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구공작소 양철종] 모 대형 포털사이트 스포츠 뉴스 페이지에서 야구 탭을 들어가 본다. 그리고 시간을 2010년 1월 1일로 돌려본다. 제일 처음 나오는 건 ‘황재균-강정호 몸값이 100억?’이라는 기사다. 당시 히어로즈 소속이던 황재균과 강정호를 데려가려면 100억 원은 줘야 한다는 것이다.
2019년 12월 시점에서 이 기사를 돌아보자. 황재균은 그 해 여름 20억 원과 선수 두 명을 대가로 롯데 유니폼을 입었다. 이후 메이저리그에 진출했다가 4년 88억 원에 KT 위즈 선수가 됐다. 강정호는 2014년 말 500만 2015 달러를 구단에 안기고 미국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그리고 메이저리그 통산 46홈런과 음주운전 등 영욕의 세월을 거치고 있다.
트레이드 불가로 못박은 20대 초반 선수가 트레이드 되고 미국에 진출하고 여러 사건에 휘말리며 어느덧 30대 문턱을 넘긴 시간이 10년이다. 10년이라는 시간 동안 KBO 리그에도 많은 일이 있었다. 2010년대와 이별을 준비하는 지금, 2010년대 KBO 리그에는 무슨 일이 있었는지 돌아본다.
1. 외국인=에이스(2010~)
다승왕 게리 레스가 있어도 두산의 에이스는 박명환이었고, 평균자책점 1위 셰인 바워스가 있어도 현대의 에이스는 정민태였다. 2000년대까지는 그런 시기였다. 팀의 1선발은 한국인 투수였다. 배영수-박명환-손민한 트로이카를 거쳐 류현진-김광현이 지배하던 때도 그랬다.
하지만 2007년 다니엘 리오스-맷 랜들(두산 베어스), 2009년 아킬리노 로페즈-릭 구톰슨(KIA 타이거즈) 이후 구단들의 생각이 바뀌었다. 강한 외국인 선발이 팀을 상위권으로 이끈다고 믿게 된 것이다. 더스틴 니퍼트 같이 꾸준히 에이스 역할을 하며 100승을 채운 외국인도 나왔다.
이제 김광현과 양현종 급이 아닌 이상 토종 선발이 에이스라는 왕관을 차지하기는 쉽지 않다. 2009년 KBO 리그 개막전 선발은 모두 한국 선수였다. 10년이 지난 2019년에는 10팀 중 김광현-양현종을 보유한 두 팀만이 토종 개막전 선발을 내세웠다.
2. 히어로즈 명암(2013~)
2008년 ‘네이밍 스폰서’라는 획기적인 시도로 KBO 리그에 진입한 히어로즈. 창단 초기 ‘선수 장사’라는 오명을 쓰는 등 여러 실책도 있었다. 그러나 2010년 넥센타이어와 스폰서 계약, 2011년 박병호 트레이드로 반격의 서막을 올렸다. 2013년 첫 가을야구 진출을 시작으로 히어로즈는 KBO 리그에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했다. 이장석 당시 구단 대표는 ‘한국의 빌리 빈’으로 칭송받았다. 어느새 히어로즈는 리그를 대표하는 강팀이 됐다.
그러나 빛이 있으면 어둠도 있는 법. 히어로즈의 성공 스토리 뒤에는 리그를 뒤흔들 폭탄도 있었다. 초기의 혼란을 정리한 후에도 이장석 전 대표는 지분 분쟁, 스폰서 문제로 잡음을 일으켰다. 2018년 수면 위로 드러난 ‘트레이드 뒷돈 파문’은 결국 이 전 대표의 영구실격이라는 비극으로 이어졌다. 이 전 대표가 물러난 이후에도 ‘옥중 경영’ 의혹이 나오는 등 2010년대의 끝에도 여전히 바람 잘 날 없다.
3. 결국 터져버린 승부조작 사건(2012, 2016)
2010년 스타크래프트, 2011년 K리그에서 차례대로 터진 프로스포츠 승부조작 사건. 결국 2012년 KBO 리그에서도 승부조작이 드러났다. 앞서 적발된 K리그 승부조작의 브로커들의 입에서 나온 야구의 승부조작 의혹은 이후 현실로 드러났다. ‘첫 타자 볼넷’ 등의 수법으로 승부조작을 시도한 박현준과 김성현 두 투수는 결국 영구제명 처분을 받았다.
