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일러스트 = 야구공작소 안혜원 >
토론토 블루제이스와 텍사스 레인저스의 2015 아메리칸 리그 디비전 시리즈 5차전, 7회 말 3-3 동점 상황에서 타석에 들어선 선수는 호세 바티스타였다. 주자 1, 3루의 역전 찬스, 바티스타가 배트를 휘둘렀고 공은 그대로 담장을 벗어났다. 토론토의 시리즈 승리에 쐐기를 박는 역전 3점 홈런이었다.
이 홈런이 더 주목받은 이유는 바티스타의 ‘배트 플립’ 때문이었다. 맞는 순간 홈런을 직감한 바티스타는 스윙 후 배트를 텍사스 덕아웃 방향으로 집어 던졌다. 메이저리그 역사상 최고의 배트 플립이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그리고 단순한 퍼포먼스를 넘어, 이전까지 메이저리그를 옥죄던 낡은 관습에 변화의 바람이 불기 시작한 순간이었다.
불문율로서 배트 플립
메이저리그에서 배트 플립은 오랜 기간 ‘불문율’로서 인식되어 왔다. 배트 플립은 상대 투수를 존중하지 않는 행위였으며 예의에서 벗어난 행동이었다. 심지어 타자가 홈런 타구를 오랜 시간 지켜보는 것조차 투수를 자극하는 행위로 여기며 금기시했다.
배트 플립을 한 타자들은 다음 타석에서 보복을 당하기 마련이었다. 그날 경기에 기회가 오지 않으면 그다음 경기에서 빈볼을 맞았다. 배트 플립을 한 타자가 몸에 공을 맞는 것은 당연한 이치였다. 빈볼을 맞은 타자가 마운드로 달려오면서 종종 벤치클리어링이 발생하곤 했다.
이렇게 배트 플립이 금기시되는 문화는 미국만이 가지고 있는 독특한 관습이었다. 라틴 아메리카에서 야구는 ‘흥’을 바탕으로 한 감정 표현이 자유롭다. 배트 플립도 하나의 ‘흥’으로 취급받는다. 한국에서도 배트 플립은 하나의 볼거리에 불과하다. 유독 미국만이 과도한 감정 표현에 민감하게 반응하고 있었다.
이러한 ‘미국식 야구관’은 오랜 기간 메이저리그를 지배해 왔다. 미국이 세계의 중심으로 떠오르고 메이저리그가 탄생한 20세기 초부터 말이다. 미국이 정한 방식이 언제나 옳은 것이었고 이러한 뿌리 깊은 관습을 바꾸기는 쉽지 않았다.
이 규칙에서 벗어나는 행동을 하는 사람들은 비난의 대상이 되었다. 실제로 이안 킨슬러와 아담 존스는 라틴계 선수들이 야구를 지나치게 즐기는 모습을 보고 올바른 경기 방식에 대한 존중을 보이지 않는 나쁜 롤모델이라고 발언했다. 이렇듯 미국 사회가 점점 다양해지고 가치관이 변화하는 과정에서도 야구만은 여전히 과거에 묶여 있었다.
< 2015 ALDS 5차전 호세 바티스타의 배트 플립 >
변화의 시작
2015년 10월 14일. 바티스타의 역사적인 배트 플립이 등장한 날짜다. 이 배트 플립이 단순히 ‘멋있는 배트 플립’ 이상의 가치를 가지는 것은 오랜 시간 메이저리그를 지배했던 불문율에 변화의 바람을 불러오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바티스타의 배트 플립이 엄청난 화제를 불러온 후 이를 옹호하는 여러 목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마커스 스트로먼은 바티스타가 홈런을 때린 뒤 배트를 훨씬 더 멀리 던졌어야 했다며, 메이저리그의 보수적인 측면을 바꿀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여기에 브라이스 하퍼는 자신의 감정을 표현조차 못 하는 야구는 지루하며, 다른 스포츠에서는 다 할 수 있는 것을 메이저리그에서만 못한다고 불만을 내비쳤다.
