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구공작소 박기태] 2012년 6월 24일(이하 미국 시간), 우익수 방면으로 깊은 타구를 보내고 3루까지 내달린 케빈 유킬리스는 그것이 보스턴 레드삭스의 유니폼을 입고 때려낸 자신의 마지막 안타였음을 직감했다. 팬들의 함성과 박수 속에서 동료들과 포옹을 나누며 대주자로 교체된 유킬리스는 이날을 끝으로 2004년부터 이어온 보스턴에서의 활약을 마무리했다. 경기가 끝난 뒤, 보스턴은 유킬리스를 시카고 화이트삭스로 트레이드시켰다.
2007년 월드시리즈 우승의 1등 공신이었던 유킬리스가 팀을 떠나야 했던 이유는 간단했다. FA를 앞둔 상황에서 강력한 대체자가 등장했기 때문이었다. 애드리안 곤잘레스가 트레이드로 팀에 합류한 2011시즌부터 유킬리스는 기존의 1루수 자리를 내주고 유망주 시절의 포지션이었던 3루수로 경기에 나섰다. 그리고 2012시즌 초반, 보스턴의 마이너리그에서는 3루수 유망주 윌 미들브룩스가 빅리그 진입을 위한 무력시위를 이어가고 있었다.
2012시즌 개막 직전 베이스볼 아메리카(BA)에 의해 보스턴의 최고 유망주로 선정된 미들브룩스는 개막부터 트리플A를 폭격했고, 5월부터는 빅리그에 데뷔해 팀의 주전 3루수로 자리 잡았다. 그러나 순항은 오래가지 않았다. 미들브룩스는 8월 10일 경기에서 투구에 맞아 오른손이 골절되는 중상을 입고 그대로 시즌을 마무리했다. 보스턴의 3루수 문제가 시작된 것은 이때부터였다.
윌 미들브룩스는 과거 레드삭스 핫코너의 미래였다(사진=Flickr Keith Allison, CC BY SA 2.0)
부상에서 돌아온 미들브룩스는 과거와는 다른 선수가 되어 있었다. 부진을 거듭한 끝에 2013시즌 중반 트리플A로 강등되기도 했다. 미들브룩스가 2014시즌에도 부진하자, 보스턴은 결국 오프시즌 들어 과감한 결정을 내렸다. 하락세가 완연했던 파블로 산도발과 거액의 FA 계약을 체결한 것이다. 모두가 우려했던 이 악수는 결국 예상대로의 결과로 돌아왔다. 산도발은 21세기 최악의 FA 영입 중 하나로 이름을 남기고 말았다.
성적 부진과 불성실한 태도, 체중 조절 실패 등의 온갖 문제를 안고 다녔던 산도발은 어깨 부상으로 수술을 받으면서 지난 시즌을 일찌감치 마무리했다. 결국 산도발은 이번 시즌 도중 아직 2년 이상의 계약기간이 남은 상황에서 방출 당하는 수모를 겪었다. 그러나 보스턴의 3루수 문제는 여전히 해결되지 않은 상태였다. 지난 시즌 보스턴의 주전 3루수로 활약한 트래비스 쇼는 올 시즌 들어 타격 재능을 확실하게 꽃피웠다. 문제는 이것이 밀워키로 트레이드된 이후의 일이었다는 것이다.
2017시즌 트레이드 마감시한을 앞두고 아메리칸리그 동부지구 1위를 달리고 있던 보스턴은 두 가지 선택지를 지니고 있었다. 하나는 시장에서 가장 좋은 3루수 매물인 토드 프레이저를 영입하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성장 속도에 불이 붙은 유망주 라파엘 데버스를 그대로 지킨 다음 그의 미래에 기대를 걸어보는 것이었다.
보스턴 수뇌부의 선택은 그 사이의 절충안이었다. 프레이저의 뉴욕 양키스 이적이 발표되고 며칠이 지난 뒤, 보스턴은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에서 에두아르도 누네즈를 영입해왔다. 이와 동시에 1996년 10월생으로 아직 만 20세에 불과한 데버스에게 펜웨이 파크의 3루를 맡기는 파격적인 실험을 단행했다.
이 과감한 도박은 현재까지는 대성공을 거두고 있다. 7월 25일자로 빅리그에 콜업된 데버스는 데뷔 첫 경기에서 볼넷 두 개를 골라내면서 차분하게 메이저리그 커리어의 막을 올렸다. 그리고 바로 다음날 데뷔 첫 안타를 홈런으로 장식했다. 7월 동안의 6경기에서 0.417의 타율과 1.231의 OPS를 기록한 뒤 잠시 숨 고르기에 들어간 듯 보였던 데버스는, 그러나 8월 13일 경기에서 뉴욕 양키스의 마무리 아롤디스 채프먼의 시속 103마일 속구를 동점 홈런으로 연결시키는 대형 사고를 저질렀다. 그러더니 다음날 클리블랜드 인디언스와의 경기에서는 연타석 홈런을 기록했다. 이 모든 일이 겨우 16경기만에 벌어졌다.
이처럼 기대 이상의 활약을 펼치고 있는 데버스지만, 스카우트들은 이미 데버스의 최대 기대치를 지금 성적만치 높게 평가하고 있었다. 2013년 국제 아마추어 유망주 중 최고의 왼손 타자로 손꼽힌 데버스는 보스턴과 150만 달러에 계약을 맺었고, 2014년 루키 리그(걸프코스트리그)에 데뷔하자마자 BA로부터 리그 최고의 유망주로 선정됐다. 같은 해 BA에서 팀내 6위 유망주로 선정된 데버스는 2015년, 2016년에는 내리 팀내 2위를 차지했다.