그러나 KBO 리그는 여기서 아무것도 배우지 못했다. 4년 뒤인 2016년, 또 한 번의 승부조작 사건이 타졌다. 이번에는 프리미어12에 나갔던 이태양과 계약금 7억원을 받은 유창식도 포함됐다. 사건 조사 과정에서 심판 매수까지 드러났으며 조폭과의 연계도 확인되었다. 소를 잃고도 외양간을 고치지 않았던 것이다.
4. 해외진출(2012~)
2012시즌이 끝나고 당시 한화 이글스 소속이던 류현진이 역사상 최초로 KBO에서 MLB로 직행한 선수가 됐다. 그리고 7년 뒤 류현진은 평균자책점 1위라는 타이틀을 가지고 토론토 블루제이스와 4년 8000만 달러에 계약을 맺었다. 류현진의 성공 신화는 한국의 다른 스타플레이어들에게도 많은 동기부여가 됐다. 이후 2015년 강정호, 2016년 박병호와 김현수, 2017년 황재균이 차례로 메이저리그를 경험했다.
그러나 모두가 류현진처럼 될 수는 없었다. 박병호와 김현수는 한국에서의 장타력을 마음껏 뽐내지 못했다. 황재균은 메이저리그 경험조차 쉽지 않았다. 그나마 성공적으로 적응했던 강정호마저 사생활 문제로 모습을 감췄다. 그래도 이 선수들은 메이저리그 구경도 못했던 윤석민보다는 나았다.
5. 신생 구단의 1군 진입(2013, 2015)
1991년 쌍방울 레이더스의 1군 합류 이후 21년간 유지됐던 8구단 체제가 2013년 드디어 변화를 맞이했다. 경남 창원을 연고지로 하는 NC 다이노스가 ‘아홉 번째 심장’을 모토로 KBO 리그에 진입했다. NC는 1군 첫 해부터 신생팀 최다승 기록을 갈아치우더니 2014년부터 2019년까지 한 해를 제외하고 모두 포스트시즌에 올랐다. 우여곡절은 있었지만 성공적으로 리그에 자리 잡았다.
이어 2015년에는 경기도 수원을 홈으로 사용하는 KT 위즈가 1군에 진입, 드디어 두 자릿수 구단이 만들어졌다. 창단 후 3년 연속 최하위를 기록했던 KT는 2018년 9위에 이어 2019년에는 창단 첫 5할 승률을 달성하며 내일을 기대하게 만들었다.
NC와 KT는 때마침 찾아온 타고투저 광풍 때문에 억울하게 ‘리그 수준 저하’의 주범이라는 오명을 쓰기도 했다. 그렇지만 리그의 확장이라는 측면에서는 큰 역할을 했다고 평가할 수 있다.
6. 삼성왕조(2011~2014)
미국에서는 3연속 우승을 차지하는 팀에게 ‘쓰리핏(3-peat)’이라는 명칭을 붙여준다. KBO 리그에서 이에 해당하는 팀은 1986~1989년의 해태 타이거즈, 그리고 2011~2014년의 삼성 라이온즈다. 그중에서도 2010년대 초반의 삼성은 4년 연속 페넌트레이스와 한국시리즈 통합 우승이라는 금자탑을 달성했다. 그야말로 ‘리그를 씹어먹은’ 시기였다.
2011년 최형우(0.340 30홈런 118타점 OPS 1.044)와 오승환(1승 0패 47세이브 ERA 0.63)을 앞세워 5년 만에 통합우승을 이뤄낸 삼성은 이후 거칠 것이 없었다. 2012년에는 돌아온 이승엽이 중심을 잡아주며 SK 와이번스를 2년 연속 꺾었다. 2013년 한국시리즈에서는 1승 3패를 뒤집고 우승을 차지하는 저력을 보여줬다. 오승환이 빠져나간 2014년에도 돌아온 임창용과 새로 들어온 야마이코 나바로의 활약으로 4연속 통합 우승을 이뤄냈다.
그러나 부자가 망하는 데는 속설과 달리 3년도 걸리지 않았다. 삼성은 2015년에도 페넌트레이스 우승을 차지했지만 이른바 ‘도박 파문’이 터지면서 두산 베어스에 우승 트로피를 내줬다. 이후 삼성은 우승커녕 가을야구 구경도 하지 못하는 신세가 됐다. 혼자 차지할 수 있었던 ‘2010년대 최고 팀’ 타이틀은 2010년대 후반을 화려하게 수놓은(우승 3회, 준우승 2회) 두산과 양분해야 했다.
