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 똑같은 야구는 없다 – ② 황금타자역전만루홈런 (바나나볼 둘러보기 1화)

< 일러스트 = 야구공작소 최희진 >

“세상에 똑같은 야구는 없다.” 시리즈는 야구의 형태를 가졌지만 우리에게 낯선 규칙을 도입한 세계의 여러 야구를 살펴봅니다.

재미, 안전, 공정함 등 다양한 목적을 위해 생겨난 규칙을 알아보고 야구라는 스포츠가 앞으로 어떻게 발전할 수 있을지 가능성을 살펴봅니다.

2023년 6월 16일 대전에서 열린 키움과 한화의 경기. 9회말 2아웃 만루에 2:2 동점인 상황에서 한화 2번타자 정은원이 타석에 들어선다. 다음 타자는 2023년 시즌 한화의 최고 타자 노시환. 하지만 끝내기 찬스에서 정은원은 풀카운트 끝에 투수 원종현을 상대로 삼진을 당하고 만다.

하지만 이런 상상을 해보자. 만약 타석에 해당 경기 시점까지 OPS가 .590인 2번타자 정은원이 아니라 .894를 기록했던 3번타자 노시환이 있었다면 어땠을까? 타격에 자신 있는 노시환은 자신에게 마지막 기회가 오길 바라지 않았을까? 그리고 정은원에게는 미안하지만, 노시환이 타자일 때 한화가 짜릿한 끝내기 승리를 얻을 가능성이 더 크지 않았을까?

안타깝게도 공식야구규칙에 따르면 정은원 타석에 노시환이 들어가 타격할 수는 없다. 좀 더 정확하게 말하면 노시환은 타석에 들어설 수는 있다. 하지만 노시환은 부정위타자기 때문에, 수비 측에서 타격 전에 어필하면 정은원이 타석으로 돌아와야 한다. 만약 노시환이 타격을 완료한 후 수비팀이 다음 타자에게 투구하거나 다른 플레이를 하기 전에 주심에게 부정위타자를 어필한다면 정위타자인 정은원에게 아웃이 부여되며, 노시환의 타격 결과는 무효가 된다. 만약 정은원이 부정위타자 문제로 아웃을 선고받으면 10회 말 공격의 선두타자는 정위타자의 다음 타순인 노시환이 된다. (공식야구규칙 6.03(b))

그러나 어떤 야구에서는 2024년부터 이런 상황을 마주했을 때 정당하게 정은원 대신 노시환이 타석에 들어와 타격할 수 있다. 이번 글과 다음 글에 걸쳐서 소개할, 우리나라에도 이제 제법 유명해진 미국의 독립야구, “바나나볼”에서다.

 

바나나볼은 지루함을 용납하지 않는다.

< 야구 실력보다는 춤으로 더 유명한 스기야 켄시(杉谷 拳士). 바나나볼에서도 자신의 특기인 여우춤을 추며 타석에 올라섰다. >

바나나볼은 미국 조지아주 사바나에서 활동하는 독립야구 팀 사바나 바나나스(Savannah Bananas)가 만든 ‘특별한’ 야구이다. 바나나볼은 2018년 빠른 경기 진행과 쉬지 않는 야구를 추구하며 만들어졌다. 코로나19 위기가 한창인 2020년 6월 26일에 첫 공식 경기가 열렸으며, 이후 소셜네트워크를 통해 빠른 속도로 인기를 끌었다. 바나나볼은 바나나스와 이 팀의 영원한 ‘라이벌’이자 파트너인 사바나 파티 애니멀스(Savannah Party Animals)의 경기가 주를 이룬다. 

현재 미국에서 바나나볼의 입지는 막강하다. 소셜네트워크 팔로워 숫자는 메이저리그 구단에 비견될 정도이며, 직관 표를 구하기 위해서는 아주 낮은 확률의 추첨을 뚫어야만 한다. 높은 인기 덕분에 2024년에는 휴스턴, 보스턴, 필라델피아 등 메이저리그 6개 구장과 다수의 AAA 구장에서 경기를 펼칠 예정이다. 

우리나라에서 바나나볼은 선수와 심판이 경기장 위에서 춤을 추거나 온갖 기행을 펼치는 예능야구로 알려졌다. 사실 맞는 말이다. 그림자 분신술, 가제트 만능 팔다리, 혹은 게임에서나 볼 수 있었던 불타오르는 투구 등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바나나볼을 단순하게 팬들을 웃기기 위한 야구로만 봐서는 안 된다. 바나나볼은 독특한 규칙을 추가해 경기의 긴장감과 역동성을 증폭시켰다. 거기에 여기서만 볼 수 있는 다양한 새로운 규칙들은 야구를 더욱 풍부하게 하고 즐거움을 가미할 가능성이 있다.  

바나나볼 역시 야구이기에 규칙의 기초는 메이저리그가 사용하는 Official Baseball Rules(OBR)이다. 그러나 아래에서 언급할 규칙을 포함해 11개의 특수한 규칙이 있으며, 이들은 모두 OBR에 우선한다. 예를 들어 바나나볼에서는 번트가 불가능하며, 번트를 댄 타자는 자동 퇴장이다. 오늘 소개할 규칙 외 다른 규칙에 대해서는 다음에 발행될 바나나볼 둘러보기 2회에서 다룰 예정이다.