2년 연속 2위를 차지한 데버스의 위에는 요안 몬카다와 앤드류 베닌텐디가 있었다. 그러나 파워 히터로서의 자질에서는 데버스가 항상 둘보다 높은 평을 받았다. 올 시즌에도 데버스는 더블A 77경기에서 홈런 18개를 때려내며 기대에 100% 부응하는 모습을 보였다. 트리플A로 승격된 후에는 9경기에서 홈런 2개 포함 타율 0.400, OPS 1.047을 기록하며 파죽지세를 이어갔고, 결국 빅리그 승격이라는 잭팟을 터트리는 데 성공했다.
성공적인 한 해를 보내고 있는 데버스의 과제는 두 가지다. 하나는 3루 수비에서 발전된 모습을 보이는 것이다. 나이 이상의 타격 완성도를 지닌 데버스지만, 트리플A 에서 8경기 동안 실책 4개를 저지르는 등 아직 수비에서는 완벽하지 못하다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지금까지 데버스가 주전 3루수로 꾸준히 출장기회를 얻을 수 있었던 것은 자신의 우수한 타격 성적 덕분이지만, 주전 2루수 더스틴 페드로이아의 부상으로 누네즈가 2루로 이동했다는 점도 타격 성적만큼 크게 작용했다. 이후에도 장기적으로 3루 자리를 사수하기 위해서는 수비력을 키우는 것이 필수적이다.
다른 과제는 메이저리그의 변화구에 적응하는 것이다. 지난해까지 상위 싱글A에서 뛰었던 데버스는 이번 시즌에만 더블A – 트리플A – 메이저리그를 돌파하며 3단계에 이르는 ‘광속 승격’을 경험했다. 이는 데버스의 빼어난 실력에 대한 증명이지만, 동시에 비정상적일 정도로 이른 졸업이기도 하다. 데버스는 이제 겨우 만 20세가 된 어린 선수다. 언젠가 큰 슬럼프를 겪게 되더라도 이상할 것이 없다.
하지만 8월 13일과 14일의 두 경기에서 데버스가 보여준 모습은 그의 성장 속도가 우리의 예상을 한참 뛰어넘을지도 모른다는 기대를 품게 했다. 채프먼이 던진 시속 103마일의 빠른 공을 받아 치는 모습, 트레버 바우어가 던진 몸 쪽 낮게 떨어져 볼이 되는 커브를 골프 스윙으로 잡아당겨 담장을 넘기는 모습은 20세의 타격이 아니었다. 어마어마한 장면을 만들고도 담담했던 표정과 정신력 역시 20세의 그것이라고 믿기 어려웠다.
사실 데버스의 정신력은 마이너리그에서 슬럼프를 겪으며 이미 한 차례의 담금질을 거쳤다. 지난해 이전보다 한 단계 위인 상위 싱글A에서 시즌을 시작한 데버스는 5월까지 타율 0.195, OPS 0.583을 기록하며 극심한 부진에 빠졌다. 그러나 6월부터 페이스를 끌어올렸고, 후반기 들어 0.326의 타율과 0.906의 OPS를 기록하며 자신이 마이너리그 최고의 타격 재능임을 입증했다. 이 과정에서 데버스는 좌절감을 외부에 표출하거나 실망에 빠지지 않았다. 이처럼 강인한 ‘멘탈’을 이미 증명했던 데버스였기에 보스턴은 과감한 도박을 시도할 수 있었다.
데버스의 콜업 전까지 보스턴 3루수들이 4달 동안 기록한 OPS는 0.595였다. 황재균을 기용할 정도로 상황이 어려웠던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0.607)보다도 낮은 메이저리그 전체 꼴찌였다. 그러나 데버스가 콜업된 이후, 보스턴 3루수의 OPS 순위는 2위까지 급상승했다(8월 16일 기준). 이는 벨트레가 주전으로 뛰었던 2010년(1위) 이래로 가장 높은 순위다.
동경의 대상(사진=Flickr Keith Allison, CC BY SA 2.0)
도미니카공화국 출신인 데버스의 롤모델은 로빈슨 카노, 그리고 애드리안 벨트레다. 공교롭게도 벨트레는 2010년 1년간 보스턴의 3루수로 맹활약을 펼쳤던 바 있다(타율 0.321, OPS 0.919, bWAR 7.8). 하지만 보스턴은 FA자격을 얻은 벨트레를 붙잡는 대신 애드리안 곤잘레스와 칼 크로포드를 영입하며 3루를 유킬리스에게 맡겼다(그리고 이 실패는 이후 산도발과의 계약에서 재현됐다). 이것이 보스턴의 ‘3루 잔혹사’의 서곡이었다.
만약 유킬리스 대신 벨트레에게 핫코너를 맡겼다면, 벨트레의 3천번째 안타는 텍사스가 아닌 보스턴에서 나왔을지도 모른다. 벨트레가 떠난 뒤로 39명의 3루수가 펜웨이의 핫코너에 들어섰다. 그리고 벨트레를 동경하는 40번째 선수가 새롭게 3루의 주인 자리에 도전하고 있다. 과연 데버스는 오랫동안 자격 있는 주인을 찾지 못했던 펜웨이 파크의 3루에 자신의 이름을 공고히 새겨 넣을 수 있을까.
기록 출처: MLB.com, MiLB.com, Fangraphs, Baseball Referen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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