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속에 묻힐 구장, 새로운 방식으로 기억하기
< 일러스트 = 야구공작소 이동헌 >
마음속에 묻힌, 그리고 묻힐 야구장
1984년 가을, 하나의 한국시리즈가 세 개의 야구장에 나뉘어 치러졌다. 대구시민운동장 야구장에서 두 경기, 부산 구덕야구장에서 두 경기, 그리고 나머지는 중립 구장이던 서울종합운동장 야구장에서 열렸다. 최동원이 혼자 4승을 따내며 롯데에 창단 첫 우승을 안긴, 그 가을의 전설이다.
< 1984년 한국시리즈 7차전 8회말, 최동원과 한문연의 하이파이브. 이 사진은 다음 해인 1985년 한국프로야구 연감 표지를 장식했다. >
42년이 지난 지금, 그 세 야구장 중 둘은 더 이상 그때의 모습이 아니다. 구덕야구장은 2017년 철거됐다. 그 자리엔 게이트볼장과 다목적 구장이 있는 생활체육공원이 들어섰다. 대구시민운동장 야구장은 통째로 사라지지는 않았다. 그러나 삼성이 2016년 대구 삼성 라이온즈 파크로 이동한 뒤 1루석과 3루석, 외야석이 헐렸고, 지금은 사회인 야구팀과 유소년팀이 쓰는 축소된 아마추어 구장으로 남아 있다.
처음 있는 일이 아니었고, 이들만 있는 것도 아니다. 쌍방울 레이더스와 함께한 전주종합경기장 야구장은 구단 해체 이후 마스코트 인형탈 하나만 남아 오랜 기간 방치되다가 2023년 철거되었다. 그 부지에는 ‘전주 시민의 숲 1963’이라는 이름으로 시립미술관과 전시관이 들어설 예정이다. 조금 더 거슬러 올라가면 인천 야구의 역사를 함께한 숭의야구장은 2008년, 개장 74년 만에 철거되어 지금은 K리그 인천 유나이티드 FC가 홈구장으로 그 자리를 쓰고 있다. 한국 아마추어 야구의 성지이자 프로야구의 역사가 태동한 동대문야구장 역시 2007년 헐렸고 그 터에는 동대문디자인플라자(DDP)가 세워졌다.
그리고 곧, 가을의 전설을 함께한 마지막 한 경기장이 우리의 곁을 떠난다.
서울종합운동장 야구장, 이하 잠실 야구장은 이번 시즌을 끝으로 철거된다. 1980년 착공해 1982년 7월 완공된 이 구장의 첫 대형 무대는 프로야구가 아니었다. 같은 해 9월 세계야구선수권대회 결승, 김재박의 개구리 번트와 한대화의 역전 쓰리런이 나온 그 경기가 잠실의 개장을 알렸다. 그로부터 44년, 그리고 가을의 전설로부터 42년. 그 마지막은 2026년 12월로 예정되어 있고 같은 부지에는 2031년 한국 프로야구 역사상 최대 규모의 돔구장이 들어설 계획이다.
마음속에 묻힌 야구장을 기억하는 법
우리는 흔히 이런 마음속에 묻힌 야구장을 사진과 영상, 그리고 남겨진 몇 점의 시설물로 기억하곤 한다. 동대문운동장이 철거될 때 남은 것은 관람석 의자와 사진과 영상뿐이었다. 그것들은 지금 DDP 안 동대문운동장기념관 유리장 속에 들어가 있다. 잠실 야구장의 계획도 다르지 않다. 서울시는 돔구장 안에 기념관을 두어 잠실의 추억과 기록을 보존하겠다고 밝혔다.
어떤 야구장은 유물조차 없다. 전주종합경기장 야구장처럼 너무 오래 방치되어 예전의 성세를 찾아보기 힘들었던 경우도 있고, 구덕야구장처럼 남아 있는 설비가 아예 없는 경우도 있다. 이런 야구장을 마음속에 묻은 팬들은 오로지 사진과 방송 영상으로만 자신의 추억을 되짚어야 한다. 사진첩, 그리고 있다면 몇 점의 유물. 우리는 지금까지 같은 방식으로만 기억을 정리해왔다.
메이저리그에서도 이는 비슷했다. 2009년 철거된 옛 양키 스타디움, “루스가 지은 집”이라 불리던 그곳 역시 체계적인 기록 없이 사라졌다. 메이저리그에서 가장 상징적이었던 구장 중 하나였지만 지금 남은 건 팬들이 찍은 사진과 영상, 그리고 그 부지에 지어진 ‘헤리티지 필드’라는 이름의 간이 야구장뿐이다.
그런데 잠실에는, 사진이나 전시물로는 부족한 기록이 하나 있다.
2000년 5월 4일, 김동주는 롯데 에밀리아노 기론을 상대로 잠실 야구장 최초의 장외홈런을 쳤다. 좌우 100m에 중앙 125m, 외야 관중석의 경사마저 가파른 잠실에서 장외홈런은 사실상 불가능의 영역이었다. 1983년 이후 그날 전까지 공식 기록은 한 번도 없었다. 비거리는 150m로 기록됐다. 두산은 공이 떨어진 중앙출입구 앞 거리에 가로·세로·두께 각 60cm의 기념 동판을 세웠다. 사진도 영상도 아닌, 자리 그 자체를 남긴 셈이다.
