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서칭 포 슈가맨’의 주인공 식스토 로드리게즈(사진=Flickr Thomas PLESSIS, CC BY-NC-ND 2.0)
[야구공작소 오상진] ‘원 히트 원더’란 한 앨범(혹은 곡)에서만 성공을 거둔 아티스트를 의미하는 대중음악 용어다. 이 표현은 영화 ‘서칭 포 슈가맨(Searching for Sugar Man)’과 이를 모티브로 한 국내 예능 프로그램 ‘투유 프로젝트: 슈가맨’을 통해 우리에게도 익숙해졌다.
실제로 대중 앞에 나서는 가수들의 대부분은 곡을 히트시키기는커녕 이름조차 알려보지 못하고 사라지게 된다. 이는 프로 스포츠 선수들도 다르지 않다. 무수한 선수들이 스치듯 사라져간 약육강식의 정글 메이저리그, 이 험난한 리그에 잠시나마 본인의 이름을 새겨 놓고 사라진 ‘슈가맨’들을 찾아보았다.
신인왕 타이틀만 남긴 ‘원 이어 원더(One Year Wonder)’
140년 역사의 메이저리그에서 한 시즌을 화려하게 불태우고 사라진 선수는 드물지 않다. 그러나 그 활약이 신인왕 수상까지 이어진 경우는 몹시 드물다. ‘신인왕 수상’과 ‘한 시즌 반짝’이라는 키워드를 동시에 만족시키는 선수는 메이저리그 역사에서도 단 두 명뿐. 투수 마크 피드리치와 타자 조 샤르보뉴가 그 주인공이다.
마크 피드리치 메이저리그 통산 기록
1976년 디트로이트 타이거즈에서 데뷔한 ‘더 버드(The Bird)’* 피드리치는 뛰어난 실력과 화려한 쇼맨십으로 많은 팬들의 사랑을 받았다. 그는 데뷔 3번째 경기에서 감기 몸살에 걸린 동료를 대신해 첫 선발 등판 기회를 잡았고, 데뷔 첫 승을 완투승으로 장식했다(9이닝 2피안타 1실점).
* 미국 인기 TV 프로그램 ‘세서미 스트리트(Sesame Street)’의 캐릭터 ‘빅 버드(Big Bird)’를 닮은 외모 때문에 생긴 별명이다.
이 해 피드리치는 선발로 등판한 29경기 가운데 무려 24경기를 완투로 장식했고 4번의 완봉승을 포함해 19승을 거뒀다. 아메리칸리그 다승 4위, 평균자책점 1위(2.34)의 화려한 성적을 뽐내며 신인왕 타이틀도 손에 넣었다(사이영상 2위).
피드리치는 여러 가지 기행으로도 유명세를 탔다. 등판 전에는 마운드에 앉아서 흙을 만지는 자신만의 의식을 치렀고, 공과 대화를 나누는 듯한 행동을 보였으며, 삼진을 잡을 때마다 특유의 화려한 리액션으로 팬들을 흥분시켰다. 완투승을 거두면 마운드 위에서 기쁨을 온몸으로 표현했고 홈 팬들과 일일이 악수를 하기도 했다. 피드리치는 이처럼 개성 넘치는 캐릭터와 뛰어난 실력으로 단숨에 디트로이트의 인기 스타로 떠올랐다.
그러나 화려한 순간은 잠시뿐이었다. 이듬해 스프링 트레이닝에서 피드리치는 무릎 연골이 찢어지는 부상을 당했고, 얼마 뒤에는 혹사의 여파로 데드 암 증상이 찾아왔다. 데뷔 시즌에만 250.1이닝을 소화했던 그는 이어진 4시즌 동안 단 162이닝만을 투구하고 마운드를 떠났다. 피드리치는 2009년 불의의 사고로 유명을 달리해 야구팬들을 안타깝게 했다.
조 샤르보뉴 메이저리그 통산 기록
1980년 아메리칸리그 신인왕 샤르보뉴는 데뷔 시즌부터 클리블랜드 인디언스의 주전 외야수로 나서 타율 0.289, 23홈런 87타점의 뛰어난 성적을 거뒀다. 샤르보뉴는 당해 신인 최고 타율(0.321)을 기록한 데이브 스테이플튼(보스턴 레드삭스), 15승과 2점대 평균자책점(2.84)의 주인공 브릿 번스(시카고 화이트삭스) 등의 쟁쟁한 경쟁자들을 제치고 신인왕을 거머쥐는 영예를 누렸다.
