범가너의 몰락, 그리고 데이터 친화적인 선수의 가치

< 사진 출처 = medium.com >

이제 야구에서 데이터가 중요하다는 건 굳이 더 언급할 필요 없는 ‘상식’이다. 메이저리그 프런트에는 이미 수많은 데이터 전문가가 고용돼 있다. 한국 프로야구 역시 조금씩 관련 인력이 늘어나는 중이다. 그리고 이러한 데이터를 ‘어떻게’ 활용하느냐가 무엇보다 중요한 구단 운영 전략이 됐다.

야구계가 데이터를 사용하는 목적은 결국 필드 위 선수들을 위해서다. 하지만 정작 이를 실질적으로 이용해야 하는 선수들은 데이터와 친숙하지 않은 경우가 많다. 

물론 데이터 활용이 선수 실력 향상에 무조건 도움이 된다는 보장은 없다. 실제로 탑클래스 선수들 가운데 숫자로 야구를 평가하려는 것에 부정적으로 반응하는 선수들도 제법 있다.

야구만 잘해준다면 문제없다. 다만 데이터 활용 거부가 커리어의 하락으로 이어지는 것은 문제가 된다. 구단에서 선수의 발전을 위해 충분히 노력했으나 당사자가 원치 않아 무용지물이 되어버리는 상황을 뜻한다.

대표적인 선수가 ‘매디슨 범가너’다.

 

범가너의 DFA

< 매디슨 범가너 >

범가너는 2010년대를 대표하는 투수 중 한 명이었다. 한때 같은 지구의 사이영상 3회 수상자 클레이튼 커쇼와 라이벌로 비견될 정도였다. 특히 포스트시즌에서 엄청난 활약을 펼치며 ‘빅 게임 피처’로도 명성을 날렸다.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에서 10여년간 활약했으며 2020년 애리조나 다이아몬드백스로 소속팀을 옮겼다. 5년 8,500만 달러라는 제법 큰 규모의 계약이었고 애리조나 구단 역시 그에게 기대를 걸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범가너는 이와 같은 기대에 전혀 부응하지 못했다. 이미 샌프란시스코 시절 후반부터 하락한 구속은 애리조나로 넘어온 이후 더욱 떨어졌다. 20~22시즌까지 3년 누적 bWAR(baseball reference WAR)이 0.3이었고 단 한 차례도 규정이닝을 채우지 못했다.

그리고 맞이한 2023년. 4경기 동안 ERA 10.26을 기록한 그는 결국 애리조나 구단으로부터 DFA 통보를 받았다. 그간의 성적을 봤을 때 범가너가 DFA 통보를 받은 게 그리 놀라운 일은 아니다. 하지만 이후 언론을 통해 공개된 범가너와 애리조나 구단 간의 뒷이야기는 팬들의 관심을 끌기 충분했다.

디애슬레틱 보도에 따르면 범가너는 구단의 시스템과 마찰이 있었다고 한다. 투수코치 및 분석팀은 더 이상 예전 같지 않은 범가너를 위해 여러 방식을 제안했다. 범가너의 투구 메커니즘, 볼 배합 등 다양한 파트에서 변화를 시도했으나 잘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양측의 신뢰는 완전히 깨져 버렸다.

범가너는 2021년 팀의 피칭 전략가인 댄 해런과 갈등을 빚었다. 이후 2년 동안 둘은 거의 대화를 나누지 않았으며 범가너는 오직 포수들과만 경기 계획을 짰다고 한다. 범가너는 2022년에 새롭게 부임한 투수코치 브렌트 스트롬에 대해 “아마도 내가 본 최초의 올드스쿨과 뉴스쿨의 혼합”이라며 좋은 관계를 맺는 듯 보였다. 하지만 얼마 안 있어 두 사람 사이에도 균열이 생겼고 스트롬 코치는 범가너의 DFA에 대해 “원만한 이혼”이라고 표현했다. (링크)

애리조나 단장 마이크 헤이젠은 “범가너와 계약 맺은 것을 후회하지 않는다.”라고 밝혔다. 다만 “선수를 영입할 때 어떤 기준을 세울지에 대한 더 나은 과정이 필요하다.”고 덧붙였다. 비록 후회하지 않는다고 말했지만, 범가너를 영입할 때 무언가 놓쳤음을 암시하는 발언이다.

 

범가너와는 달리 친 데이터 적 자세로 반등한 사례

범가너와 같이 일찍이 성공을 경험한 사람들은 종종 새로운 변화에 거부감을 드러내는 경우가 있다. 하지만 꼭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다. 앞서 언급한 커쇼만 봐도 그렇다.

커쇼는 리그를 대표하는 투수였지만 2010년대 중반 이후로 지속적인 구속 하락을 겪었다. 결국 2020시즌을 앞두고 커쇼는 드라이브 라인에 방문하기로 했다. 그곳에서의 경험에 대해 매우 긍정적인 평을 남겼고 실제로 패스트볼 구속이 전년도 대비 약 2km/h가 상승하는 효과를 누렸다.

