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BO 수비상, 아직 열 번째 자리가 남았다

< 일러스트 = 야구공작소 이재성 >

야구 선수들에게 겨울은 결실의 계절이다. 한 해의 성과가 기록과 수상으로 수확되는 시기이기 때문이다. 야구선수라면 누구나 턱시도를 입고 연말 시상식 단상 위에 올라가는 것을 꿈꾸기 마련이다.

KBO에는 정규시즌의 성과를 기리는 여러 상이 있다. MVP와 신인상, 골든 글러브, 그리고 2023년부터 수비상이 그 대열에 합류했다. 이는 수비력이 좋은 선수의 가치를 인정하며 나아가 리그 전반의 수비 능력 향상을 장려하기 위함이었다. 정규시즌 가장 뛰어난 수비 능력을 발휘한 포지션별 선수 총 9명만이 그 영광을 누린다.

그렇다면 여러 자리를 오가며 팀의 빈틈을 메운 유틸리티 플레이어의 헌신은 무엇으로 보상받아야 할까? 현 제도는 아직 그들을 담아내지 못한다.

 

KBO 수비상 현황

< 표1. 역대 KBO 수비상 수상자 >

표1을 통해 역대 수상자들을 알아보자. 눈에 띄는 부분은 2023시즌 유격수 부문이다. LG 트윈스 오지환이 투표 점수 75점과 수비 기록 점수 12.5점을, KIA 타이거즈 박찬호가 투표 점수 66.67점과 수비 기록 점수 20.83점을 받아 총점 동률로 공동 수상했다.

이후 총점이 같은 경우, 투표 점수 우위 선수가 앞선다는 선정 기준이 새로 추가됐다. 이에 따라 박찬호는 2025시즌 유격수 부문 3회 연속 수상에 실패했다. NC 다이노스 김주원과 같은 총점 90.63점을 기록했으나 투표 점수에서 밀렸기 때문이다. SSG 랜더스 에레디아가 유일하게 3회 연속 좌익수 부문 수상자로 선정되었다.

< 표2. 2025시즌 KBO 수비상 선정 기준 >

포지션별 후보 선정 기준은 표2와 같다. 해당 기준에 따라 2025시즌 투수 108명, 포수 15명, 1루수 10명, 2루수 7명, 3루수 7명, 유격수 8명, 좌익수 6명, 중견수 6명, 우익수 5명의 선수가 부문별 후보로 선정되었다. 투표는 구단당 11명씩 실시하며 투표인단은 자신이 속한 구단의 선수에게는 투표할 수 없다.

수비 기록은 수비율과 레인지 팩터가 반영된 공식기록 점수가 전 포지션에 공통 반영된다. 더불어 투수는 번트 타구 처리 및 견제, 포수는 포수 무관 도루를 제외한 도루저지율과 블로킹률이 반영된다. 또한 내야수와 외야수는 기록되지 않은 호수비와 실책 등을 보정한 조정 KUZR(KBO Ultimate Zone Rating) 점수가 반영된다.

선수가 여러 수비 자리를 오가며 이닝 요건을 채운 경우 가장 많은 이닝을 소화한 포지션의 후보로 귀속된다. 해당 기준에 맹점이 있다. 한 선수가 시즌 내내 여러 포지션을 오가며 헌신했더라도 많은 이닝을 소화했던 하나의 포지션에서 평가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유틸리티 선수들이 평가의 사각지대에 놓이고 있는 것은 아닌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구본혁 사례

현시점 KBO의 대표적인 유틸리티 플레이어는 LG 트윈스 구본혁이다. 그는 2025시즌 내내 다이아몬드 곳곳을 오가며 팀의 통합 우승에 이바지했다. 염경엽 감독도 구본혁의 수비는 리그 톱 클래스라고 생각한다며 인정했다. 그의 수비 활약상을 알아보자.

< 표3. 구본혁은 2025시즌 3루수, 2024시즌 유격수 수비상 후보로 선정되었다. >

올해 구본혁은 3루수로 가장 많이 출전했다. 그다음 유격수와 2루수, 좌익수까지 다양한 포지션을 소화했다. 1루수를 제외한 내야 세 포지션에서 각각 200이닝 이상을 소화한 선수는 구본혁이 유일했다. 놀라운 점은 세 포지션 모두에서 리그 평균을 웃도는 수비 득점 기여도를 기록하며 어디에 세워도 손색없는 수비 안정감을 보였다.

