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일러스트 = 야구공작소 안혜원 >
기술의 발전은 우리 사회에 많은 변화를 불러온다. 스마트폰의 등장은 인간의 생활양식을 송두리째 바꿔놨다. 최근 AI 기술의 발전은 대학, 취업, 금융 시장 등 모든 분야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야구 역시 기술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를 맺고 있다. 선수들의 투구, 스윙 및 타구를 분석하는 기기들이 생산하는 수많은 데이터는 야구를 더욱 정교하고 복잡한 스포츠로 만들었다. 이러한 기술 발전 속에서 기존 야구 훈련에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할 수 있는 ‘트라젝트 아크(Trajekt Arc)’라는 피칭머신을 소개해 보려고 한다.
< 트라젝트 아크의 작동 예시. 출처 = ESPN >
트라젝트 아크란?
트라젝트 아크는 말 그대로 ‘투수 복사기’다. 스탯캐스트 자료를 수집하는 Hawk-Eye 데이터를 바탕으로 각 투수의 구종, 구속, 회전수 등을 실제와 똑같이 구현해 낸다. 여기에 기계를 전후좌우로 이동할 수 있어 투수의 딜리버리 및 익스텐션까지 정확하게 재현할 수 있다. 앞에 부착된 스크린에는 설정한 선수의 투구 영상이 나와 몰입감을 선사한다.
선수들은 트라젝트 아크를 통해 실제 투수와 마주하는 듯한 경험을 할 수 있다. 방대한 데이터를 바탕으로 다양한 볼 배합을 시험해 볼 수 있기 때문에 상대 투수가 던질 수 있는 모든 경우의 수를 경험하는 것도 가능하다. 선수들은 이 과정에서 불리한 볼카운트에서 어느 공에 스윙할지, 직구와 변화구의 궤적 차이 등을 미리 연습해 볼 수 있다.
< Trajekt Sports의 공동 설립자 Joshua Pope(우), Rowan Ferrabee (좌). 출처 = University of Waterloo >
트라젝트 아크는 개발자 조슈아 포프가 고등학교 시절 친구들과 나눈 가벼운 토론에서부터 시작됐다. 토론의 주제는 당시 토론토의 에이스로 주목받던 마커스 스트로먼의 공을 일반인이 몇 번 만에 때려낼 수 있을지에 대한 것이었다. 이러한 아이디어를 가지고 대학에 입학한 포프는 실제 투수들의 투구를 모방할 수 있는 피칭머신을 개발하기 시작했고, 그 결과 지금의 트라젝트 아크가 탄생하게 됐다.
2021년 시카고 컵스를 시작으로 트라젝트 아크는 메이저리그 전반에 확산했다. 2024년에는 19개의 MLB 구단과 3개의 NPB 구단이 트라젝트 아크를 사용하였다. 물론 3년간 매달 약 15,000달러(한화 약 2,200만 원)이라는 만만치 않은 비용을 지불해야 한다. 여기에 세로 4ft(약 122cm), 가로 6ft(약 183cm)라는 크기와 680kg에 달하는 무게는 기계를 활용할 수 있는 공간을 한정시킨다.
하지만 이러한 단점을 압도하는 성능이 메이저리그 구단들이 트라젝트 아크를 도입하게 하고 있다. 이번 시즌을 앞두고 마이애미 말린스와도 계약을 맺는 등, 차세대 피칭머신의 장래는 밝을 것으로 예상된다.
타자에게 미칠 영향
트라젝트 아크는 타자에게 매우 유리한 기술이다. 이 피칭머신을 사용하면 자신이 지정한 투수를 끊임없이 상대해 볼 수 있다. 이전까지는 글과 영상으로만 상대 투수를 분석해 왔다면, 이제는 몸으로 직접 익혀볼 수 있는 것이다. ‘연습은 실전처럼’이라는 말이 실제로 구현되는 순간이다. 트라젝트 아크의 도입은 타자들의 실력 향상에 큰 도움이 될 것이다.
트라젝트 아크는 훈련 상황에서도 유용하지만, 경기 중에 사용하면 그 효과가 배가 된다. 타자는 타석에 들어서기 직전까지 자신이 마주할 투수의 공을 익힐 수 있다. 상대 투수의 공에 익숙해진 타자는 타석에서 더 나은 결과를 만들어낼 가능성이 높다.