7. 200안타와 타고투저(2014~2018)
1994년 이종범(당시 해태)이 기록한 196안타는 당시 ‘전인미답’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그리고 정확히 20년이 지난 2014년, 그 196안타를 밟고 새로운 역사를 쓴 선수가 등장했다. 바로 서건창이었다. 이종범의 광주일고 19년 후배였던 서건창은 선배의 기록에 5안타를 더 붙여 KBO 리그 최초로 200안타를 기록한 선수가 됐다.
서건창이 200안타를 기록한 2014년은 KBO 리그에 타고투저의 바람이 불기 시작한 시기다. 2013년 0.737이었던 리그 OPS는 이듬해 0.807로 크게 뛰어올랐다. 정교함의 상징이던 3할 타율은 흔하디 흔한 기록으로 전락했다. KBO 리그의 타고투저는 결국 공인구 반발계수를 낮춘 2019년(리그 OPS 0.722)에야 정리된다.
8. 한국 최초의 돔 구장 시대 개막(2016)
모 해설위원은 야구장에 비가 내릴 때마다 돔 구장 노래를 부른 것으로 유명하다. 비록 그 당사자는 만족스럽지 못하다고 했지만 드디어 한국에도 돔 구장이 생겼다. 바로 2015년 개장하고 2016년부터 키움의 홈 구장이 된 고척 스카이돔이다. 처음에는 예산 낭비라는 우려도 있었지만 여름철 야구팬들의 쾌적한 관람을 보장했다. 또한 잠실 주경기장 다음 가는 큰 공연장의 역할도 수행해 방탄소년단, EXO, 아리아나 그란데, U2 등의 콘서트가 열리기도 했다.
2010년대에는 고척 스카이돔 이외에도 신 구장이 많이 완공됐다. 포항야구장(2012년), 광주-기아 챔피언스 필드와 울산 문수야구장(2014년), 대구 삼성 라이온즈 파크(2016년), 창원NC파크(2019년) 등이 2010년대 새로 지은 야구장이다. 수원야구장이 ‘수원 케이티 위즈 파크’로 탈바꿈했고 리모델링을 했던 대전은 2019년 신 구장 건립 계획이 나오기도 했다.
9. FA 100억 시대(2017~)
2004년 말 심정수가 삼성과 맺은 4년 60억 원 계약은 이후 10년 가까이 깨지지 않았다. 그러나 2013년 말 최초로 총액 70억 원 고지를 밟은 강민호(75억 원) 이후 80억대와 90억대가 정복당하기까지는 불과 1년씩밖에 걸리지 않았다. 그리고 2016년 최형우가 KIA로 이적하면서 FA 시장에 100억 원 시대가 열렸다.
이후로는 거칠 것이 없었다. 불과 몇 달 뒤 이대호가 한국으로 복귀하면서 4년 150억 원이라는 상상조차 힘든 금액을 받았다. 이후 김현수(4년 115억 원), 최정(6년 106억 원), 양의지(4년 125억 원)가 총액 100억을 돌파한 선수가 됐다.
‘과열’이라는 평을 들었던 FA 시장은 오버페이를 지양하려는 구단의 의지로 인해 조금씩 사그라들고 있다. 선수협에서 거부했지만 총액 80억 원 상한제까지 도입하려는 시도도 나타났다.
10. KBO 3김시대 종언(2017)
김응용, 김성근, 김인식. 세 감독은 각각 83, 84, 91년부터 프로 감독으로 활약한 백전노장이었다. 김응용 감독은 해태와 삼성에서 10번의 우승을 기록했다. 김성근 감독은 ‘승부사’, ‘투수조련사’라는 타이틀을 가지고 약체팀을 단번에 강팀으로 만드는 신화를 이뤄냈다. 김인식 감독은 ‘믿음의 야구’를 앞세워 많은 야구팬들에게 감동을 안겨줬다. 2000년대까지 세 감독이 일궈낸 승수만 3554승에 달했다.
