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구공작소 박기태] 9월 16일(이하 한국 시간), 직전 22경기에서 전승을 거둔 클리블랜드 인디언스는 지구 라이벌 캔자스시티 로열스에게 패배하면서 연승 행진을 마감하고 말았다. 이 연승 기간 동안 클리블랜드의 불펜에는 거대한 구멍이 뚫려 있었다. 마무리급 중간 계투로 유명한 클리블랜드의 간판 투수 앤드류 밀러가 8월 23일부터 부상자 명단에 올라 있었기 때문이다. 밀러는 연승이 끝날 즈음인 9월 15일이 되어서야 빅리그 로스터에 복귀할 수 있었다. 다행히도 클리블랜드는 이 기간 동안 최고의 성적을 올렸고, 위기가 될 수 있었던 밀러의 부상 이탈은 어느새 비용 없는 휴식으로 탈바꿈했다.
밀러의 이 ‘공짜 휴식’은 클리블랜드의 포스트시즌 행보에 커다란 호재로 작용할 것으로 보인다. 지난 시즌 클리블랜드는 시즌 중반 영입한 밀러를 앞세워 성공적인 포스트시즌을 보냈지만, 이번 시즌에는 이렇다할 불펜 보강을 이뤄내지 못했다. 후반기 들어 밀러가 자리를 비웠을 때도 그 빈자리를 채운 것은 기존 승리조 요원인 브라이언 쇼였다. 쇼를 비롯한 기존의 다른 불펜투수들에게서 밀러만큼의 위압감을 기대하기는 어려운 만큼, 건강한 밀러의 존재가 클리블랜드의 불펜 야구 성패에 차지하는 비중은 절대적일 수밖에 없다.
클리블랜드의 절대적 믿을맨, 앤드류 밀러(사진=Wikimedia Commons, CC BY 2.0)
지난 여름 불펜투수 시장에서 승리를 거둔 팀이 밀러를 데려간 클리블랜드였다면, 올 여름 불펜 보강 경쟁에서 승자로 떠오른 팀은 밀러가 그전까지 몸을 담았던 뉴욕 양키스였다. 시카고 화이트삭스로부터 영입해 온 토미 케인리와 데이비드 로버슨 덕분이다. 그간 양키스와 화이트삭스를 거치면서 줄곧 마무리로 활약해왔던 로버슨은 이적 후 7회와 8회를 가리지 않고 승리를 지키기 위해 나서는 밀러와 같은 역할을 소화해내고 있다.
시즌 중에 불펜 강화를 도모했던 팀들은 내셔널리그에도 있었다. 전반기 내내 확실한 마무리를 확보하지 못해 고생했던 워싱턴 내셔널스가 대표적이다. 불안하기 그지없었던 워싱턴의 불펜 사정은 7월 중 오클랜드 애슬레틱스에서 좌완 션 두리틀과 우완 라이언 매드슨을, 미네소타 트윈스에서 우완 브랜든 킨츨러를 데려오면서 180도 달라졌다. 전반기 동안 88경기에서 14개의 블론 세이브를 기록했던 워싱턴의 불펜은 경기 후반부를 완벽하게 지배한 세 선수의 활약에 힘입어 리그 최고 수준의 철벽으로 탈바꿈했다. 워싱턴의 불펜투수들이 후반기 들어 허용한 블론 세이브의 개수는 단 2개에 불과하다.
이처럼 근래 포스트시즌을 노리는 강팀은 막강한 불펜진을 구축하기 위해 심혈을 기울이고 있다. 이는 점점 줄어들고 있는 선발투수의 역할과도 맥락을 같이한다. 메이저리그의 시즌별 완투 경기수는 지난 시즌 역대 최초의 두 자릿수인 83경기로 줄어들었고, 하락세가 더욱 뚜렷해진 올해는 58경기까지 떨어지면서 거듭해서 최소 기록을 경신할 준비를 마쳤다. 그렇다고 선발투수들의 투구수 자체가 급격하게 줄어든 것은 아니다. 대부분의 선발투수들은 여전히 경기마다 90구 이상의 공을 던진다. 막강한 불펜을 등에 업은 워싱턴, 양키스, 클리블랜드 세 팀의 선발투수들도 예외는 아니다.
