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발부재

 

“현재 KBO리그에서 국내 선수가 팀에 보통 3~4명 정도 선발로 활동하고 있는데, 국제 대회 경쟁력을 높이려면 더 많은 선수가 팀에서 선발 역할을 해야 한다.”

 

류지현 국가대표팀 감독은 17년 만에 오른 WBC 8강 무대에서 도미니카공화국에 콜드게임 패배를 당한 뒤 이렇게 말했다.

틀린 말은 아니다. 현재 KBO리그 대부분의 구단은 5일 선발 로테이션을 선호한다. 그 가운데 두 자리는 외국인 투수에게 먼저 배정된다. 남은 세 자리를 두고 국내 투수들이 1군 선발 경쟁을 벌인다. 여기에 선발 로테이션을 소화하는 투수의 부상이나 부진에 대비해 각 팀이 2~3명의 예비 자원을 준비하는 점을 고려하면, 류 감독의 지적은 크게 현실에서 벗어난 이야기가 아니다.

실제로 2025시즌 기준 20경기 이상 선발 등판하며 100이닝 이상을 소화한 국내 투수는 20명에 불과하다.1 매년 고등학교와 대학교에서 팀의 경기를 책임지던 에이스들이 드래프트와 신고선수 형태로 프로에 입단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KBO리그에서는 오랫동안 로테이션을 안정적으로 소화할 ‘토종’ 선발이 부족하다는 지적이 반복됐다. 2025년 역시 상황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그렇다면 그 이유는 무엇일까.

일각에서는 국내 선발투수가 부족한 이유로 프로 무대에서의 기회 자체가 부족하다는 점을 지적한다. 여기에 2026년부터 아시아쿼터 제도가 도입되면 상황은 더 악화될 것이라는 전망도 나온다. 기존 외국인 투수가 차지하고 있던 두 자리에 더해 남은 세 자리 가운데 하나마저 아시아쿼터 선수에게 돌아갈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되면 국내 선발투수의 입지는 더욱 좁아질 것이라는 우려다.

그러나 필자는 이러한 주장에 선뜻 동의하기 어렵다. 프로 구단과 국가대표팀이 요구하는 선발투수는 단순히 팀에서 가장 좋은 공을 던지는 투수, 혹은 경기의 첫 이닝을 맡는 투수를 의미하지 않는다. 일정한 간격으로 등판하며 꾸준히 이닝을 책임질 수 있는 투수가 바로 선발투수다. 설령 선발 자리를 강제로 마련해 준다 하더라도 그 역할을 감당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투수들뿐이라면, 과연 우리는 선발투수가 존재한다고 말할 수 있을까.

우리나라 야구에 선발 투수가 부족한 이유는 여러가지가 있을 것이다. 네이버에서 오늘의 MLB를 연재하는 이현우 해설위원은 프로 구단의 조급한 유망주 기용 방식에 주목했다. 야구 인구가 줄어들고 있다는 점을 지적한 사람도 있다.

본 글에서는 이처럼 존재하는 다양한 원인 중 한국 아마추어 야구의 구조적인 문제를 짚어보고자 한다. 특히 현행 고교야구와 대학야구의 대회 방식, 그리고 지도자들의 투수 기용 방식이 유망주들이 선발투수로 성장하는 과정을 어떻게 가로막고 있는지 살펴보려 한다.

 

제일 잘 던지는 선수가 선발이다

MLB, NPB, KBO를 막론하고 드래프트 되는 투수는 대부분 아마추어 시절 선발투수로 활약한 선수들이다. 이유는 단순하다. 프로 구단은 시장에 나온 가장 뛰어난 선수를 먼저 선택하고, 그런 선수는 대부분 선발투수이기 때문이다. 왜 그럴까?

투수에게 요구되는 가장 중요한 임무는 아웃카운트를 잡는 것이다. 그런데 그건 절대 쉬운 일이 아니다. 빠른 공을 던진다고, 제구나 커맨드가 뛰어나다고 해서, 체력이 뛰어나다고 해서 꼭 좋은 투수가 되는 것은 아니다. 투수는 빈 과녁을 향해 공을 던지는 존재가 아니라 타자를 상대하는 자리이기 때문이다. 타자를 효과적으로 제압하려면 던지는 것 이외의 능력을 갖춰야 한다. 하물며 자신의 투구가 익숙해진 타자를 여러 차례 잡아내는 건 결코 쉽지 않다.

