 직구와 슬라이더만으로 리그를 지배했던 모습에서 벗어나 기교파 투수로의 변신을 꾀했다. 써클 체인지업, 투심, 너클볼 등 예전이라면 생각해 보지도 않았을 않았을 다양한 구종에 대한 시도를 거듭했다.
그렇게 버티던 중, 부상 복귀 이후 처음으로 2012시즌에 두 자릿수 승수를 기록했다. 이 때를 기점으로 배영수는 ‘썩 괜찮은 한 명의 선발투수’로 복귀한다. 차근차근 승수를 쌓아 가며, 결국 2014시즌 9이닝 120구 완투승으로 본인의 프로 통산 120승을 장식했다.
그리고 개인통산 두 번째 FA를 앞둔 2014시즌을 통산 124승으로 마무리하며 팀의 레전드이자 선배 김시진과 어깨를 나란히 했다. 본인의 선수생활을 바친 팀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자신의 이름을 올리며 성공적인 선수인생 제 2막을 써내려 가는 듯 했다.
#이적
배영수 본인 스스로도 인터뷰마다 “참 굴곡진 선수생활이었다”고 말하곤 했다. 하지만 재기에 성공한 왕년의 에이스를 야구의 신은 가만히 놔두지 않았다. 2014시즌 전무후무한 4년 연속 통합우승 후, 삼성은 주축 선수들과의 FA 계약을 앞두고 있었다.
이전과 같은 독보적인 에이스는 아니었지만, 4년 연속 통합 우승기간 동안 10.44(팀 내 4위)의 sWAR을 기록하며 어느 정도 준수한 활약을 했다. 하지만 같은 협상 테이블에 앉은 안지만(10.73)과 윤성환(15.76)보다는 기여도가 적은 것 또한 사실이었다.
이 둘과의 협상이 우선이 되어야 함은 팀의 입장에서 당연한 처사였고 실제로 협상 우선순위에서 밀리기도 했다. 안타깝지만 그게 현실이었다. 이제는 주연의 자리가 아닌 조연 역할을 맡아야 했다.
결국 서로 의견 차를 좁히지 못한 결과는 타팀 이적이었고, 그 해 겨울 2+1년 계약에 총액 21억 5천만원에 계약을 맺으며 15년 만에 유니폼을 갈아입었다. 되돌아보면 구단도, 선수도, 팬들도 아쉬워했던 이적의 결과는 명백한 실패였다.
2015년부터 2018년까지 총 4년간 주황색 유니폼을 입고 뛴 배영수의 성적은 처참했다(13승 22패 1홀드 6.07 s WAR -0.46). 선발과 불펜을 오간 첫 시즌부터 꼬였고 2016년은 팔꿈치 뼛조각 재활 수술을 하며 시즌을 통째로 날렸다.
그나마 17시즌에는 친정팀을 상대로 1,081일만의 완투승을 거두는 등 최소한의 자기 역할을 했지만 그게 끝이었다. 2018시즌도 11경기 등판에 그쳤다.
개인의 명예가 실추되는 사건도 있었다. 와인드업 과정에서 부정투구 논란을 겪거나, 공을 유니폼 바지에 문지르는 등의 반칙 행위들이 적발되며 곤욕을 겪었다. 한화 유니폼을 입은 4년은 매우 힘든 시간이었다.
그렇게 삼성을 떠난 4년 동안 또 한번의 부침을 겪은 배영수의 선수생활은 끝이 보이는 듯 했다.
#마무리
은퇴와 선수생활 연장의 기로에서 다소 놀라운 소식이 전해졌다. KBO리그에서 가장 탄탄한 전력을 가진 정규시즌 우승팀 두산 베어스가 배영수를 영입한 것이다. 부진한 2018시즌을 보냈기에 의외라는 반응이 주를 이뤘다.
새로운 팀에서 맞이한 2019시즌도 역시 순탄치 못했다. 잠시나마 선발로 부활했던 한화 시절과 다르게 1년 내내 추격조 역할만을 수행했다. 그 와중에 KBO 최초로 無투구 끝내기 보크라는 불명예스러운 기록마저 떠안았다. 집 떠나면 고생이라는 말처럼 가시밭길 위에서 그렇게 선수생활을 마무리짓는 듯했다.
그런데 한국시리즈 4차전 마지막 순간에 누구도 생각치 못했던 상황이 펼쳐졌다. 시리즈를 끝낼 수 있는 두 점차 리드 상황에서 시즌 내내 추격조로 뛰었던 한 투수가 두산 덕아웃에서 뛰어나왔다. 계산된 투수 운용이라고 보기는 힘들었지만 적어도, 그 중압감이 가득한 상황에서 등판한 투수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밝게 웃으며 등판했다.
하지만 그 웃음은 실소가 아니었다. 보통 팀의 마무리 혹은 에이스가 마무리 지어야 할 한 시즌의 마지막을 장식한 건 배영수였다. 끝내지 못했던 2004년의 등판을, 15년이 지난 후에야 드디어 마무리 할 수 있는 기회를 얻은 순간이었다. 그만큼 소중했고, 기다려온 단 한번이었다.
올라오자마자 4번 박병호를 삼진, 5번 샌즈를 투수 땅볼로 처리하며 2019 KBO리그를 본인의 손으로 마무리지었다. 비록 친정팀은 아니지만 5년 만의 우승 반지와 함께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극적인 마무리로 배영수의 굴곡진 선수생활도 끝이 났다. 이보다 더 좋을 수는 없는 끝맺음이었다.
프로 입단 초기 그는 25세가 되기 전에 팀의 에이스가 되겠다고 다짐하며 등번호 25번을 달았다. 늘 한 번쯤은 본인의 손으로 우승을 확정 지어보고 싶다는 말을 했던 그였다. 전성기에도 해 보지 못한 마무리를 현역 생활의 끝자락에서 이뤄낸 점도 더욱 극적이었다.
프로야구의 침체기 때 전성기를 구가했던 그이기에, 누군가에겐 선발과 불펜을 오가는 평범한 노장으로 기억될 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누군가에게는 푸른 피의 에이스, 팔꿈치를 바쳐 만든 2000~10년대 삼성 왕조의 주인공이자 조력자로, 굴곡진 선수 생활을 잘 견뎌낸 위대한 선수로 기억되기에 충분한 자격이 있지 않을까
에디터 = 야구공작소 송민구
일러스트 = 야구공작소 이찬희
기록 출처 = STATIZ(스탯티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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