시대가 변하면서 젊은 세대는 개성을 중시하고 자신의 감정을 내비치는데 거리낌이 없어졌다. 그리고 이들이 빅리그에 진출해 주축 선수로 성장하면서 메이저리그 대다수를 이루게 되었다. 그렇기에 배트 플립을 옹호하는 흐름은 어쩌면 시대의 변화에 따른 자연스러운 현상이었다.
여기에 라틴계 선수들이 점점 늘어나는 상황에서 미국만의 오래된 관습을 고집하는 것은 시대에 역행하는 행위였다. 이에 대해 바티스타는 미국과 야구는 다양한 문화와 배경을 가진 사람들이 모인 거대한 용광로와 같고, 그렇기에 모두가 똑같이 행동하기를 기대하는 것은 욕심이라고 말했다. 동시에 진정한 존중은 서로의 문화 차이를 인정하고 포용하는 데서 나온다고 의견을 밝혔다.
물론 바티스타의 배트 플립 직후 배트 플립이 온전한 하나의 문화로 바로 받아들여지진 않았다. 당시에는 여전히 배트 플립을 했다는 이유로 보복구를 맞고 벤치클리어링이 벌어지는 일이 발생했다. 하지만 이전까지 쌓여왔던 낡은 관습에 대한 불만이 세상 밖으로 나오기 시작했다. 분명 메이저리그는 시대의 흐름에 맞춰 더 재밌어질 필요가 있었다. 이러한 분위기는 점점 강화되어 메이저리그 전체에 변화를 불러오게 된다.
< 페르난도 타티스 주니어의 배트 플립 >
메이저리그 흥행의 열쇠가 된 배트 플립
오늘날의 야구는 화려함과 세레머니로 가득하다. 선수들은 자신이 원하는 방식으로 열정을 표현하는 데 거리낌이 없다. 배트 플립은 기본이고 타구 감상과 포효 등 각종 세레머니가 팬들의 눈을 즐겁게 해준다. 페르난도 타티스 주니어, 로날드 아쿠냐 주니어 등 젊은 스타들은 배트 플립을 통해 자신의 개성을 표현하고 있다. 이제 배트 플립은 젊음의 상징이자 하나의 문화로 자리 잡았다.
이런 변화는 메이저리그에 긍정적인 흐름이다. 사람들이 스포츠에 열광하는 이유는 결국 경기의 뜨거운 에너지다. 배트 플립으로 대표되는 화려한 세레머니와 감정의 표출은 경기의 에너지 레벨을 높이는 데 기여한다. 야구의 인기를 높이는 데 있어 배트 플립이 중요한 역할을 수행할 수 있는 것이다.
실제로 전 세계적인 인기를 끌고 있는 미국 NBA나 유럽 축구를 보면 선수들이 다양하고 화려한 세레머니를 자유롭게 펼치고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스테판 커리의 ‘Night Night’ 세레머니나 크리스티아누 호날두의 ‘Siuuuu’ 세레머니는 선수를 대표하는 것을 넘어 해당 종목 자체를 대표하고 있다. 선수들의 열정적인 감정 표현은 팬들에게 짜릿한 순간을 선물하며 이들을 구단과 선수에 더 몰입하게 만든다.