이처럼 여러 이닝을 책임지며 같은 타자를 반복해 상대해야 하는 선발투수는 투수에게 가장 높은 수준의 역량을 요구하는 자리다. 그래서 아마추어 팀의 감독은 자연스럽게 가장 뛰어난 투수에게 선발을 맡긴다.

그 결과 드래프트되는 투수들 역시 대부분 아마추어 시절 선발 경험을 가진 선수들이다. 프로 입단 이후 팀 사정에 따라 보직이 불펜으로 바뀌는 경우는 있지만, 선발 경험 없이 프로 무대에 들어오는 투수는 매우 드물다.

 

10경기 40.2이닝 2승 1패 평균자책점 2.63

이 성적은 2026 KBO 신인드래프트에서 전체 1순위로 지명된 북일고 박준현이 2025년에 기록한 성적이다. 산술적으로 보면 경기당 약 4이닝을 소화한 셈이니 나쁘지 않은 기록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의 등판 내용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이야기가 조금 달라진다.

< 키움 히어로즈 박준현의 2025년 등판 기록>

첫 두 번의 등판만 보면 우리가 흔히 떠올리는 선발투수의 모습이다. 일정한 간격으로 등판해 6이닝 안팎을 책임진다. 그러나 이후 기록을 보면 선발투수라고 단정하기 어렵다. 4월 19일 공주고전에서 6.2이닝을 던진 뒤 등판 간격은 들쭉날쭉해졌고, 6월 7일과 8일에는 이틀 연속 마운드에 오르기도 했다.

역시 1라운드 지명받은 동산고 신동건의 등판 기록은 더욱 복잡하다. 신동건은 2025년 16경기에서 72.1이닝을 던졌다. 숫자만 보면 박준현보다 훨씬 많은 이닝을 소화한 셈이다. 그러나 세부 내용을 보면 상황은 다르다. 주말리그 일부 일정을 제외하면 3일 휴식 후 등판, 2일 휴식 후 등판이 반복된다. 무엇보다 한 경기에서 투수로 등판했다가 야수로 돌아간 뒤 다시 마운드에 오르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이런 사례가 무려 여섯 차례다. 4월 4일 부산고전과 7월 28일 안산공고전에서는 한 경기에서 세 번이나 마운드에 올랐다.

이 같은 등판 패턴은 고교야구 특유의 경기 일정과 무관하지 않다. 현재 고교야구는 주말리그와 토너먼트가 혼합된 구조로 진행된다. 일정이 촘촘하게 이어지다 보니 프로야구처럼 일정한 등판 간격과 투구 수를 유지하며 선발 로테이션을 운영하기가 쉽지 않다.

일부 등판은 감독의 선택이기도 하다. 예컨대 박준현이 6월 초 주말리그에서 연투한 것은 중요한 경기에 에이스를 투입한 결과로 볼 수 있다. LA 다저스가 야마모토 요시노부를 이틀 연속 기용하며 월드 시리즈를 우승한 것처럼, 단기전에서 승리를 위해 팀의 에이스를 연투시키는 선택 자체를 비난하기는 어렵다. 다만 그것이 ‘선발투수’를 길러내는 방식이라고 보기는 힘들다.

두 투수가 뛰어난 재능을 지닌 선수라는 데에는 의문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이런 투구 패턴 속에서 과연 우리는 그들을 ‘선발투수’라고 부를 수 있을까.

물론 고교나 대학 시절 선발투수로 성장했다고 해서 프로에서도 반드시 선발 역할을 수행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현재 한국 아마추어 야구 환경에서는 프로 구단이 요구하는 선발투수의 루틴과 몸 관리 방식, 그리고 이닝 운영을 유사하게나마 경험하기조차 어렵다. 결국 이 세대의 최고 유망주들조차 프로 무대에 올라서야 비로소 처음 접하는 일과와 생활 방식을 새로 익혀야 한다.