 

황금타자 납시오

2023년 10월 5일, 바나나볼은 2024년 투어 장소를 발표하는 자리에서 바나나볼의 11번째이자 새로운 규칙을 발표한다. “황금타자 규칙(Golden Batter Rule)”로 불리는 이 규칙에 따르면, 바나나볼에서는 경기당 단 한 번, 라인업에 올라있는 타자 한 명을 타순을 무시하고 투입할 수 있다. 즉, 공격팀이 절호의 기회를 마주했을 때 팀에서 타격이 가장 강한 타자를 내세울 수 있을 것이다. 바나나볼 해설진은 “2023년 WBC 결승전에서 9회초 2사, 세계 최고의 투수 오타니 쇼헤이와 최고의 타자 마이크 트라웃이 맞붙은 상황이 바나나볼에서는 매 경기 벌어질 수 있다”며 이 규칙은 팬들에게 최고의 경험을 선사하기 위해 탄생했다고 설명했다.

< 황금타자 규칙을 발표하는 사바나 바나나스의 구단주 제시 콜(Jesse Cole) >

서두에 언급한 사례로 돌아가 보자. 만약 KBO에서 황금타자를 사용할 수 있다면, 9회 말 2사 만루 2번타자 정은원의 타석이나 전 타석인 1사 만루 이원석 타석에서 팀에서 가장 위협적인 타자 노시환이 끝내기 안타를 치기 위해 타석에 들어설 수 있다.

 

1번타자 2번타자 3번타자 4번타자
고양이 원숭이 호랑이 코끼리

황금타자 규칙을 세 가지 측면에서 더 자세히 살펴보자. 첫째, 황금타자 다음 타석은 누가 들어서게 될까? 1번타자 고양이 자리에 3번타자 호랑이가 황금타자로 들어와 타격을 마친다면, 다음에 타격하는 타자는 2번타자 원숭이이다. 즉, 황금타자 규칙은 기존 정위타자의 타석을 대신하는 것으로 간주한다.

둘째, 만약 황금타자가 출루한 상태에서 황금타자의 원래 타순이 돌아온다면 어떻게 될까? 예를 들어서 1번타자 고양이 자리에 3번타자 호랑이가 황금타자로 나서서 출루한다면, 2번타자 원숭이 타석 후에 3번타자 호랑이가 다시 타석에 들어서야 한다. 3번타자의 타석이 돌아왔을 때 호랑이가 여전히 주자로 남아있다면 1번타자인 고양이가 호랑이 대신 주자가 된다. 황금타자로 바로 전에 타격을 마쳤던 호랑이는 자신의 원 타석인 3번타자가 되어 다시 타격한다.   

마지막으로, 황금타자 규칙을 활용해 특정 타자가 연속으로 타석에 들어설 수 있을까? 답은 예이다. 3번타자 호랑이가 1번타자 고양이 자리가 아니라 2번타자 원숭이 타순에 황금타자로 들어왔더라도, 자신의 원래 순서인 3번타자 타석에 들어올 수 있다. 반대로 호랑이가 3번타순에서 정상적으로 타격을 마친 후 4번타자 코끼리 타석에 황금타자 규칙을 통해 다시 타석에 들어가는 것 또한 가능하다.  

 

황금타자가 만병통치제는 아니지만

황금타자 규칙은 2024년 바나나볼에서 처음 도입되기에, 이 규칙이 타자에게 유리할지, 투수에게 유리할지 아직은 확인할 수 없다. 심증으로는 잃을 것이 없는 타자가 점수를 내주지 않아야 한다는 부담감 속에 등판한 투수보다 유리할 것처럼 보이지만, 야구란 결과가 나오기 전까지는 예단할 수 없는 스포츠다.

물론 야구를 즐겨 보는 독자분들께서는 황금타자가 등장한다고 해서 이것이 무조건 점수로 이어지지 않는다는 걸 이해할 것이다. 아무리 잘 치는 타자라고 해도 타율은 4할을 넘지 못하며, 10할 이상의 OPS를 기록하는 타자 또한 손에 꼽을 정도로 적다. 반대로 이야기하면 타자가 안타를 못 칠 확률 혹은 하나 이상의 베이스를 확보하지 못할 확률이 훨씬 더 높다.

그런데도 황금타자 규칙은 팽팽한 경기의 긴장감과 득점 혹은 무실점의 짜릿함을 몇 배로 끌어 올릴 것이다. 양 팀 모두에게 절체절명의 상황에서 팬들은 공격팀의 최고 타자와 수비팀의 최고 투수가 맞붙는 장면을 매 경기 확정적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지금은 안타깝게 고인이 된 가수 달빛요정역전만루홈런의 노래 “달빛요정역전만루홈런”에는 다음과 같은 가사가 있다.

9회말 주자만루 투아웃 투쓰리 풀카운트. 나에게 주어진 마지막 기회가 온거야. 오늘을 기다렸어 지금이 바로 그때

혹시 모른다. 황금타자가 내려와서는 9회말 2사 풀카운트에서 역전 만루홈런을 쳐 3점차로 끌려가던 경기를 뒤집어버릴지. 야구란 끝날 때까지 끝난 것이 아니니까.

 

야구공작소 이금강 칼럼니스트

에디터 = 야구공작소 민경훈

일러스트 = 야구공작소 최희진

ⓒ야구공작소. 출처 표기 없는 무단 전재 및 재배포를 금합니다. 상업적 사용은 별도 문의 바랍니다.

1 Comment

댓글 남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