< 트라젝트 아크를 사용하여 가상의 게릿 콜을 상대하는 모습. 출처 = ESPN >
실제로 2024년 5월 28일, 뉴욕 양키스와 LA 에인절스의 경기에서 윌리 칼훈은 해당 기계의 덕을 톡톡히 봤다. 자신이 경기 후반에 대타 출전할 것을 예감한 칼훈은 경기 중반 배팅 케이지로 들어가 트라젝트 아크를 켰다. 이후 기계를 이용해 양키스 필승조 투수들의 공을 최대한 많이 지켜보았다. 그 결과 8회 말 선두타자로 출전한 칼훈은 당시 양키스 셋업맨 루크 위버의 91마일 커터를 받아쳐 우전 안타를 만들어낼 수 있었다. 이 안타는 2득점 이닝의 신호탄이 되어 LA 에인절스의 역전승을 끌어냈다.
그뿐만이 아니다. 트라젝트 아크는 유망주의 훈련과 평가에도 활용될 수 있다. 유망주들은 훈련 과정에서 메이저리그 투수들을 상대로 실전과 가까운 경험을 쌓고, 이를 실제 경기 중에 적용해 볼 수 있다. 여기에 구단 관계자들은 유망주에 대한 더욱 정확한 평가를 내릴 수 있게 된다. 트라젝트 아크를 활용하면 메이저리그 수준에서 각 유망주의 구종 대응력 등을 미리 살펴보고 앞으로의 육성 방향성을 정립할 수 있다. 이를 통해 유망주 시절부터 타자들의 경쟁력을 강화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투수에게 미칠 영향
반면 트라젝트 아크의 도입은 투수들에게 치명적인 영향을 미친다. ‘생소함’은 투수의 가장 강력한 무기 중 하나이다. 타자들은 이 생소함에 대응하기 위해 첫 번째 타석에서 최대한 많은 공을 지켜보거나 대기 타석에서 투구 타이밍에 맞춰 스윙을 해보기도 한다.
< 2024 메이저리그 주요 선발투수의 타순 바퀴별 평균자책점 >
실제로 투수의 평균자책점은 대부분 타선의 첫 번째 바퀴에서 가장 낮고 타자를 여러 번 마주할수록 점점 더 높아진다. 투수의 체력적 문제도 있지만, 타자가 해당 투수의 공에 익숙해지기 때문이다.
트라젝트 아크는 타자가 투수의 공에 익숙해지는 시간을 최소화하여 생소함이라는 투수의 무기를 무력화시킨다. 투수는 자신의 공의 궤적과 로케이션을 이미 수많은 연습으로 체득한 타자들을 상대할 수밖에 없다. 이에 대해 좌완 투수 케일럽 퍼거슨은 타자를 모방하여 상대해 볼 수 있는 장비는 없는 상황에서 타자들이 자신의 공을 끝없이 상대할 수 있다는 것은 불공평하다고 불만을 표시하기도 했다.
특히 상대적으로 다양한 볼 배합을 가져가지 못하는 불펜 투수들에게 더 큰 영향을 미칠 수 있다. 실제로 2024년 불펜 투수의 삼진율은 22.9%로, 8년 만에 처음으로 23% 밑으로 내려갔다. 이러한 하락은 트라젝트 아크가 앞으로 메이저리그에 미칠 영향의 예고편일 수 있다.
마치며
야구의 인기를 높이고 사람들의 이목을 끌기 위해서는 리그가 타고투저 성향을 띠는 것이 좋다. 사람들은 화끈한 타격전, 시원한 홈런에 열광하기 때문이다. 만프레드와 메이저리그 사무국도 흥행을 위해 피치클락, 3타자 상대 규정 등 타자에게 유리한 규정들을 계속 도입하고 있다. 최근 많은 논란을 불러일으킨 선발 투수 6이닝 의무화 규정도 이러한 시도의 일환이다.
트라젝트 아크 역시 타자에게 절대적으로 유리한 기술이다. 그런 면에서 트라젝트 아크는 메이저리그 흥행에 큰 도움이 될 수 있다. 트라젝트 아크의 도입은 리그의 타격을 활성화하여 사람들에게 더 박진감 넘치는 경기를 제공할 것이다. 실제로 메이저리그 사무국은 지난 시즌부터 트라젝트 아크의 경기 중 사용을 허용하기 시작했다.
새로운 기술의 도입은 리그의 발전에 기여한다. 2024년부터 도입된 KBO의 자동 투구 판정 시스템(ABS)은 공정성, 쾌적함 측면에서 좋은 평가를 받고 있다. 트라젝트 아크도 메이저리그 흥행에 기여할 가능성이 높다. 여기에 타자들의 경쟁력 강화와 이에 대응한 투수들의 실력 향상이 이루어진다면 메이저리그는 더 높은 수준으로 도약할 수 있을 것이다. 앞으로 트라젝트 아크가 메이저리그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관심 있게 지켜보자.
참고 = ESPN, University of Waterloo, Fangraphs
야구공작소 김태현 칼럼니스트
에디터 = 야구공작소 익명, 전언수
일러스트 = 야구공작소 안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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