 

문제는 환경이다, 환경

필자는 한국의 투수 유망주 숫자 자체는 프로구단 및 대표팀의 수요를 맞추기에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다만 그들을 선발투수로 키워낼 수 있는 환경이 문제라고 본다. 이런 인식을 더 확신하게 만든 사례가 있다. 최근 미국에서 뛰고 있는 한 한국인 학생선수를 지켜보면서였다.

< 뉴멕시코 군사학교 소속 좌완 이현욱. 출처: NMMI >

미국 뉴멕시코 군사학교(New Mexico Military Institute)에서 두 번째 시즌을 보내고 있는 이현욱은 고교 3학년 때 부상 여파로 14경기 25.2이닝밖에 던지지 못했다. 그럼에도 재능만큼은 인정받아 2024 KBO 신인 드래프트에서 지명될 가능성이 있다는 평가를 받았던 선수였다. 그러나 수술로 인해 결국 어느 구단으로부터도 부름을 받지 못했다. 좌절할 수도 있었지만 그는 새로운 길을 선택했다. 기회를 찾아 미국행 비행기에 올라 뉴멕시코 군사학교에 입학했다.

낯선 환경에서 그는 또 다른 낯선 역할과 마주했다. 바로 선발 로테이션이다. 하지만 이현욱은 그 자리를 묵묵히 헤쳐 나갔다. 이런 환경에서 투수는 단순히 공을 던지는 법만 배우지 않는다. 다음 등판을 준비하는 과정, 경기 중 투구 수 관리, 긴 이닝을 책임지는 방법까지 자연스럽게 익히게 된다. 선발투수에게 필요한 능력은 하루 경기에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일정한 로테이션 속에서 반복되는 경험을 통해 축적되기 때문이다.

이현욱은 2025년 봄 뉴멕시코 군사학교에서 정규시즌을 보냈고 여름에는 대학생 리그인 West Coast League에 속한 Ridgefield Raptors에서 경기했다. 2025년 23경기 99이닝을 소화하는 동안 로테이션을 거르지 않고 모든 경기에서 선발투수로만 나섰다.

그리고 2년 차에 접어든 그는 완전히 다른 투수로 성장했다. 올해 3월 21일까지 7경기에 등판해 34.1이닝을 던지는 동안 6승을 수확했으며 ERA 1.83, K/9은 14.42을 기록 중이다. 현재 그는 전미 2년제 대학리그인 NJCAA Division I에서도 손꼽히는 선발투수로 평가받으며 야구 인생의 다음 단계를 준비하고 있다.

 

없는 것을 내놓으라 하지 말자

물론 과거처럼 한 선수가 모든 경기를 책임지는 ‘혹사’로 돌아가자는 뜻은 절대 아니다. 핵심은 공을 던지는 ‘양’이 아니라 경험의 ‘방식’이다. 일정한 간격으로 등판을 준비하고, 경기 안에서 긴 이닝을 직접 설계해 보는 과정은 선발투수로 크기 위한 필수 자양분이다. 그러나 현재 한국 아마추어 야구의 주말리그와 토너먼트 중심 구조와 감독들의 기용 방식 속에서는 유망주들이 이러한 루틴을 온전히 학습하기가 불가능에 가깝다.

재능 있는 투수들은 지금도 끊임없이 등장하고 있다. 한국 야구가 진정으로 강력한 토종 선발진과 국제 대회 경쟁력을 원한다면 답은 분명하다. 프로에 와서야 처음 선발 루틴을 배우는 지금의 굴레를 깨고, 아마추어 시절부터 선발투수로 성장할 수 있는 대회 구조와 환경부터 마련해야 한다. 선수들에게 없는 것을 요구하기 전에, 그들이 온전한 ‘선발투수’로 자라날 토양을 먼저 다져야 할 때다.

 

참조 = 한겨레, 네이버, 경북대신문, 대한야구소프트볼협회, New Mexico Military Institute, Ridgefield Raptors

야구공작소 이금강 칼럼니스트

에디터 = 야구공작소 익명, 장호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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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고영표, 김광현, 김도현, 나균안, 류현진, 문동주, 문승원, 박세웅, 소형준, 손주영, 송승기, 신민혁, 양현종, 오원석, 원태인, 이승현, 임찬규, 최승용, 최원태, 하영민 (가나다 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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