정규시즌 성적도 2019년 ERA 3.03에서 2020년 ERA 2.16으로 더욱 좋아졌다. 게다가 그간 커쇼에게 늘 붙었던 오명인 ‘새가슴’ 딱지 또한 씻어냈다. 2020년 포스트시즌에서 5 경기 동안 ERA 2.93과 함께 4승을 기록하며 팀의 월드시리즈 우승을 이끌었다.  

그 외에도 에릭 크레시가 운영하는 야구 전문 클리닉을 방문하는 등 항상 배움에 열려있는 자세를 보였다. LA 다저스 사장 앤드류 프리드먼은 커쇼가 항상 더 많은 것을 배우려 하고 새로운 장비에 열려있음을 강조했다. 데이브 로버츠 다저스 감독 또한 이미 명예의 전당급 커리어를 쌓았음에도 끊임없이 새로운 것에 적응하는 커쇼에게 칭찬의 메시지를 남겼다. (링크)

미일 프로야구 모두에서 성공적인 커리어를 보유한 다르빗슈 유 역시 마찬가지다. 다르빗슈는 이미 훌륭한 재능을 보유했지만 부상 방지와 구속 상승 등을 위해 체중을 증량했다. (링크1, 링크2) 그 외에도 개인 유튜브 채널에 랩소도를 이용해 새로운 구종을 개발하는 모습과 자신만의 훈련 방식 등을 공유했다.

< 랩소도를 활용하는 다르빗슈 >

MLB 데뷔 시즌이었던 2012시즌 다르빗슈의 패스트볼 평균 스피드는 약 150.5km/h였다. 10년이 지난 뒤 35살이 됐지만 그의 2022시즌 패스트볼 평균 스피드는 약 153km/h로 오히려 2.5km/h 가량 더 늘었다.

국내 선수 가운데는 임찬규가 있다. 임찬규는 휘문고 시절 파이어볼러 유망주로 유명했으나 부상 이후 구속 저하를 겪었다. 그런 임찬규는 2021시즌 패스트볼 평균 스피드가 143.1km/h로 2020시즌의 139km/h에 비해 4km/h 이상 빨라졌다. 그리고 이에 대한 비결로 드라이브 라인 훈련 영상을 보며 따라 연습한 것이 도움이 됐다고 강조했다. (링크)

 

데이터 친화적인 선수의 가치

앞서 언급한 커쇼, 다르빗슈, 임찬규 등은 데이터를 단순히 수동적으로 취한 게 아니다. 본인 스스로가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자세를 보인 사례다. 내가 지금 배우고 있는 대상이 왜 필요한지를 직접 느끼고 행동하는 사람과 그냥 시켜서 하는 사람은 효율이 다르다.  

실제로 자기 주도적 학습과 학업성취도 간의 관계를 정량적으로 분석한 논문도 여럿 있다. 논문에 따르면 중, 고등학교 학습자들은 자기 주도적 학습 비율이 높을수록 학업 성취도가 유의하게 높았다고 한다. (링크)  

이는 곧 구단들이 선수를 평가할 때 또 한 가지 중요한 요소가 될 수 있다. 그간 야구계는 선수가 얼마나 잘 치고 잘 던지는지 등에 집중했다. 하지만 현대 야구에서는 이것 외에도 얼마나 데이터에 열려있는지 역시 고려할 필요가 있다는 의미다. 앞서 헤이젠 단장이 언급한 ‘어떤 기준’이 될 수 있다.

설명의 편의성을 위해 데이터라는 단어를 사용했지만, 꼭 그것만을 의미하는 건 아니다. 데이터뿐만 아니라 결국 ‘새로운 것’에 얼마나 열린 태도를 가졌는지가 핵심이다.

다만 구단 또한 선수가 적극적이기만을 바래서는 안된다. 조금이라도 더 많은 선수가 데이터를 편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환경 조성이 필요하다.

< D-라커를 통해 영상 분석 중인 신영우 >

NC 다이노스는 KBO 구단 가운데 이 분야에서 가장 앞서 있는 팀이다. 선수단 정보시스템인 D-라커(D-Locker)를 통해 각 플레이에 대한 자세한 영상이 업로드된다. 그리고 선수 전원에게 태블릿 PC를 제공해 언제 어디서나 편하게 자기 모습을 확인할 수 있게 만들었다. 창단 초기부터 비슷한 기조를 계속 이어온 덕에 NC는 타 구단에 비해 선수들과 소통이 훨씬 원만하다는 평가가 많다.

혹시나 데이터에 호의적이지 않던 선수라도 인식을 바꿔 협력이 잘 이루어진다면 다행이다. 하지만 생각이 다른 사람을 설득한다는 것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어쩌면 그보다는 그냥 애초에 데이터에 열려 있는, 즉 데이터 친화적인 선수를 데려오는 것이 훨씬 비용이 적게 들 가능성이 높다.

범가너의 사례가 구단들의 반면교사가 될 수 있을지 한번 지켜보자.

 

참고 = MLB.com Theathletics.com, kci.go.kr, 다르빗슈 트위터, NC 다이노스

야구공작소 정세윤 칼럼니스트

에디터 = 야구공작소 곽찬현, 전언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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