불펜 조기 투입의 대명사 다저스, 그러나 ‘믿을맨’이 없다
물론 유난히 빠른 시점에 선발투수를 교체하는 팀들도 있다. 선발 교통정리 문제로 시즌 내내 고민을 이어가고 있는 LA 다저스가 대표적이다. 사실, 경기당 소화 이닝만 보면 다저스 선발투수들의 교체 시점도 그리 유별나게 이른 수준은 아니다. 다저스의 선발투수들은 등판마다 평균 5.5이닝을 소화했는데, 이는 워싱턴(6.0이닝)에 비하면 확실히 적지만 양키스(5.6이닝)와는 크게 차이가 나지 않는 기록이다.
허나 투구수를 기준으로 했을 때의 격차는 훨씬 뚜렷하다. 워싱턴의 선발투수들은 평균적으로 100구를, 클리블랜드의 선발투수들은 94구를, 양키스의 선발투수들은 91구를 투구하고 마운드를 내려왔다. 반면 다저스의 선발투수들은 87구만을 투구한 다음 불펜투수와 교체되어 나왔다. 이는 메이저리그 전체에서도 마이애미 말린스에 이어 2번째로 적은 수치다.
이처럼 극단적인 조기 교체 전략을 성공적으로 활용하기 위해서는 질적으로도 양적으로도 흠잡을 데가 없는 불펜 자원을 보유하고 있어야 한다. 전반기 동안의 다저스는 이 조건을 훌륭하게 만족시키는 팀이었다. 전반기의 불펜 평균자책점은 내셔널리그 1위에 해당하는 2.99였고, 선발진이 제 역할을 해준 덕에 불펜투수들의 소화 이닝도 그리 많지 않았다. 그러나 후반기의 다저스 불펜은 눈에 띄게 페이스가 떨어져 있는 상태다. 전반기에 비해 1 이상이 상승한 4.07의 평균자책점은 내셔널리그에서 6위, 리그 전체에서도 14위에 불과한 성적이다.
다저스의 불펜진이 마주하고 있는 문제는 단순한 페이스의 저하만이 아니다. 보다 핵심적인 문제는 ‘믿을맨’ 역할을 맡아줄 투수의 부재다. 팀의 마무리인 켄리 잰슨은 분명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 메이저리그 최고의 마무리 투수다. 그러나 선발투수와 잰슨 사이의 이닝을 책임지는 투수들 가운데서는 압도적인 얼굴을 찾아보기가 어렵다. 리그의 다른 강팀들은 공통적으로 이 사이를 책임져줄 확실한 투수들을 보유하고 있다. 클리블랜드에는 밀러가 있고, 워싱턴에는 킨츨러와 매드슨이 있다. 양키스에는 케인리와 로버슨, 거기에 채드 그린과 델린 베탄시스까지 압도적인 불펜투수들이 즐비하다. 그러나 다저스에는 그런 투수가 부족하다.
현재 다저스의 불펜에서 접전 상황에 호출되고 있는 투수는 브랜든 모로우, 페드로 바에즈, 토니 왓슨 세 명이다. 그러나 이들 중 확실하게 안정감을 주는 투수는 모로우뿐이다. 최근 바에즈는 6.14에 달하는 후반기 평균자책점으로 요약할 수 있는 선수이고, 왓슨은 무난할 뿐 압도적이지 못하다.
물론 류현진을 비롯한 마에다 겐타, 알렉스 우드 등의 하위 선발투수들이 불펜에서 기용된다면 사정이 조금 달라질지도 모른다. 그러나 세 선수가 불펜으로 이동한다고 해서 확실한 개선이 이뤄질지는 미지수다. 류현진은 후반기 늘어난 볼넷과 건강에 대한 우려가, 마에다는 피홈런이, 우드는 떨어진 구위가 각각 발목을 잡고 있다.