< 잠실 야구장에 있는 김동주의 장외홈런 기념 동판. 올 시즌 종료 후 철거 예정이다. >
새로 지어질 돔구장에서는 장외홈런이라는 개념 자체가 성립하지 않는다. 김동주의 150m는 잠실에서만 가능했고, 잠실이 사라지면 다시는 갱신되지 않을 기록이다. 먼 훗날 당신이 아이의 손을 잡고 옛 잠실 야구장 자리에 서서 “이쯤에 김동주의 공이 떨어졌는데”라고 말한다면, 그 ‘이쯤’은 결국 과거의 잠실이 아니라 새로 지어진 돔구장을 향한 흐릿한 손짓에 그칠 것이다. 사진 한 장으로는 자리를 물려줄 수 없다. 우리가 지금까지 남겨온 건 야구장의 이미지였지, 야구장의 자리 그 자체는 아니었다.
마음속에 묻힐 야구장을 기억할 새로운 방법
잠실이 앞선 사례들과 다른 점은 지금 우리에게는 그 좌표를 땅이 아닌 데이터로 옮겨 놓을 기술이 있고, 이미 그렇게 한 선례도 있다는 것이다.
2021년, 국립현대미술관의 전시 세 개가 3D 스캔을 거쳐 웹 VR 콘텐츠로 남았다. 철거되는 건물이 아니라, 전시 기간이 끝나면 해체되는 전시 공간을 기록한 작업이었다. 지난해에는 재개발을 앞둔 남산 밀레니엄 힐튼호텔이 같은 방식으로 기록됐다. 이지스자산운용이 ‘서울 힐튼 디지털 아카이빙 프로젝트’라는 이름으로 진행한 사업으로 철거 전 호텔 내외부와 로비, 주요 건축 요소를 스캔해 원천 데이터를 확보했다. 두 작업 모두 테크캡슐이라는 공간 콘텐츠 기업이 맡았다.
< 서울 힐튼호텔 디지털 3D 스캔 >
힐튼 프로젝트에는 한 가지 더 눈여겨볼 대목이 있다. 3D 스캔만 한 것이 아니라 재개발 건물 안에 기존 로비의 아트리움과 기둥, 계단을 살린 ‘헤리티지 아트리움’을 함께 조성했다. 디지털 기록과 물리적 보존을 양자택일로 두지 않았다는 뜻이다.
잠실에도 같은 방식이 가능하다. 돔구장 안에 들어설 기념관에서 유물을 보존하는 것에 더해 스캔 데이터를 함께 남길 수 있다. 유리장 안의 의자가 “이런 것이 있었다”를 말한다면 스캔 데이터는 “그것이 정확히 어디에 있었는지”를 말한다. 전시물이 말하지 못하는 것을 데이터는 말할 수 있고 둘은 서로를 대신하지 않는다.
힐튼에서 확보된 고해상도 공간 데이터는 서울시 공공데이터로 기증되어 도시계획과 건축 연구를 위한 개방형 아카이브로 구축된다. 잠실 야구장은 애초에 서울시가 소유한 공공시설이니 기증이라는 절차조차 필요 없을 수 있다.
고궁도 사찰도 아니고 콘크리트와 철골로 지은 다목적 체육 시설일 뿐인데 어째서 그렇게까지 정성을 들여야 하느냐고 물을 수도 있다. 하지만 국가유산청이나 지자체가 지정해주지 않는다고 해서 유산이 아닌 것은 아니다. 유산의 근거는 지정 여부가 아니라 그 공간에 쌓인 기억의 총량이다. 44년 동안 매 시즌 수백만 명이 잠실을 드나들었다. 우승이 확정되던 밤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평일 저녁이었다.
처음 3루 내야석에 앉아 야구를 배운 아이, 야근을 마치고 무료입장으로 외야석에 앉은 회사원, 올드팬을 만나 구단의 역사를 배운 학생. 그 평범한 저녁을 보낸 각자의 자리는 남지 못할 것이다. 지금 남겨두지 않으면 우리 다음 세대는 이 44년을 사진 몇 장과 영상, 유리장 속 의자 하나로만 기억할 것이다.
< 외야석 또는 내야 2층 334 구역 근처에서 찍힌 것으로 보이는 잠실 야구장의 경기 장면 >
가지 않은 길
잠실이 마지막 기회는 아니다. 사직야구장도 이미 재건축 논의가 진행 중이다. 하지만 잠실은 기술과 선례가 모두 갖춰진 상태에서 우리가 처음으로 준비할 수 있는 소멸이다.
당신은 이제 그 좌석에 다시 앉을 수 없다. 대구시민운동장 야구장에도, 구덕야구장에도, 그리고 곧 잠실 야구장에도. 하지만 미래의 팬들에게, 선수들에게 “44년의 역사와 나의 푸르른 시절을 담은 구장이, 정확히 이 자리에 이렇게 있었노라”라고 말해줄 방법은 아직 남아 있다. 다만 여유가 많지는 않다. 남은 시간은 2개월 남짓이다.
지금까지 한국 스포츠 역사에서 아무도 걷지 않은 길이다. 그러나 언젠가, 남들이 가지 않은 이 길을 택했다는 사실 하나가 이후의 많은 것을 바꿔 놓을지도 모른다.
참고자료 = techcapsule.kr, korean.visitseoul.net
야구공작소 표상훈 칼럼니스트
에디터 = 야구공작소 이금강, 장호재
일러스트 = 야구공작소 이동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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