논란 속에서 신인왕을 수상한 탓이었을까? 이듬해 스프링 트레이닝에서 샤르보뉴는 헤드 퍼스트 슬라이딩 도중 허리를 다쳤다. 시즌이 끝난 뒤 수술을 받고 재기를 노렸지만 1년 뒤에도 상황은 나아지지 않았다. 샤르보뉴는 이어진 두 시즌 동안 단 70경기밖에 소화하지 못했고, 경기에 나서는 동안에도 2할을 간신히 넘는 수준(0.211)의 타율을 기록하는 데 그쳤다. 결국 그는 신인왕 수상자 가운데 가장 짧은 3년의 선수 생활을 끝으로 유니폼을 벗었다.
단 한 경기의 임팩트 ‘원 게임 원더(One Game Wonder)’
메이저리그 역사상 단 23명밖에 달성하지 못한 퍼펙트 게임. ‘신의 선물’이라 불리는 이 기록을 달성한 투수들의 명단은 이름만 들어도 알 만한 위대한 투수들이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이들은 세 자릿수의 통산 승수를 거뒀고, 10년 이상 꾸준한 활약을 펼친 ‘달성할 만했던 선수들’이다.
그러나 성공적인 커리어를 보내지 못했음에도 단 한 경기에서만큼은 ‘완벽한’ 모습을 보여준 선수들이 있다. 바로 댈러스 브레이든과 필립 험버다.
댈러스 브레이든 메이저리그 통산 기록
메이저리그 역대 19번째 퍼펙트 게임의 주인공 브레이든은 2007년 오클랜드 애슬레틱스에서 데뷔해 단 5시즌을 빅리그에서 활약하고 사라진 투수다. 2010년 한 시즌만 10승 고지를 밟았을 뿐, 나머지 시즌에는 이렇다 할 활약이 없었다.
브레이든의 퍼펙트 게임은 기록 자체보다도 비하인드 스토리가 더 인상적인 경기였다. 고교 시절 피부암으로 어머니를 여의고 할머니 밑에서 자란 브레이든은 2010년 5월 9일, ‘어머니의 날(Mother’s Day)’ 열린 탬파베이 레이스와의 경기에서 대기록을 수립해냈다. 여기에 그해 4월 벌인 최고의 타자 알렉스 로드리게스와의 설전까지 더해지면서 브레이든은 단숨에 리그의 이슈메이커로 떠올랐다.
댈러스 브레이든(사진=Flickr Keith Allison, CC BY-SA 2.0)
브레이든은 2010시즌을 선발투수로 활약하며 11승과 3.50의 평균자책점을 기록했다. 하지만 커리어 하이 시즌을 보낸 바로 다음 해, 브레이든은 단 3경기를 소화한 뒤 왼쪽 어깨에 수술을 받으며 시즌을 마감하고 말았다. 마이너리그 시절 이미 한 차례 어깨에 수술을 받았던 이력 탓인지 재활은 쉽지 않았다. 결국 재활에 실패한 브레이든은 2014년 1월 은퇴를 선택했다.
필립 험버 메이저리그 통산 기록
역대 21번째 퍼펙트 게임 달성자인 험버는 2015년 KBO 리그 KIA 타이거즈 소속으로 국내 팬들에게도 잘 알려진 투수다. 하지만 두 자릿수 승리를 거두며 주목 받은 시절이 있었던 브레이든과 달리, 한 시즌 최다 승수가 9승에 불과했을 정도로 눈에 띄지 않는 빅리그 경력을 보유한 선수였다.
본래 험버는 2004년 아마추어 드래프트에서 전체 3순위로 지명 받은 상당한 유망주였다(1순위 맷 부시, 2순위 저스틴 벌랜더). 그러나 팔꿈치 수술을 받으면서 기대만큼 성장하지 못했고, 2006년 메이저리그에 첫 선을 보이기는 했지만 이후로도 꾸준히 마이너리그를 오갔다. 험버는 2011년 4번째 빅리그 소속팀인 시카고 화이트삭스에서 마침내 선발진에 합류할 기회를 잡았고, 이 해 28경기(선발 26경기)에 나서 9승 9패 평균자책점 3.75를 기록하면서 데뷔 후 가장 인상적인 시즌을 보냈다.
다음해 본격적으로 선발진에 합류한 험버는 시즌 두 번째 등판인 4월 21일 시카고 화이트삭스전에서 ‘큰일’을 저질렀다. 빅리그에서 완투는 물론 한 경기 8이닝도 소화해본 적이 없던 그가 단 96구로 퍼펙트 게임이라는 대기록의 주인공이 되어버린 것이다.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던 퍼펙트 게임을 달성한 험버는 미국에서 가장 유명한 토크쇼인 ‘데이비드 레터맨 쇼’에도 출연하면서 갑작스런 ‘스타덤’에 올랐다.
