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 똑같은 야구는 없다 – ③ 만약 야구 경기가 세트제가 된다면 (바나나볼 둘러보기 2화)

 < 일러스트 = 야구공작소 최희진 >

“세상에 똑같은 야구는 없다” 시리즈는 야구의 형태를 가졌지만 우리에게 낯선 규칙을 도입한 세계의 여러 야구를 살펴봅니다.

재미, 안전, 공정함 등 다양한 목적을 위해 생겨난 규칙을 알아보고 야구라는 스포츠가 앞으로 어떻게 발전할 수 있을지 가능성을 살펴봅니다.

지난 화에 이어 세상에 똑같은 야구는 없다 3화에서는 미국의 독립야구이자 우리에게 예능야구로 알려진 “바나나볼”의 독특한 규칙을 알아본다. 바나나볼은 팬에게 더 많은 즐거움과 짜릿함을 선사하기 위해 야구 규칙의 일부를 변형해 경기를 치른다. 지난 시간에는 2024년부터 도입되는, 경기당 단 한 번 타자 한 명이 타순을 무시하고 타석에 나설 수 있는 황금타자 규칙에 대해 알아봤다. 그러면 바나나볼은 이외에 어떤 규칙을 사용하고 있을까?

 

허투루 낭비되는 이닝이 없다

야구에서 어떤 경기는 팽팽한 상태가 경기 막판까지 이어지지만, 어떤 경기는 그렇지 않다. 특히 경기 초반 빅 이닝이 여러 번 나와 점수 차가 크게 벌어지면 지는 팀의 감독은 사실상 패배를 인정하고 주전 선수에게 휴식을 주거나 패전처리 투수를 올려 경기를 마무리하려 한다. 자연스럽게 경기의 흐름은 잔잔해진다.

그러나 바나나볼에서는 경기 초반 어느 한 팀이 다득점을 기록하더라도 경기 막판까지 긴장을 늦출 수 없다. 왜냐하면 여기서는 단순히 다득점으로 승패가 나뉘지 않기 때문이다. 바나나볼은 국제양궁연맹(FITA)이 “경기 끝까지 박진감을 이어가기 위해”라는 목적으로 2010년 양궁에 세트제를 도입한 것처럼 야구에 다득점제가 아닌 세트제를 도입했다. “모든 이닝이 중요하다(Every inning counts)”라는 모토 아래 바나나볼은 허투루 버려지는 이닝이 없게 만들었다.

바나나볼의 1회부터 8회까지는 그 이닝에 더 많은 득점을 올린 팀이 이닝을 따내고 포인트를 획득한다. 만약 1회가 3-2로 초공팀이 리드한 채 끝났다면, 초공팀에게 1포인트가 주어진다. 동점이면 어느 팀도 포인트를 얻지 못한다. 2회는 초공팀이 1포인트, 말공팀이 0포인트인 상태에서 점수판은 다시 0-0으로 돌아간다. 즉, 두 팀은 8회까지 이닝마다 승패를 가르며, 후공팀은 해당 이닝에서 실점하지 않았다면 곧바로 끝내기 찬스를 얻는다. 이로 인해 바나나볼을 관람하는 팬은 매 이닝 끝내기 찬스를 마주할 수 있다.  

한편 마지막 9회는 득점이 승패와 직결되는 방식으로 돌아간다. 소위 ‘찐막’ 찬스로 9회에 기록한 모든 득점이 포인트로 환산된다. 극단적으로 1회부터 8회까지 모든 이닝(세트)을 내줘 세트 스코어 0:8로 밀렸더라도 9회를 9점 차 이상으로 이기면 경기에서 승리한다.

< 바나나볼의 중계 화면. 하단에 주자 상황, 득점과 포인트, 경기 잔여 시간이 표시된다. >

 

허투루 낭비되는 투구도 없다

바나나볼에서 볼 수 있는 또 다른 독특한 규칙은 볼 하나의 기회비용이 일반 야구보다 높다는 것이다. 여기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 하나는 바나나볼에서는 수비팀이 볼넷을 내줬을 때 해야 하는 특별한 벌칙이 있기 때문이고, 다른 하나는 타자가 언제든지 1루를 훔칠 수 있기 때문이다.

먼저 볼넷에 대해 보자. 우리는 당연하게도 볼넷은 곧 한 베이스라고 알고 있다. 그러나 사실 타자주자는 1루에서 멈추지 않고 여러 베이스를 도전할 수 있다. 볼넷은 볼데드 상황이 아니므로 타자주자가 위험을 무릅쓰고 1루 이상의 베이스를 노려도 되기 때문이다. 즉, 우리가 보는 일반 야구에서 타자주자가 볼넷을 얻고 1루에 머무는 것은 안전하게 살아있기 위한 것이다. 

그러나 바나나볼에서는 볼넷이 나오는 순간 경기장 내 모든 선수가 바빠진다. 바나나볼 규칙 6에 따르면 투수가 볼넷을 허용하면 수비팀은 투수와 포수를 제외한 모든 야수가 한 번씩 공을 만져야만 다음 플레이를 할 수 있다. 이 의무를 다하기 전에는 타자와 주자를 잡아낼 수 없으며 타자와 주자는 더 많은 베이스를 확보하기 위해 볼넷이 나오자마자 달리기 시작한다. 이로 인해 바나나볼에서 볼넷은 보통 2개 베이스로 이어지며 루상의 주자들은 볼넷을 틈타 득점에 성공한다.