야구 역시 배트 플립과 같은 화려한 볼거리가 늘어난다면 경기의 재미를 높여 사람들을 불러 모을 수 있다. 특히 자극적인 볼거리를 추구하는 젊은 팬들이 늘어날 가능성이 높아진다. 하나의 스포츠 종목이 젊은 팬들을 확보하는 것은 중요하다. 결국 이들이 미래의 잠재적인 소비층이자 오랜 서포터로 성장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감정 표현이 제한되어 비교적 조용한 분위기의 메이저리그는 젊은 팬들의 관심을 받지 못했다. 낡은 관습에 억눌린 메이저리그는 점점 쇠퇴하고 있었다. 실제로 2016년까지 메이저리그 TV 시청자의 평균 연령은 57세였고, 18세 미만 시청자의 비율은 7%에 불과했다. 57세의 평균 연령은 미국 4대 프로스포츠인 MLB, NFL (50세), NHL (49세), NBA (42세) 중 가장 높았다. 새로운 젊은 층 유입이 없는 한 메이저리그를 시청하는 평균 연령은 점점 높아질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배트 플립을 중심으로 여러 변화가 나타난 후 죽어가던 메이저리그가 다시 살아나고 있다. 2024년 기준으로 18~35세 티켓 구매자 비율은 5년 사이 8.5% 증가했고, 티켓 구매자의 평균 연령은 5살이 감소하여 46세까지 내려왔다. 또한 메이저리그 관련 사이트에 새로 생성된 계정의 평균 연령 역시 2019년 43.4세에서 2024년 36.2세로 감소했다. 메이저리그가 젊은 팬들에게 매력적으로 다가오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 메이저리그 연도별 총 관중 수 >
여기에 피치 클락 도입, 베이스 크기 확대 등 여러 규칙 변화가 더해지면서 메이저리그 전체 흥행도 상승세를 보이고 있다. 2024년 메이저리그의 총 관중 수는 71,348,366명으로 지난 7년 중 가장 많은 관중 수를 달성했다. 또한 MLB.TV의 총 시청 시간은 145억 분을 기록하여 전년에 달성했던 127억 분을 넘어 새로운 최고치를 경신했다.
이제 배트 플립은 메이저리그 부흥의 열쇠다. 사무국도 이를 알고 적극적인 홍보 활동을 통해 배트 플립을 장려하고 있다. 이제는 메이저리그 공식 유튜브에서 역대 최고의 배트 플립을 소개하는 각종 영상도 찾아볼 수 있다. 배트 플립 장면을 모은 각종 숏폼 영상이 제작되고 있고 사람들은 이에 환호하고 있다. 불문율로서 금지되던 배트 플립은 어느새 사람들이 야구를 보는 하나의 이유가 되어있었다.
마치며
우리가 야구를 보는 근본적인 이유는 무엇일까? 각종 고민과 쌓여 있는 업무 속에서 잠깐의 휴식과 즐거움을 얻기 위해서다. 사람들은 야구를 통해 재미를 느끼고 스트레스를 해소하길 원한다.
그렇기에 팬들에게 야구는 결국 ‘오락’으로서 기능해야 한다. 하지만 메이저리그의 각종 불문율은 선수들의 자유로운 감정 표현을 제한하여 야구의 재미를 반감시켜 왔다. 결국 재미를 느끼지 못하는 사람들은 야구를 점점 떠날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점에서 배트 플립이 하나의 세레머니로 자리 잡은 현재의 흐름은 매우 바람직하다. 선수들이 경기를 즐기기 시작하면서 야구가 더 활발해지고 역동적으로 변하고 있다. 배트 플립은 사람들에게 화려한 볼거리를 제공하여 야구의 순수한 ‘즐거움’을 높이고 있다.
이제는 배트 플립을 넘어 다른 형태의 세레머니도 어렵지 않게 확인할 수 있다. 덕아웃에서는 각 팀만의 고유 세레머니를 만들거나 특정 분장을 하고 사진을 찍기도 한다. 투수도 위기 상황에서 삼진을 잡은 뒤 포효하며 감정을 마음껏 표출한다. 몇몇 선수들은 자신만의 루틴을 만들기도 한다. 후안 소토의 ‘소토 셔플’, 재즈 치즘 주니어의 ‘유로 스텝’ 등은 사람들의 눈을 즐겁게 해주고 있다. 야구의 인기를 더 높이기 위해서는 이러한 다양한 세레머니들이 앞으로도 더 장려되어야 한다.
이제 메이저리그는 낡은 관습을 깨고 앞으로 나아가고 있다. 더 이상 배트 플립은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닌 모두의 방식이 공존할 수 있는 하나의 문화가 되었다. 바티스타의 배트 플립으로부터 시작된 변화의 바람이 메이저리그를 더 나은 방향으로 향하게 해준 것은 분명하다. 자유를 찾은 메이저리그가 앞으로 어디까지 날아오를 수 있을지 기대된다.
참고 = Jays Journal, Remezcla, The Players’ Tribune, USA Today, ESPN, The New York Times, Market Watch, MLB.com, AP News
야구공작소 김태현 칼럼니스트
에디터 = 야구공작소 도상현, 장호재
일러스트 = 야구공작소 안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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