그러나 영원한 것은 없었다. 흐르는 세월은 세 명장을 역사의 뒤안길로 보냈다. 김응용 감독은 2013년 한화 이글스 감독을 맡아 9년 만에 현장에 컴백했다. 그러나 그가 받아든 성적은 김응용답지 않은 2년 연속 꼴찌였다. 고양 원더스에서 패자부활의 희망을 안겨준 김성근 감독은 김응용 감독 후임으로 한화에 부임했다. 그러나 임기 내내 여러 구설수에 올랐고 결국 중도 퇴진했다. 2009년 한화를 마지막으로 지휘봉을 내려놓았던 김인식 감독은 2015년 프리미어12 우승으로 부활하는 듯했다. 하지만 또 다시 떠밀리듯 감독직을 맡은 2017년 월드베이스볼클래식(WBC)에서 1라운드 탈락이라는 굴욕을 맛봤다.
결국 ‘역전의 용사’들은 2017년을 끝으로 KBO 리그에서 자취를 감추었다. KBO 리그의 ‘3김’이 사라졌다는 것은 초창기 야구와의 단절을 의미한다. 그들이 사라지면서 KBO 리그는 80년대와 완전히 작별했다.
번외. 2010년대 우리와 이별을 고한 사람들
2010년대에는 프로야구의 중흥을 이끌었던 여러 선수들이 그라운드와 작별했다. 2010년에는 ‘기록의 사나이’ 양준혁이 눈물 젖은 은퇴식을 치렀다. 같은 해 ‘대성불패’ 구대성도 KBO 리그에서 떠났다. 이어 ‘바람의 아들’ 이종범도 2012년 시범경기 종료 후 바람처럼 다이아몬드와 이별했다. 2012시즌이 끝나고는 ‘황금세대’라 불리는 92학번 선수 중 ‘코리안특급’ 박찬호와 ‘리틀쿠바’ 박재홍이 기나긴 현역 생활을 마무리했다.
장성호(2015년)와 이병규(2016년)도 2000안타라는 기록을 남기고 현역에서 물러났다. 신생팀 NC에서 정신적 지주 역할을 했던 이호준과 두산의 캡틴 홍성흔은 2017년 은퇴식을 하고 지도자로 변신했다.
그래도 역시 2010년대 가장 인상적인 은퇴 선수는 바로 ‘라이온 킹’ 이승엽이었다. KBO 리그 최초로 은퇴 투어까지 나선 이승엽은 은퇴 경기에서 연타석 홈런을 때리며 마지막까지 이승엽답게 마무리했다. 이외에도 임창용, 김동주, 송지만, 박경완, 이진영, 이범호 등 리그에 큰 족적을 남긴 여러 선수들이 안녕을 고했다.
영원히 이별한 야구인들도 많았다. 장효조와 최동원이 2011년 9월, 일주일 간격으로 세상을 떠났다. 그라운드에서 쓰러진 후 오랜 세월 투병해 온 임수혁도 앞서 2010년 사망했다. 황규봉과 유두열(이상 2016년) 등 초창기 스타들과도 이별해야 했다. 서종철 전 총재, 김양중 등 원로 야구인부터 하일성 해설위원, 조성민까지 우리는 많은 이들의 손을 놓아야 했다.
호세 리마, 호세 카페얀, 앤디 마르테, 브라울리오 라라 등 잠시 스쳐 지나갔던 외국인 선수의 사망도 우리를 슬프게 만들었다. 병마와 싸워야 했던 이두환과 불의의 사고를 당한 김성훈 등 젊은 별이 스러지는 것을 보는 건 슬픔보다는 차라리 고통이라고 표현해야 맞을지도 모르겠다.
지난 10년간 우리는 수많은 것들과 만나고, 또 헤어졌다. 그리고 이제는 2010년대와도 작별해야 한다. 훗날 역사에 2010년대 한국야구는 어떻게 기록될까.
도움=야구공작소 박기태, 노진구
에디터=야구공작소 오연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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냉정한 야구글(?)을 보러 여기에 옵니다만 이런 감성적인 글들도 좋네요. 덕분에 야구와 함께했던 지난 시간을 추억해 볼 수 있었습니다. 다만 두산 이야기가 없어서 아쉽네요.. fa를 못잡으면서도 전력을 유지하는 수준이 아니라 리그 최강자에 오르는 신묘한팀 kbo에 새로운 하나의 길을 만든 것도 같았는데 ㅋㅋ (참고로 저는 두산팬 아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