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가 없으면 잇몸으로’ 다저스의 두터운 야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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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셔널리그에서 후반기 가장 의외의 소식을 꼽으라면 어떤 것을 들 수 있을까. 카일 헨드릭스의 질주, 조이 보토의 부활 등 다채로운 뉴스가 잇따르고 있다. 그러나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가 이토록 처참하게 무너질 것이라고 예상한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전반기 메이저리그 전체 승률 1위(0.633)를 달리던 샌프란시스코는 후반기 승률 최하위(0.347)라는 믿기 어려운 성적표를 받아 들고 있다.

그 중심에는 브랜든 벨트, 버스터 포지, 헌터 펜스 등 중심 타자들의 집단 슬럼프가 있지만, 선발 투수들의 집단 난조 역시 뼈아팠다. 원투 펀치 매디슨 범가너, 자니 쿠에토는 나란히 후반기 성적이 주춤하고 있다. 트레이드로 데려온 맷 무어 역시 기대에 못 미치고 있으며, 거액의 FA 계약을 맺은 제프 사마자는 시즌 내내 난조를 겪고 있다.

선발진의 난항이라는 문제는 지구 라이벌 LA 다저스도 갖고 있는 고민이다. 특히 다저스는 ‘세계 최고의 투수’ 클레이튼 커쇼가 허리 디스크 부상으로 7월부터 자리를 비우며 메꿀 수 없는 타격을 입었다. 커쇼뿐만 아니라 브렛 앤더슨, 브랜든 맥카시, 류현진, 알렉스 우드, 스캇 카즈미어 등이 줄줄이 부상으로 로테이션을 이탈했다.

에이스를 비롯한 주축 선발진의 대량 이탈은 지구 선두 경쟁을 하는 다저스에게 큰 골칫덩이가 됐다. 개막 당시의 로테이션 5명 중에서 3명이나 부상으로 이탈했다(커쇼, 우드, 카즈미어). 결국 올해 다저스는 메이저리그에서 가장 많은 15명의 투수를 선발 투수로 기용해야 했다.

 

의외의 성공

그런데 이런 ‘이 대신 잇몸’식 선발 기용이 예상 외로 성공적으로 이뤄지고 있다. 분명 땜질 처방으로 인한 피해는 있었지만 생각보다는 적은 편이었다. 전반기 다저스 선발진의 평균자책점은 3.77이었고, 커쇼를 제외하면 4.38이었다. 후반기 평균자책점은 4.59다. 커쇼가 돌아오지 않았다는 걸 고려하면 꽤나 선방한 셈이다.

땜질 처방은 선발 로테이션에만 적용되지 않았다. 올해 다저스는 메이저리그 역대 타이 기록인 27명의 선수를 부상자 명단에 올렸다. 그 결과 경기에 1번이라도 출장한 선수들의 숫자는 메이저리그 2위인 54명이 됐다.

일견 마구잡이로 보일 정도로 이 선수 저 선수를 경기에 내보냈지만 야수진의 성적은 오히려 좋아졌다. 전반기 야수진의 대체선수 대비 승리 기여도(WAR, 팬그래프 기준)는 10.9였던 반면 후반기에는 11.5로 상승했다. 후반기 경기 수가 더 적은 것을 생각하면 그만큼 타자들의 상승세가 무섭다는 해석이 가능하다.

 

성공의 이유

땜질 처방이 성공할 수 있던 비결은 몇 가지로 압축된다. 먼저 예상치 못했던 조커 카드들의 존재다. 대표적인 것이 선발 로테이션을 소화하고 있는 좌완 훌리오 유리아스다. 올해 겨우 만 20세인 유리아스는 당초 시즌 후반기에나 메이저리그에 데뷔할 것으로 점쳐졌다. 그러나 전반기 선발진의 이탈이 계속되자 5월 27일 깜짝 빅리그 데뷔전을 가졌다.

전반기 8경기에서 평균자책점 4.95로 메이저리그에 어렵게 적응하던 유리아스는 후반기 들어 7경기 평균자책점 2.25로 연착륙에 성공하고 있다. 조심스럽게 다루던 카드인 유리아스가 성공적으로 선발 로테이션에 안착하면서 다저스는 안도의 한숨을 쉴 수 있었다.

 

여기에 지난주에는 팀에서 유리아스 다음 가는 우완 유망주 호세 디 레온이 탈삼진 9개를 잡아내며 성공적인 선발 데뷔전을 치뤘다. 카즈미어의 재활이 미뤄지면서 디 레온의 빅리그 생활은 더 길어질 것으로 보인다.