의외의 ‘믿을맨’ 후보 토니 싱그라니
그런데 이토록 절실한 다저스의 새 ‘믿을맨’은 어쩌면 이미 품 안에 들어와 있는지도 모른다. 이적생 토니 싱그라니가 그 유력한 후보이기 때문이다. 이적 당시만 해도 싱그라니는 그리 큰 기대를 받은 영입 대상이 아니었다. 그 무렵 세간의 이목을 모은 것은 다르빗슈 유나 소니 그레이 같은 클레이튼 커쇼를 받쳐줄 ‘1선발급 2선발’들의 영입 여부였고, 불펜투수 중에서는 피츠버그 파이리츠에서 마무리로 활약했던 왓슨의 영입이 그나마 많은 주목을 받았다.
전 소속팀인 신시내티 레즈에서 기록했던 성적 또한 기대를 모으기에는 턱없이 빈약한 수준이었다. 데뷔 시즌인 2013년에는 선발 유망주로 두각을 드러냈지만 다음해인 2014년 바로 한계를 드러냈고, 2015년부터는 불펜으로 보직을 변경했다. 그러나 투구의 80%가 패스트볼로 이루어진 ‘원 패턴’ 피칭 탓에 불펜으로도 순식간에 한계에 부딪히고 말았다. 올 시즌 역시 트레이드 전까지 25경기에 나와 23.1이닝을 투구하면서 5.40의 평균자책점을 기록한 것이 전부였다.
신시내티 시절의 토니 싱그라니(사진=Wikimedia Commons, CC BY SA 2.0)
하지만 이적 후 만난 다저스의 분석팀은 그에게 새로운 변화를 제안했다. 올 시즌 들어 새롭게 장착한 스플리터를 더 많이 활용하라는 이야기는 나오지 않았다. 대신 분석팀은 시속 94마일이 넘는 패스트볼의 비중을 줄이고, 올해 거의 활용하지 않았던 슬라이더를 더 자주 던질 것을 권했다. 이와 동시에 패스트볼을 던질 때는 높은 코스를 보다 빈번하게 공략해야 함을 강조했다. 메이저리그를 유심히 지켜봤던 팬이라면 낯설지 않을 ‘하이 패스트볼’ 전략이다.
새로운 투구 전략을 탑재한 다저스에서의 싱그라니는 현격하게 달라진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평균자책점은 3.00로 크게 눈에 띄지 않지만 삼진과 볼넷의 비율이나 피안타율 같은 세부 지표들은 실로 압도적인 수준이다. 9이닝당 탈삼진은 13개까지 늘어났고, 반대로 피안타율은 0.206까지 줄어들었다. 8월 이후의 FIP(수비 무관 평균자책점) 순위에서도 싱그라니는 리그 전체 불펜투수들 가운데 7위에 올라 있다(15이닝 이상 기준).
싱그라니 이전에도 다저스에서는 그랜트 데이튼, 조시 필즈 등이 하이 패스트볼 전략을 통해 효과를 보고 있었다. 탬파베이 레이스가 첫 선을 보인 이 전략은 근래에는 다저스에 의해 적극적으로 활용되고 있다. 심지어 클레이튼 커쇼마저도 이전보다 훨씬 높아진 빈도로 하이 패스트볼을 구사하는 중이다. 아직 활약한 기간이 길지는 않지만, 싱그라니 역시 이 전략의 수혜자로 거듭날 가능성을 내비치고 있다.
만약 싱그라니의 성공적인 변신이 계속된다면 다저스는 후반기의 불펜 불안을 해결할 새로운 ‘믿을맨’을 손에 넣을 수 있을 것이다. 과연 다저스와 싱그라니는 이어질 포스트시즌에서 불펜 야구 시대의 또다른 성공 사례로 자리매김할 수 있을까.
기록 참조: Baseball Reference, Fangraph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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