 

< 바나나볼에서의 볼넷 상황. 수비팀은 타자주자의 2루 진루를 막기 위해 2루 근처에서 공을 돌린다 >

다음 규칙으로 넘어가자. 공식야구규칙에서 타자가 1루에 도달할 방법은 안타, 볼넷, 실책, 야수선택, 사구, 낫아웃, 타격방해, 주루방해 총 8가지다. (공식야구규칙 5.05, 6.01(h)(1)) 바나나볼은 여기에 타자가 언제든지 위험을 무릅쓰고 1루 도루를 할 수 있다는 조항을 추가한다. (바나나볼 규칙 5) 극단적으로 투수가 던지자마자 타자가 곧바로 1루를 훔치러 달릴 수도 있다.

물론 단순히 공이 조금 빠진 정도로 타자가 1루를 훔치기는 어렵다. 쉽게 생각하면 낫아웃 상황에서 1루에서 세이프가 될 정도로 공이 빠져야 하는데 알다시피 이런 경우가 그리 많지는 않다. 따라서 바나나볼 타자들도 폭투나 포일이 나와도 불리한 카운트에 몰리지 않는 이상 1루로 달리기보다는 타격을 선호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규칙의 존재로 인해 포수는 주자가 없는 경우에도 투수의 공 하나하나를 허투루 놓쳐서는 안 된다. 타자가 절대 칠 수 없는 공에도 출루할 수 있기 때문이다.

 

커지는 인기, 제도권의 관심으로 이어지다

이외에도 바나나볼에는 2시간 제한, 타석 벗어나기 금지, 번트 금지 등의 규칙이 더 있다. 바나나볼의 모든 규칙은 짧은 시간에 액션으로 가득 찬 야구를 추구하겠다는 바나나볼의 철학적 접근이 깔려 있다. 마운드 위에서 기행으로 타자를 현혹하거나 득점한 팀에서 단체 군무를 하는 것을 제외하더라도 허투루 사라지는 이닝과 투구를 배제해 관람객에게 끊임없이 긴장감과 볼거리를 선사하는 것이다.

그런 이유로 바나나볼의 인기는 식을 줄 모르게 성장하고 있다. 원하는 날짜의 바나나볼 경기를 관람하기란 매우 어렵다. 바나나볼 표를 사기 위해서는 1년 전에 추첨 명단에 등록해야 하며, 당첨된 소수의 사람만 표를 살 기회를 얻는다. 필자도 2024년 바나나볼을 보기 위해 추첨 명단에 등록했지만 기회라도 얻을 수 있을지 자신이 없다.

바나나볼의 공식 티켓 가격은 경기마다 표 가격이 달라지는 메이저리그와 달리 고정 가격제다. 세후 일반석이 35달러, 고급석(바나나볼은 이를 Very Important Bananas라 부른다)이 100달러로 일반석이 메이저리그에서 가장 싼 자리보다는 비싸지만, 메이저리그 티켓 평균보다는 싸다. 하지만 바나나볼의 높은 인기로 인해 스텁헙(StubHub)을 비롯한 재판매 사이트에서 바나나볼 경기 티켓은 수백 달러에 거래되고 있다. 

인기가 커짐에 따라 미국의 주류 야구계에서도 바나나볼을 주목하고 있다. 2023년 메이저리그 은퇴선수협회(MLBPAA)는 사바나 바나나스와 세 차례 경기를 치렀다. 시즌 40세이브를 세 차례나 기록한 투수 히스 벨, 실버슬러거 출신인 커티스 그랜더슨 등이 경기에 참여해 바나나볼의 빠른 속도를 경험했다. 2023년 9월에는 뉴욕주 쿠퍼스타운에 세워진 미국 야구 명예의 전당 박물관에서 바나나볼 특별 전시가 열렸으며, 사바나 바나나스는 2023년 마지막 월드 투어 경기를 쿠퍼스타운에서 치렀다.

< 미국 야구 명예의 전당 박물관에 전시된 바나나볼 (촬영자 = 야구공작소 오연우) >

2024년 바나나볼은 사상 처음으로 메이저리그 구장에서 경기를 치를 예정이다. 3월 9일 휴스턴의 미닛 메이드 파크를 방문하는 것을 시작으로 보스턴의 펜웨이 파크, 워싱턴 DC의 내셔널스 파크, 클리블랜드의 프로그레시브 필드, 필라델피아의 시티즌스 뱅크 파크, 마이애미의 론디포 파크에서 차례로 바나나볼을 전파할 예정이다.

이제 우리는 바나나볼을 단순한 예능 야구로 과소평가해서는 안 된다. 지금까지는 색다른 규칙과 화려한 볼거리를 바탕으로 팬들의 관심과 집중을 모아왔다면 이제는 미국 제도권 야구계에서도 주목하기 때문이다.

혹시 모른다. 야구의 흥미 진작과 시간 단축을 위해 노력하는 메이저리그 사무국이 미래에 바나나볼의 규칙의 일부를 실험해 볼지도. 필자는 몇몇 바나나볼 규칙에서 그런 가능성을 기대하고 있다.   

 

참고 = Savannah Bananas, USA Today, Statista, NY Post.

야구공작소 이금강 칼럼니스트

에디터 = 야구공작소 오연우

일러스트 = 야구공작소 최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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