화이트삭스 시절 필립 험버(사진=Flickr Keith Allison, CC BY-SA 2.0)
하지만 험버는 퍼펙트 게임 이후 3경기에서 5이닝 9실점, 6이닝 6볼넷 3실점, 2.1이닝 8실점으로 크게 흔들리면서 한껏 높아진 팬들의 기대를 채우지 못했다. 부진이 이어지자 시즌 중반부터는 불펜으로 보직이 바뀌었고, 결국 시즌을 마친 뒤 웨이버로 팀을 떠나게 되었다. 험버는 0승 8패 평균자책점 7.90의 끔찍한 성적을 기록한 2013년을 마지막으로 빅리그 무대를 더 이상 밟지 못했다. KBO 리그에서마저 이렇다 할 인상을 남기지 못한 그는 2016년 메이저리그 개막 로스터 탈락을 통보 받은 뒤 은퇴를 선언했다.
‘플루크’는 끄덕, ‘원 히트 원더’는 글쎄
메이저리그의 ‘원 히트 원더’를 다루는 글에 단골처럼 등장하는 선수로는 브래디 앤더슨과 루이스 곤잘레스가 있다. 플루크 시즌의 상징적인 타자인 두 선수는 커리어에서 단 한 시즌씩만 50홈런 고지를 밟았다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앤더슨 1996년 50홈런, 곤잘레스 2001년 57홈런).
브래디 앤더슨 메이저리그 통산 기록
그러나 이들은 리그를 대표하는 거포는 아니었어도 ‘원 히트 원더’라기에는 지나치게 화려한 경력을 지닌 선수들이었다. 앤더슨은 논란의 1996년을 제외하면 한 시즌 최다 홈런이 24개에 불과한 타자였다. 하지만 그는 원래부터 타율보다 1할 가까이 높은 출루율과 15홈런, 25도루를 평균적으로 기록했던 ‘호타준족’의 1번 타자였다.
볼티모어 레전드 브래디 앤더슨(사진=Flickr Keith Allison, CC BY-SA 2.0)
앤더슨은 빅리그에서 15시즌을 활약하며 통산 210홈런 315도루, 올스타 3회, 20-20 클럽 3회 등의 화려한 업적을 남겼다. 9년 연속 두 자릿수 홈런, 13년 연속 두 자릿수 도루를 기록하며 꾸준하고 견실한 활약을 펼쳤던 그에게 ‘원 히트 원더’는 다소 억울한 꼬리표일 듯하다.
루이스 곤잘레스 메이저리그 통산 기록
김병현의 옛 동료로 잘 알려진 곤잘레스에게도 앤더슨과 비슷한 꼬리표가 따라붙어 있다. 2001년을 제외하면 30홈런 이상을 기록한 시즌이 한 시즌뿐이고(2000년 31홈런), 커리어 하이 시즌을 보낸 뒤 다시는 30홈런의 벽을 넘지 못했다. 2001년에는 갑자기 57홈런을 때려내며 메이저리그 전체 홈런 3위에 올랐는데, 공교롭게도 이 해 1위는 배리 본즈(73홈런), 2위는 새미 소사(64홈런)였다. 이들은 모두 훗날 약물 복용 사실이 드러난 선수들이고 곤잘레스 역시 약물 의혹에서 완전히 자유롭지는 못했다(물론 정황 증거만 있을 뿐 적발된 적은 없다).
하지만 곤잘레스의 커리어는 앤더슨보다도 화려하다. 곤잘레스는 19시즌 동안 빅리그에서 활약하면서 2591안타와 354홈런을 기록했고, 올스타 5회, 실버 슬러거 1회를 석권하며 명예의 전당 후보로도 이름을 올렸다. 그의 등번호인 20번은 2010년 애리조나 다이아몬드백스 구단 최초의 영구 결번으로 지정되었다. 이처럼 곤잘레스 역시 ‘플루크’라면 몰라도 ‘원 히트 원더’와는 어울리지 않는 선수였다. 만약 그 ‘원 히트 원더’가 2001년 월드시리즈 7차전 끝내기 역전 안타의 ‘기적’을 가리키는 표현이 아니라면 말이다.
2007년 콜로라도 대학교에서 발표한 한 연구에 따르면 메이저리그 선수들의 평균 선수 수명은 약 5.6년이었다. 1902년부터 1993년 사이 총 5989명이 빅리그 생활을 시작했는데, 이들은 합계 3만 3272년을 빅리그 무대에서 살아남는 데 그쳤다. 이 가운데 빅리그에서 5년 이상을 살아남은 선수의 비율은 절반도 되지 않았다.
이처럼 대부분의 메이저리거들은 빅리그 데뷔라는 꿈을 이루고도 이름 한번 알리지 못한 채로 빠르게 사라져버리고 만다. 이 혹독한 생존 경쟁에서 ‘원 히트 원더’로나마 리그 역사에 이름을 남겼다면 그 자체로 충분히 성공적인 커리어 아니었을까.
기록 출처: Baseball Reference
에디터=야구공작소 이의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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