또 하나의 비결은 지난해부터 다저스 프론트가 보여주고 있는 ‘두터움의 야구’다. 지난 겨울 다저스는 커쇼와 원투펀치를 이루던 잭 그레인키를 같은 지구에 속한 애리조나 다이아몬드백스에게 내줬다. 그레인키의 이적에 이어 샌프란시스코까지 쿠에토와 사마자를 FA로 영입하자, ‘돈을 쓸 생각을 하지 않는다’라는 팬들의 비난이 빗발쳤다.

그런 와중에도 다저스 수뇌부는 꿋꿋이 체이스 어틀리와 하위 켄드릭을 비롯한 베테랑 선수들과의 단기 계약만을 고집했다. 마이애미의 호세 페르난데스 등 특급 에이스를 트레이드로 데려와야 한다는 외부의 주장에도 흔들리지 않았다. 이런 결정에는 모두 하나의 공통점이 있었는데, 거액의 장기계약을 피하고 유망주 유출을 최소화했다는 것이다.

그 결과 다저스는 올 시즌 유리아스와 코리 시거, 호세 디 레온 등 팀내 최고 유망주들을 모두 기용할 수 있었다. 여기에 막대한 자금으로 카즈미어, 브랜든 맥카시, 마에다 켄타 같은 중급 FA 선수들을 추가해 팀에 두터움을 더했다.

A급 FA를 놓치면서까지 지킨 유망주들은 지금 팀에 크나큰 도움이 되고 있다. 시거는 내셔널리그 신인왕 0순위로 꼽히는 데다 MVP 후보로까지 거론되고 있다. 의문부호가 붙었던 마에다는 혼자서 개막전부터 선발 로테이션을 꾸준히 지키고 있다. 수술로 1년 반을 쉰 맥카시는 드디어 복귀해 타이밍 좋게 구멍난 선발진에 합류했다.

 

마지막으로 올 여름 아끼던 유망주들을 풀어 데려온 리치 힐이 에이스의 모습으로 복귀하고, 드디어 커쇼의 복귀 소식이 들려오고 있다. 시즌 내내 흔들리던 선발진은 커쇼의 합류로 교통정리 필요성까지 대두되고 있다. 다저스의 ‘두터움 야구’가 시즌 막판 반전을 발휘하고 있는 셈이다.

이런 식의 선수단 운영은 어떻게 보면 LA 다저스였기에 가능했던, 다른 팀이 쉽게 흉내 낼 수 없는 방식이다. 마에다, 힐, 맥카시 같은 선수들은 시장에서 2~3번째 선택지로 평가받는다. 분명 좋은 선수임은 틀림없으나, 이런 선수들을 먼저 두세 명씩 데려가면 여유자금의 부족으로 특급 선수들을 잡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저스는 그레인키를 포기한 뒤에도 중저가 FA 시장에서 발을 빼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꾸준하게 거액의 스카우팅 비용으로 각종 유망주 시장에 눈독을 들였다. 그 결과 계속되는 부상과 별다른 특급 선수의 영입 없이도 지구 1위를 달리는 동시에 팀 유망주 수준도 높게 유지하는 두 마리 토끼를 잡게 됐다.

 

다저스의 혁명은 이제 시작일 뿐이다

정말로 무서운 것은 다저스의 투자가 여기서 그치지 않을 것이라는 점이다. 과거 머니볼 혁명을 주도했던 오클랜드의 빌리 빈 단장은 다음 세대의 야구 혁명이 ‘의료 분야’에서 일어날 것이라 예언했다. 조기에 선수의 부상 가능성을 진단, 예방할 수 있다면 수백에서 수천만 달러의 손실을 막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는 현재 다저스 구단을 이끌고 있는 앤드류 프리드먼 사장, 파르한 자이디 단장도 꿰뚫고 있는 부분이다. 이를 반영하듯 현재 다저스의 의료 분야 지출은 메이저리그 최고 수준을 유지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또한 프리드먼 사장의 주특기로 알려진 세이버메트릭스에 대한 투자도 멈추지 않고 있다. 다저스의 분석 분야 직원 숫자는 뉴욕 양키스, 탬파베이 레이스와 함께 메이저리그 최고 수준이다.

머니볼 혁명은 ‘가난한 구단’ 오클랜드에서 시작됐다. 그러나 그 혁명은 ‘부자 구단’ 보스턴에서 완수됐다. 꺼지지 않은 혁명의 불꽃은 탬파베이와 오클랜드의 두뇌를 데려간 ‘메이저리그 최고 부자 구단’ LA 다저스에서 계속되고 있다. 과연 숫자와 돈, 두 가지 무기를 동시에 쥔 다저스는 어디까지 도달할 수 있을까.

야구공작소
박기태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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