아이러니하게도, 올해 구본혁이 유격수로 단 두 경기 더 풀타임 소화했다면 유격수 수비상 경쟁을 했을 것이다. 3루수와 유격수 두 포지션 수비 이닝 차이는 고작 13.2이닝이었기 때문이다.

물론 한 자리에서 1,000이 넘는 수비 이닝을 기록한 선수들의 헌신을 가볍게 여기는 건 아니다. 그러나 세 포지션을 오가며 800이닝 이상 버텨낸 선수의 헌신 역시 다른 잣대로 평가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 이러한 인식에 대해 MLB는 이미 ‘유틸리티 골든 글러브’라는 해답을 제시했다.

 

MLB 유틸리티 골든 글러브

MLB 유틸리티 골든 글러브는 2022년에 신설되었다. 기존 골든 글러브 대비 선수의 멀티 포지션 소화 능력을 인정하며 다재다능한 수비수들이 따로 평가받게 된 것이다. 국내 팬들에게는 김하성이 2023시즌 샌디에이고 파드리스 소속으로 수상하면서 널리 알려진 바 있다.

정말 좋은 생각입니다, 그들 없이는 이길 수 없어요.” 2022시즌 중 유틸리티 골든 글러브 신설 소식을 전해 들은 후 당시 뉴욕 메츠 감독 벅 쇼월터는 이렇게 답했다. 벤치에서 매일 포지션을 옮겨 뛰는 선수들의 가치를 현장이 어떻게 인식하고 있는지 보여준 말이었다.

MLB 골든 글러브 수상은 감독과 코치의 투표를 75%, SABR(미국야구연구협회) 수비 지수를 25% 반영해 결정된다. 유틸리티 부문의 경우 롤링스와 SABR이 협업한 해당 역할에 특화된 별도의 수비 공식을 적용한다. 하지만 유틸리티 부문 후보가 되기 위해 몇 이닝 이상, 몇 개의 포지션에서 뛰어야 하는지 명확히 공개된 자료는 없다.

< 표4. 역대 MLB 유틸리티 골든 글러브 수상자 >

올해 내셔널리그 수상자 마이애미 말린스의 하비에르 사노하는 7개 포지션을 소화한 메이저리거 10명 중 한 명이었다. 그가 맡지 않은 포지션은 우익수와 포수뿐이었다. 감독이 사노하에게 다른 포지션을 맡겨도 되겠냐고 물을 때마다 그의 대답은 항상 ‘Yes‘였다. 팀을 위해 그라운드에 나서는 게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 표5. 사노하의 2025시즌 수비 지표 >

사노하는 여섯 개의 포지션에서 각각 70이닝 이상 소화하며 팀의 수비를 도왔다. 한편, 올해 KBO 수비상 후보 중 가장 많은 포지션을 소화했던 선수는 NC 다이노스의 권희동이었다. 그 역시 다섯 개 포지션(좌익수, 중견수, 우익수, 포수, 1루)을 오가며 팀의 공백을 메웠지만, 사노하처럼 내야와 외야 전역을 아우른 사례는 아직 국내 리그에서는 드물다.

 

마무리하며

KBO의 수비상은 현대 야구의 수비력 가치를 조명했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다만 여전히 포지션별 구분 안에 머물러 있다. 야구계에서 ‘유틸리티 플레이어’는 언제나 헌신, 적응력, 다재다능함의 상징이다. 이들은 여전히 슈퍼스타로 평가되지 않지만, 강팀이 되기 위해 필수 불가결한 존재다. 노고에 대한 보상이 필요하다. KBO 수비상, 아직 열 번째 자리가 남았다. 그리고 그 자리는 유틸리티 플레이어의 것이다.

 

참조 = STATIZ, KBO, MLB

야구공작소 김용환 칼럼니스트

에디터 = 야구공작소 도상현, 장호재

일러스트 = 야구공작소 이재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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